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이&땅] 장발장 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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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땅] 장발장 은행

박병헌 기자 기자페이지 + 입력 2024-03-26 06:30:30

▲ 장발장들만이 돈을 빌릴 수 있는 장발장 은행은 무신용·무담보·무이자로 대출을 해 준다. 신용보다는 절실함이 대출의 우선순위다. 연합뉴스

19세기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의 주인공인 장발장은 가난 때문에 7명의 조카들이 굶게 되자 그들을 먹일 빵을 훔치려다 붙잡혀 5년형을 선고받는다. 이후 4번의 탈옥으로 5년+14년 총 19년을 살다가 형기를 다 채우고 세상에 나온다. 하지만 그는 전과자라는 이유로 돈이 있어도 식당과 여관에서 받아 주지 않는 처지에 놓이고 세상을 저주하게 된다.

그러던 도중 미리엘 주교의 도움으로 주교관에 머물게 된다. 세상에 대한 불신과 증오심으로 가득한 장 발장은 주교의 은제 식기를 훔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감옥에 갈 처지에 놓이게 됐다.

하지만 미리엘 주교는 자신이 장발장에게 준 것이라며 그의 죄를 묵인하고 오히려 은촛대 2개를 주는 은혜를 베풀어 그의 삶을 바꿔 놓는다. 장발장은 이후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일에 나섰다는 게 소설의 줄거리다.

노동자인 장발장이 배곯는 조카들을 위해 빵을 훔친 행동은 옮은 건가. 그리고 빵을 훔친 죄로 감옥에 19년 동안 갇혀 있는 건 옳은 건가. 조카들 생명이 빵보다 훨씬 값어치가 있다는 사실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장발장의 행동은 잘못되었지만 감옥 19년형은 적절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벌금형을 선고받고도 돈이 없어서 감옥에 갇혀 노역을 해야 하는 현대판 장발장들이 요즘 수두룩하다. 경기가 침체될수록 막다른 길로 내몰리는 장발장이 많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장발장들이 벌금을 납부할 수 있도록 대출해 주는 장발장 은행은 금융기관이 아니다. 인권 단체에 가깝다.

이 은행은 아무에게나 돈을 꿔 주진 않고 장발장들만이 돈을 빌릴 수 있다. 대출에는 무신용·무담보·무이자로 어떠한 문턱도 없다. 신용보다는 절실함이 대출의 우선순위다.

장발장 은행이 문을 연 지가 얼마 전 만 9년이 됐다. 지금까지 1300명가량에게 대출한 금액은 모두 22억여 원. 매달 1000원씩 갚는 사람도 있다. 그간 대출금을 모두 갚은 사람도 300명이 넘는다.

지난해 법원으로부터 확정판결을 받고 벌금을 내지 못해 감옥에 간 사람이 5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들이 마지막 희망을 걸고 찾아가는 곳이 장발장 은행이다. 불황의 그늘이 깊어질수록 생계형 범죄는 늘기 마련일 게다. 장발장 은행이 미리엘 주교같은 역할을 하고 있음에 마음이 따뜻해진다. 장발장들을 보호하기 위한 그들의 노력과 고군분투에 박수를 보낸다. 실물경제가 호전돼 생계형 범죄가 아예 사라지는 날은 언제쯤 올까.

박병헌 디지털뉴스 국장

박병헌 기자 bhpark@skyedaily.com 기자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