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소절 마음을 담아 연주하는 피아노곡이 감상하는 이들의 눈과 귀·마음을 모두 사로잡았다. 그러나 피아니스트가 한 여인에 대한 사랑을 담아 작곡한 이 곡은 장차 일어나게 될 모든 비극의 시작이 되었다.
글루미 선데이, 우울한 일요일이라는 의미의 이 노래는 19세기 중반 실제 어마한 연쇄 죽음을 불러일으켰다.
뮤지컬 ‘글루미 선데이’는 이 아름다운 선율이 울려 퍼진 후 무려 17건에 달하는 연쇄 자살 사건을 발생시킨 1939년대 헝가리 부다페스트를 주무대로 한다.
이야기는 어느덧 80세가 된 주인공 한스가 55년 만에 헝가리 부다페스트 14구역을 다시 찾아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에서부터 출발한다.
“55년 만이군요. 아내에게 언젠가 부다페스트를 꼭 보여주겠다고 약속했는데 80세 생일이 되어서야 그 약속을 지키게 되었네요.”
영화 글루미 선데이를 기반으로 한 창작 뮤지컬 글루미 선데이는 네오 프로덕션이 제작사로 참여한 초연 작품이다. 지난해 11월5일 개막해 서울 종로구 혜화동 링크아트센터에서 공연하고 있다.
이 작품에는 거대한 무대장치도 화려한 꾸밈도 없다. 다만 4명의 주인공이 무대를 종횡무진하며 가슴을 울리는 한 편의 서사를 완성한다. 인간의 존엄과 선택에서 질문과 답을 끌어내며 작품의 완성도를 높인 것이다.
특히 4인 4색이라는 매력을 지닌 주인공의 동선과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쫓다 보면 어느새 함께 눈물짓고 슬퍼하며 아파하고 분노하는 섬세한 감정선이 그려진다.
이렇게 작품 몰입도를 최고로 끌어올린 바탕에는 무대 조명과 현장감을 살린 배우의 연기 외에도 미장센에서 부대적인 요소를 최소화해 관객과 더 가깝게 소통하고자 하는 연출에서 배려와 배우들의 노력을 빼놓을 수 없다.
작품은 전쟁의 끝자락에서 혼란스러운 시대 상황을 묘사한다. 한스의 독백을 통해 돌아간 과거 장면에는 네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자보’ 역의 최재웅·김종구·정문성과 ‘일로나’ 역의 이정화·허혜진·이지연과 ‘안드라스’ 역의 정민·유승현·홍승안과 ‘한스’ 역의 이진혁·반정모·홍기범이 그 주인공이다.
만연한 전쟁의 기운이 감도는 헝가리 부다페스트 14구역에는 작지만 고급스러운 자보의 레스토랑이 자리 잡고 있다.
늘 손님이 붐비는 탓에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된 테이블은 순식간에 고귀한 음식으로 채워진다. 그중 ‘자보’가 만든 비프롤은 손님이 가장 많이 찾는 단연 최고의 인기 메뉴다.
자보의 레스토랑은 주인공 자보가 아름다운 연인 일로나와 운영하는 곳이다. 한 송이의 꽃 같은 일로나와 그 곁을 든든하게 지키는 자보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과 같다.
“자보의 레스토랑은 탁월한 음식 맛과 감미로운 연주 그리고 한 여인의 매력으로 인해 매일 밤 북적이기 시작했죠. 이따금 아니 자주 그녀에게 구애하는 청년들이 있었는데 한스는 그 무리 중 하나였어요.”
일로나에게 구애한 독일인 ‘한스’는 차갑고 냉정한 인물이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독일군이 헝가리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독일 장교가 된 한스는 자보의 다시 레스토랑을 찾았다. 전쟁 여파로 자신을 온화하게 대했던 자보에게 총구를 겨누며 악마화한 모습도 보이면서 말이다.
그러나 냉혈한 모습 뒤엔 따뜻한 마음도 숨어 있다. 장교가 되기 전 무역회사를 세우겠다는 꿈을 꾸며 단골손님으로 자보의 레스토랑을 방문했을 때는 일로나에 한 눈에 반해 사랑의 감정을 품고 청혼을 했다.
“제 아내가 되어주세요. 저와 함께 베를린으로 가요. 저에겐 꿈이 있어요. 독일의 기술을 세계에 알릴 겁니다. 그리고 독일의 가장 큰 무역회사를 세울 거예요. 당신과 함께.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해요. 저와 결혼해 주세요.”
그렇지만 거절당해 강에 뛰어들고 자살을 시도하는 나약한 양면을 드러낼 때 자보가 발견해 목숨을 구해주자 은혜를 갚겠다고 선언한다. 비록 사랑은 이루지 못했지만 계속해서 레스토랑을 찾아 도움을 제안하기도 한다.
집시 여인 ‘일로나’는 자보와 안드라스라는 두 사람을 동시에 사랑했고 자보·안드라스·한스 세 사람에게 사랑받았다. 사랑에 빠진 안드라스로부터 즉석 작곡한 곡을 선물 받는데 이 곡은 듣는 사람을 자살로 몰아가는 절망적인 노래로 전락하고 만다.
작곡가 ‘안드라스’는 자보의 레스토랑에 피아니스트로 고용된다. 일로나를 본 후 사랑에 빠져 그녀의 생일에 글루미 선데이라는 곡을 직접 작곡해 헌사했다.
곡이 유명해지며 그의 노래를 듣기 위해 레스토랑으로 방문하는 손님이 늘고 음반으로까지 발매되는 영예를 얻었지만 많은 이를 자살로 이끌었다는 압박에 시달리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죽음이라는 존엄을 택한다.
자보는 다정함과 자신감을 가졌다. 일로나와 레스토랑을 운영하며 새로운 피아니스트 안드라스를 고용한다. 그런데 새로 채용한 피아니스트가 일로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자 그녀의 마음을 절반씩 갖고 세 사람이 레스토랑에서 함께 지내기를 제안한다.
안드라스가 일로나의 생일 때 즉석 작곡한 곡이 전세계적으로 명성을 크게 얻으며 레스토랑을 찾는 발걸음도 늘어 성공 가도를 달리는 듯했지만 전쟁의 잔인함이 레스토랑까지 엄습할 때쯤 더 이상의 희망을 논할 수 없었고 그에게는 고통과 상실만이 남았다.
‘자보’ 역을 연기한 배우 정문성은 장면 중 한스가 자보에게 총구를 겨누는 부분을 소화하면서 끝나지 않을 두려움을 이같은 연기로 승화했다.
“자보는 지켜내려는 사람이다. 이에 일로나에게는 든든한 버팀목이자 안드라스에게는 믿음직스러운 친구가 되어야 했다. 지키는 사람·안고 버티는 사람·누군가를 편안하게 하려는 사람은 고통이나 상처의 크기와는 상관없이 이를 견뎌내야만 한다. 심지어 그런 감정을 드러낼 수도 없다. 내 사람들에게는 고통을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그는 “그렇지만 자보도 한 인간이기 때문에 참으려 해도 터져 나오는 두려움과 여린 모습이 있다”며 “(연기에서는) 이 부분에 역점을 뒀다. 자신의 의지로는 절대 하지 않았을 표현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과 만나 결국 드러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자보라는 캐릭터에 한껏 몰입한 그의 선명한 연기에서는 고통과 두려움을 애써 억누르는 복합적 감정과 전율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는 이 작품에서 가장 애정을 갖는 부분으로 기차역 장면을 꼽았다. 홀로 있지만 모든 주인공을 만나며 가장 솔직하고 간절한 감정을 끌어냈기 때문이다. 이는 줄곧 눈물을 삼켜야 했던 자보가 실컷 울음을 터뜨린 유일한 장면이기도 하다.
정문성은 “(기존 영화화된) 훌륭한 작품을 다른 장르로 재해석해 가장 중요한 메세지를 정성스럽게 전달하는 것이 (배우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며 “이 과정에서 여러 해석이 나오고 가려진 부분에 상상력 등이 가미되면 작품은 새롭고 풍성해지는 것 같다. 마음을 다해 연기할 때 정말로 행복하다”고 특별한 작품에 임한 소감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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