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52] 생명의 도박판에 나를 끼워 주십시오

이 시간 주요기사

뉴스 > 연재소설

한 발도 나아갈 수 없는 세상의 끝에서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3-19 06:30:10

“정하운이 이곳에 날 보낸 이유는 뭡니까?”

최주결 박사는 나를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유리창에 비친 자기 모습, 아니 그 너머 해월영을 짓누르고 있는 어둠과 바람, 겨울의 바다 한가운데를 방황하고 있었다.

“도박 같은 거지.”

“그 도박판에 나를 끼워 주십시오.”

내가 말했다. 노인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이 녀석이라면 한번 믿어도 되지 않을까, 갈등하는 눈빛이었다. 한동안 금주에 성공했던 알코올 중독자처럼, 오랫동안 손을 씻었던 금고 털이범처럼 ‘딱 한 번만 더!’라는 강렬한 유혹 앞에서 흔들리고 있는 얼굴이었다. 조금만 더 설득하면 ‘같이 크게 한탕 해 보자’며 손을 내밀 찰나였다.

그 순간, 벽에 걸린 괘종시계가 뎅그렁거리기 시작했다. 예불 때 울리는 범종만큼이나 쩌렁쩌렁, 시계는 천천히 아홉 번을 울었다. 시계가 타종을 반복하는 그 긴 시간, 박사의 눈에서 희미하게 흔들리던 불빛이 훅 하고 꺼졌다.

“그만하세나. 난 너무 늙었어. 좀 쉬어야겠네.”

나는 노인의 얼굴을 허탈하게 멍하니 바라보았다.

“12시간마다 먹으면 통증은 참을 만해질 걸세. 시력도 한결 나아질 테지.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이게 다일세.”

그가 일어서며 환약이 든 유리병을 내밀었다.

“오늘은 늦었으니 올라가 쉬게나. 2층 두 번째 방이네. 그리고 내일 아침 일찍 떠나게.”

약병을 건넨 노인은 나를 혼자 남겨 두고는 침실로 보이는 진료실 옆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혼자 남겨진 나는 한동안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덜컹거리며 바람이 창문을 흔들었다.

창밖은 검은 어둠뿐이었다. 나는 비틀비틀 일어나 거실 창을 열었다. 달도 없는 밤, 바람이 몰아쳐 들어왔다. 바람이 불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파도는 언제부터 치기 시작했을까? 빛과 어둠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검은 유리창 밖에 펼쳐진 바다와 어둠의 풍경은 구분되지 않았다. 오직 바람과 파도 소리가 그곳에 바다와 하늘이 있음을 증명했다.

- 신은 고통을 창조했다.

우리에게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지난밤 에바의 노트에서 읽은 첫 문장이 떠올랐다. 내가 겪은 고통과 내가 얻은 사랑의 상관관계를 따져 보려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여의나루역에서 해체되어 버린 내 삶이, 병원을 전전하던 지난 몇 달이 전생인 것처럼 아득히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세상의 끝, 나는 벼랑 끝에 매달려 추락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해 버티고 있었다.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나는 배낭을 찾아 들고 힘없이 2층으로 향했다. 발이 닿을 때마다 나선형 나무 계단은 우두둑 뼈마디들이 부딪치는 소리를 냈다. 1층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복도식 구조였다. 2층 난간에서 올려다본 채광창은 한결 커 보였다. 2층에는 두 개의 방과 욕실이 있었다. 문의 위치로 가늠했을 때 두 번째보다 첫 번째 방이 더 큰 것 같았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김규나 필진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