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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는 아빠 엄마 이야기…풍전등화를 지켜낸 달빛 인생①
바람 앞 촛불처럼 자란 아들…78년을 회상하다
생계 위해 좌판장사, 두려움의 연속…부모님 권유로 20대 초반 결혼
대통합 필진페이지 + 입력 2017-06-04 19:51:59
 
 ▲ [사진=국민대통합위원회]
나는 자수성가한 1938년생. 올해 나이 78세이니 내일모레면 80이다.
 
세상살이가 좋아져서 참 오랜 시간 다행스럽게 잘 살아왔다. 먼 옛날 벼슬아치들의 귀양지였던 진도에서 4남 7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모든 게 어렵던 전염병으로 3남 1녀가 사망한 후, 나는 아버지 연세가 40 중반이던 때, 늦둥이로 태어나 잦은 병치레를 하며 성장했다고 부모님께 전해 들었다. 그래서 남은 1남 6녀 중 유일한 아들로 유난히 넘치는 보살핌과 사랑을 받으며 유년시절을 보냈다.
 
부모님은 생전에 나를 바람 앞에 촛불 같다고 하셨다. 전염병으로 형들을 다 잃은 고통이 컸기에 금쪽 같이 귀한 늦둥이 외아들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할까 봐 늘 노심초사하셨다. 생사를 걱정하던 내가 어느새 성인이 되고 가정을 이뤄 자식 교육을 마친 노년이 됐으니 세월 참 빠르고 인생이 무상하다. 삶의 의미를 알게 되며 인생의 황혼에 서고 보니 헌신과 희생으로 자신보다 자식을 더 아껴주신 부모님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부모님은 외동아들에 대한 교육과 장래를 위해 해방되던 해에 육지로 이사했다. 대대로 조부모님께 물려받아 경작하던 전답을 처분하면서까지 자식 교육에 온 힘을 다하셨다. 이사를 하면서 힘겨운 타향살이에 풍족했던 재산도 고갈되고 불행이 겹쳐서 전쟁까지 겪게 됐다. 생사를 가르는 전쟁의 포화 속에서 굶기를 일상으로 여기며 피난하러 다녀야 했다. 우리 가족은 이불로 몸을 휘감고 총알을 피해 천만다행으로 살아남았다. 그중에 나 혼자만 겨우 초등교육을 마쳤으니 그래도 행운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들은 나를 예의 바르고 부지런하며 꼼꼼하고 손재주가 좋다는 말씀을 하시며 상급학교 진학을 간곡하게 권유했다. 그러나 너나 할 것 없이 한 끼의 생계를 걱정하며 곤궁했던 시절이라 늙으신 부모님은 절망 속에서도 우리를 먹여 살리기 위해 보따리 행상을 했다. 나는 가족의 생계를 위한 실제의 가장 역할을 해야 했기에 아쉽게도 상급학교에 갈 수 없었다.
 
막막한 현실에서 진학포기의 설움도 잠시, 선생님 말씀을 떠올리며 며칠 동안 장터를 떠돌다가 작은 모퉁이에 겨우 자리를 잡았다. 남의 가게 벽에 기대어 입간판 옆에 조그만 좌판을 놓고 라디오나 라이터, 시계 등을 고치는 일을 하게 됐다. 여름에는 고장 난 우산으로 햇빛과 비를 가리고 겨울에는 낡은 천막 천으로 눈보라를 가리며 지낸 한 평 남짓 작은 곳이었다. 그래도 나만의 공간에서 가족을 책임진다는 뿌듯함과 손님들의 손재주 칭찬에 기쁜 마음으로 더욱 열심히 최선을 다했다.
 
한편으로는 모든 게 낯선 타향에서의 생존이 내게는 끝을 모를 두려움의 연속이었다. 형제가 없는 외둥이 늦둥이로서 나와 더불어 지내며 보호해 줄 울타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나는 형제가 많은 친구가 늘 부러웠다. 그래서 미리부터 피해를 본 것 같은 조바심 속에 내가 먼저 상대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양보해 신뢰를 쌓고 지냈다. 교복을 입은 또래를 보면 그저 부러움에 내 마음이 다칠까 봐 먼저 외면했다. 누구든 내 앞에서 시비를 걸면 조용히 비켜주고 때로는 나의 권리를 포기하기도 했다. 눈물과 땀으로 얼룩진 나날들이 계속됐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활이 몸에 배어서 일찍 철이 들었던지 나이에 비해 어른스럽고 예의 바르다는 평도 들었다. 생각해보면 어린 나이에 생업에 뛰어들면서 또래보다는 윗사람들과 어울려 생활해왔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다소 생활에 안정을 찾게 되자 공부에 대한 미련을 떨치기 위해 야학에 다닐 기회를 찾았다. 드디어 내게도 배움의 기회라는 행운을 줬다. 종일 시장의 모퉁이에서 땀내가 베인 차림이었지만 저녁이 되면 설레는 마음으로 학교로 향했던 시절은 배움에 대한 갈증을 해소할 수 있어서 행복한 시절이었다. 무겁게 내려앉는 눈꺼풀을 비벼가며 겨우 고등공민 과정을 마치고 생업도 경륜이 쌓이면서 조금 더 규모 있게 사업도 확장할 수 있었다.
 
청년 시절에는 가내수공업으로 면직공장을 운영했는데 사람을 부리는 일은 어려운 일이었다. 원만한 인간관계를 늘 중요하게 생각했던 터라 작업장에서 불성실한 직원에게도 젊은 책임자로서 반복적인 지시나 직언을 줄이려 잔업을 혼자 처리하기도 했다. 장터에서 다양한 삶을 경험하면서 인연이 된 사람들에게도 남의 고난이 내 것인 것 같아 쉽게 호의를 베풀었다가 서운한 감정만 남은 채 손해를 입는 일도 많았다.
 
내 나이가 성인에 가까워지자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외둥이를 서둘러 혼인시키려는 부모님의 뜻은 내 뜻과 무관하게 양가 부친의 정혼으로 결실을 보았다. 부모님말씀에는 거역 없이 생활했던 나는 자연스럽게 부모가 정혼한 지금의 아내와 얼굴도 안 보고 이십대 초반에 다소 이른 혼인을 했다. 그것이 우리 부부 인연의 시작이었다.
 
아내를 처음 만났던 날! 그날을 생각하면 어색함과 부끄러움에 지금도 손발이 오그라드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나중에 중매쟁이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아내는 부모가 정혼한 결혼을 약속하는 약혼 사진을 찍어야 했기에 사진관이 있는 읍내에 처음 나온 날이었단다. 뿌연 먼지를 날리며 요란하게 달리는 시골 완행버스도 처음 탔다고 했다. 나는 읍내에 살았지만, 아내는 작은 면 단위 지역에서도 더 깊숙한 산골에서 거의 자급자족하다시피 한 고립무원 같은 집성촌에 살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잔뜩 굳은 표정과 부동자세의 어색함으로 가득 찬 사진 촬영이 끝나고 나는 예비신부를 대접하기 위해 큰맘 먹고 요리 집을 찾았다. 요리 집이라고 해야 중국집이 전부였고 대부분 서민은 외식을 생각도 못 해보는 시절이었다. 나는 나름대로 경제활동을 하는 터라 예비신부를 위해 나름 거창하게 짜장면과 탕수육, 팔보채까지 주문했다.
 
예비신부는 통치마 한복차림에 얼굴빛이 하얗고 맑았다. 곱게 빗어 땋아서 목선 앞으로 늘어뜨린 까만 양 갈래머리까지 아주 다소곳한 인상이었다. 예비신부는 의자에 앉았지만, 어깨를 덮은 길이의 땋은 머리가 식탁에 닿을 정도로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이 없었다. 그때는 남녀가 유별한 시절이고 나 역시 어린 나이에 생업에 전념하다 보니 이성에 대한 관심을 가질 기회가 없었던 때였다.
 
어색한 기운만 감도는 식당에 마주 앉아 누가 먼저 음식에 손을 대지도 못하고 시간이 흘렀다. 나 역시 식사를 권하기만 할 뿐 같은 태도를 반복하며 유지하고 있었다. 급기야 시골 버스 시간이 됐고 그토록 귀한 음식에는 손을 대보지도 못한 채 우리는 식당을 나오고 말았다. 지금 같으면 포장이라도 해달라고 했겠지만, 그땐 정말 그런 생각도 못 했다. 온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대접을 준비했던 식사를 그대로 놓고 나와서 지금 생각해도 아깝고 속상하고 또 창피함에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웃음만 나온다.
 
우리 부부는 정말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사람들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아내는 그날 버스를 처음 타서 멀미했고 읍내 구경도 처음이어서 무섭고 겁이 났단다. 낯선 곳에서 살아갈 일도 걱정이고 낯선 남자도 처음이라 혼란스럽고 정말 힘든 하루였다고 했다. 그런 사연을 시작으로 우리는 부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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