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수 
▲ 역사 칼럼니스트(고구리역사저널 편집인) ⓒ스카이데일리
호태왕 비문에서 20년 동부여 정벌기사 이후에는 더 이상 공적에 관한 내용이 없고 묘를 지키는 것에 대한 규범인 수묘인연호(守墓人烟戶)가 이어진다. 호태왕은 영락 24년(414) 갑인년 7월에 39세의 젊은 나이로 붕어하고, 아들 장수태왕이 바로 즉위해 그 해 9월 29일 호태왕을 황산에 모시고 공적비(일명 광개토 호태왕 비)를 세우게 된다.
‘삼국사기’에는 “광개토왕 18년(409) 4월에 왕자 거련을 태자로 삼았고, 8월에 왕이 남쪽을 순행했다”는 문구 이후 4년간 아무 기록도 없다가 22년(413) 10월 왕이 훙(薨)했다는 기록만이 적혀있을 뿐이다. 게다가 뒤를 이어 즉위한 장수왕(거련)은 광개토왕의 맏아들로 체격이 장대하고 의기가 호방했다고 기록돼 있는데, 과연 이 기록들은 역사적 사실일까.
장수태왕은 호태왕의 둘째아들
먼저 영락(永樂)이라는 자체연호를 쓴 황제의 죽음을 제후에게나 쓰는 훙(薨)이라고 쓴 것부터가 대단히 잘못된 것이며, ‘고구리사초략’에는 “영락 19년 기유(409) 4월, 호태왕은 거련(巨連)을 동궁태자로 삼고, 장자 경(鯨)에게 명해 선왕(仙王)이 되게 했다”라는 기록이 있어 장수태왕은 맏아들이 아니라 둘째아들이었고, 게다가 형 경태자와 동생 거련은 이복형제였다.
보위에 오른 호태왕은 동궁비 토산(吐山)을 황후로 올리고는 또 한 명의 황후를 책봉하는데 그녀가 바로 평양(平陽)황후였다. 평양은 소수림제의 원비(元妃)였던 연(燕)씨 소생으로 젊어서는 선약(仙藥) 관련 일을 즐겼고, 요조숙녀의 덕이 있고 행실이 깔끔해 다른 남자들을 곁눈질하지 않아 나이 24세가 되도록 정조를 지켰다고 한다.
호태왕은 잠저에 있을 때 궁인이 된 친누이 평양에게 승은을 내려 딸 가련(加連)을 낳았고, 또한 평양은 자신의 쌍둥이 동생인 장남 강(岡)에게 정윤(동궁)의 자리를 이복동생 담덕에게 양보하라고 여러 차례 설득한 공로가 더해져 황후로 봉해지니 당시 33세였다. 호태왕은 큰 일이 있을 때 마다 성덕을 지닌 평양황후에게 항상 매사를 의논하고 행했으며, 호태왕이 붕어하자 평양황후는 아들 장수태왕을 남겨두고 따라 죽었다.
영락 2년(392) 3월에 토산황후가 첫아들 경을 낳고, 4년(394) 갑오 2월에 평양황후가 꿈에 무량수불(無量壽佛)을 보고는 점지돼 둘째아들 거련을 낳는다. 호태왕이 토산황후 소생인 장자가 아닌 평양황후 소생의 둘째아들 거련을 정윤(동궁)으로 정한 이유는 바로 사랑하는 이복누이 평양황후의 혈통 때문일 것이다. 둘째 아들이었던 호태왕도 모후인 천강태후의 혈통 때문에 이복형 강을 제치고 정윤이 된 바 있다.
물론 태자로서의 자질도 동생 거련이 형인 경태자보다 출중했기에 그리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리사초략’에 “거련은 태어나면서부터 생김새가 무척 듬직하고 목소리가 웅장했으며 눈을 뜨자마자 앉으니, 호태왕은 ‘이 아이가 태조대왕을 닮았구먼’이라고 하면서 평양에게는 ‘그대가 선을 좋아하더니 이렇게 훌륭한 아이를 낳았소. 선(仙)이 불(佛)보다 못하지 않소이다’라고 말하고는 전국에 있는 선원(仙院)들을 수리하라고 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 KBS 드라마 광개토태왕에서 태왕위에 오르는 태자 담덕 [이미지=필자제공]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정복군주 호태왕의 뒤를 이어 21세에 즉위해 고구리의 최전성기를 활짝 열었던 장수대제(거련)는 걸출한 황제로 널리 인자했으며, 효성과 우애가 있어 백성을 아꼈고, 경적과 사서에 통달하고 예절을 익혔으며, 군사들을 잘 통솔하고 기이한 지략도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강력했던 정복군주 호태왕이 요절한 이유
우리는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정복군주가 39세의 아까운 나이에 요절한 것을 무척 안타까워하며 호태왕이 제 수명을 다하지 못한 이유를 계속되는 정복전쟁으로 인한 과로사(過勞死)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쟁터를 동분서주하며 쉴 새 없이 전투를 치르느라 피로가 누적돼 젊은 나이에 갑자기 죽은 것으로 알고 있다. 과연 그런지 타임머신을 타고 당시 호태왕 곁으로 가보도록 하겠다.
영락 19년(409) 10월, 아비 탁발규를 죽이고 북위의 왕이 되려했던 서자 탁발소(紹)가 적형인 탁발사(嗣)에게 토벌돼 죽었다. 서자 탁발소의 출생의 사연은 다음과 같다. 탁발규는 친모 하씨와 서로 상통하고 좋아하는 사이였다. 하루는 탁발규가 하씨의 여동생 하란(賀蘭)의 미모에 반해 연통하려하자, 하씨가 시샘을 내며 “유부녀와 놀아나면 변고가 생기는데, 어쩌려고 그러시오”라고 말했다.
결국 탁발규는 하란의 남편(이모부)을 죽이고 이모 하란과 관계를 맺어 탁발소를 낳았기에 흉악한 이리처럼 무도해 필경 아비까지 시해한 것이었다. 패륜아 탁발사가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호태왕은 동궁 거련에게 “탁발식(규의 아비)과 탁발소 모두는 어미와 상통했고 아비를 죽였다. 경계하지 않아도 되겠느냐?”라고 말했다.
또 풍발(馮跋)이 고운(高雲)을 죽이고 북연의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호태왕은 동궁에게 “고운은 자신의 미모로 사람을 섬기다가 귀해졌으나 필경 자기 왕을 죽였고, 또한 미모를 사랑하다가 풍발에게 죽임을 당했다. 사람들의 왕이 된 자는 남색(男色)과 예쁜 암컷들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예쁜 암컷들은 수컷을 죽이는 흉기이고, 남색은 자손을 끊기게 하는 적이다”라고 훈계했다.
▲ 북위를 세운 탁발규 동상 [사진=필자제공]
21년(411) 신해 정월, 풍발이 사신을 보내 “신은 앞선 신하 고운이 남긴 조서에 따라 보위를 잇고, 고운의 딸을 처로 삼았습니다. 세세토록 조상나라의 신하가 되겠습니다. 삼가 저희 땅에서 나는 것들을 챙겨서 바쳐서, 정성을 표시하옵니다”라고 아뢰기에 호태왕이 사신의 목을 베어 죄를 물으려 했다가 대신들이 말려서 그만뒀다. 이듬해에는 풍발이 딸을 후궁으로 바치고 장무(章武)와 숙거(宿車)땅을 갖겠다고 청했으나 호태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여기서의 장무는 ‘한서지리지’의 유주(幽州)에 속해있는 발해군(渤海郡)에 속하는 지명이다.
20년(410) 동부여를 정벌하고 돌아온 호태왕은 황후 셋과 함께 동궁 및 두 동궁비를 대접했다. 두 동궁비는 동궁상비가 된 천룡(天龍)과 동궁차비가 된 삼산(三山)이었다. 흥이 고취되자 호태왕이 동궁에게 “네가 이 두 여인만을 아끼고 여타 여인들을 탐하지 않는다면, 너는 가히 나를 능가할 것이다. 그러나 나처럼 호색한다면, 고운과 탁발규 꼴을 면치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천강태후가 나서며 “조종이 있어온 이래로 처를 둘만 두신 주상을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폐하께선 어찌 고운과 탁발규를 들어서 훈계하십니까?”라고 아뢰자, 이에 호태왕은 크게 진노해 국그릇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며 “예쁜 암컷들은 사내를 죽이는 흉기란 말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태후가 당상에서 내려가 죄를 청하고, 두 동궁 비들과 동궁이 슬퍼하며 애원하기를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진노가 가라앉았다. 이 일이 있은 후로 호태왕이 자주 대노했다고 한다.
‘고구리사초략’에 기록된 호태왕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다. “영락 24년(414) 갑인 5월, 상이 태후를 모시고 온탕에 갔다. 6월엔 국양릉(國襄陵)을 찾아뵙고 거듭해 비류(沸流) 온탕궁(溫湯宮)에서 머물다 병이 들자, 두 황후와 동궁 및 두 동궁비를 불러 전위했다. 동궁은 고사하다가 하는 수 없이 북도 주유궁(朱留宮)에서 즉위했다. 7월, 상이 주유궁에서 붕하시니 춘추 39세였다. 평양황후가 따라 죽었으며, 황산(黃山)에 장사지냈다”
위와 같은 일화로 미뤄볼 때 호태왕은 토산‧평양 두 황후와 태후 이외 다른 여자를 탐하지도 또 후궁을 들이지도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두 황후 특히 태후에게 너무 정욕을 남발한 나머지 건강을 심히 해친 것으로 보인다.
호태왕이 동궁에게 “네가 이 두 여인만을 아끼고 여타 여인들을 탐하지 않는다면, 너는 가히 나를 능가할 것이다. 그러나 나처럼 호색한다면, 고운과 탁발규 꼴을 면치 못할 것이다.”라는 말 속에 호태왕이 요절한 이유가 들어있다고 할 수 있다. 호태왕은 아들 장수태왕에게 자신과 같이 행동하지 말라고 훈계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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