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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력 384년 겨울, 북방의 칼바람이 고구려 궁성의 심장을 도려낼 듯 우악스럽게 달려드는 밤이었다. 침전에서 곡성(哭聲)이 터져 나왔다.
시위로부터 소수림왕의 부음을 전해 들은 왕제 이련(伊連)은 황급히 입궐하여 침전으로 바쁜 걸음을 옮겼다. 얼마 전부터 왕의 병세가 심상치 않았지만 부음은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위기에 몰렸던 나라가 회복되어 가고 있는 이때, 국왕이 떠났으니 온 나라가 통탄할 일이었다. 더욱이 소수림왕은 후사를 남겨 놓지 않았다. 자칫하면 모처럼 안정을 찾은 나라가 흔들릴 수도 있었다.
근위대장 모개(毛蓋)가 이련을 맞이했다.
“어서 침전으로 드십시오. 시위장이 폐하의 유지를 받들어 행할 것입니다.”
이련이 왕의 침소로 들어서니 시위장의 경직된 얼굴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옆으로 너댓 명의 시위가 석상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시위장이 이련에게 공손하게 아뢰었다.
“폐하께서는 돌아가시는 순간에도 나라를 걱정하셨습니다. 유언하시길 후사를 왕제께 맡긴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붕어 사실과 새로운 왕의 즉위를 동시에 공포(公布)하여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불순한 세력의 도발이나 백성의 혼란을 막으라고 하셨습니다.”
소수림왕은 자기 죽음으로 촉발될 귀족들의 돌발 행동과 이를 틈타 쳐들어올 후연(後燕)과 백제의 준동을 염려했다.
소수림왕은 후사가 없음을 안타깝게 여겼지만 미련을 두지는 않았다. 내심 아우 이련의 아들 담덕(談德)을 후계자로 점찍었다. 담덕은 어리지만 어른을 능가할 정도로 담대하고 총명했다. 기상도 남달라 늘 주변을 놀라게 했다.
소수림왕은 기회 있을 때마다 담덕을 불러 옆에 두고, 위대한 선조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다정하여 부자간처럼 보였다. 하지만 왕은 담덕을 당장 태자로 삼을 수 없었다. 왕후가 아직 젊어서 충분히 후사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담덕이 태자가 된다면 왕후 세력의 표적이 될 게 뻔했다.
소수림왕이 기회를 엿보던 사이, 예기치 못한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웠다. 자신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왕은 조용히 이련을 불렀다.
“때가 무르익으면 담덕을 태자로 책봉하려 했는데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구나.”
이련은 왕의 말이 실감 나지 않았다. 그는 철옹성 같은 사내라, 어떠한 병마가 와도 끝내 물리칠 것 같았다.
“담덕이 뛰어나다고는 하나 혼란한 시기에 막중한 임무를 감당하기에는 너무 어립니다.”
“그래서 말인데, 일단 네가 나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야겠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심상한 얼굴이었다.
“소신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이제껏 보아온 너는 처신에 어긋남이 없었다.”
이련이 머뭇거리자 국왕이 위엄을 갖추고 말했다.
“맹세해라. 나라를 위해 한목숨 바치겠다고.”
왕명으로 못 박으니 더는 사양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자신이 왕위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왕후 세력에 의해 담덕의 목숨조차 위협받을 수 있었다.
달포 후, 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던 밤에 나타난 시종의 모습을 보는 순간 이련은 왕의 죽음을 직감했다.
이련은 시위장의 도움을 받아 모든 절차를 마치고 왕위에 올랐으니 바로 담덕의 아버지, 고국양왕(故國壤王)이다. 왕제 이련의 기습적인 등극에 왕후 일파를 비롯한 5부의 귀족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소수림왕은 죽음이 임박해서도 후사를 챙김에 빈틈이 없었다. 생전에 소수림왕의 지시대로 근위군과 도성 수비대장이 이련을 지지했기에 왕후 일파도 함부로 나설 수 없었다.
이련은 소수림왕이 안배한 대로 조정을 장악하고, 각 성의 성주들로부터 충성을 다짐받았다. 이로써 혼란을 최소화하면서 왕위 계승을 일단락 지을 수 있었다.
한편 서토에서는 화북을 통일했던 전진(前秦)이 비수 전투에서 동진(東晋)에게 대패하여 몰락했다. 화북은 다시 연(燕)·진(秦) 등의 여러 나라로 쪼개졌다.
고국양왕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군사 4만을 내어 요동을 공격했다. 연왕 모용수는 대방왕 모용좌를 요동으로 보내 막게 했다. 고구려군은 이들을 격파하고 요동과 현도군을 수복한 후, 남녀 1만여 명을 포로로 잡아 개선했다. 비록 모용농에게 요동을 다시 빼앗기기는 했지만 이후로도 고구려는 수시로 연나라를 압박했다.
등극한 지 3년이 지나자 고국양왕은 비로소 담덕을 태자로 삼았다. 그는 그새 몰라보게 성장해 있었다. 빛나는 눈은 깊이를 더했고, 체격은 장정 한 몫은 톡톡히 해낼 만큼 당당했다. 왕실에 비장된 안국군 달가의 ‘안국병법(安國兵法)’을 사사하여 병법과 무예에도 뛰어났다. 또, 어렵기로 소문난, 을파소가 지은 ‘치국도전(治國道典)’을 금세 익혀 사부들의 경탄을 자아냈다.
담덕은 사람들을 감싸는 포용력과 좌중을 압도하는 힘까지 지니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뛰어난 인재들이 그를 흠모하여 구름떼처럼 주변에 모여들었다.
화북의 혼란이 계속되면서 고구려의 서북변은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이에 고국양왕은 본격적으로 백제 정벌에 나섰다. 고국원왕이 평양성에서 백제군의 공격을 받아 죽은 이후 백제에 대한 복수는 그가 평생 쓰고 다녀야 할 굴레와도 같았다.
도성에 있다가 아버지 고국원왕의 전사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이련이 느꼈던 참담함은 형 구부(丘夫)의 그것과는 또 달랐다.
모든 면에서 뛰어나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형에 비해 이련은 눈에 띄지 않을 만큼 평범했다. 언제부터인가 부왕의 눈에는 맏아들만 보이는 듯했다. 이를 측은하게 여긴 구부는 아버지가 면박을 줄 때마다 동생을 감쌌다.
“이련은 침착하고 속이 깊은 아이입니다. 위기가 닥치면 현명하게 대처할 줄도 압니다.”
부왕은 끝까지 이련에 대한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다. 언젠가 큰 공을 세워 부왕의 인정을 받겠다고 다짐할 뿐이었다. 하지만 평양에서 날아온 비보는 그의 간절한 바람을 송두리째 날려 버렸다.
이련은 피를 토하고 눈물을 떨구면서 자신의 아버지를 앗아간 백제를 증오했다. 반드시 복수하리라 맹세했다.
이제 후사까지 정해 놓았으니 지난날의 맹세를 지킬 때가 온 것이다. 고국양왕은 나라 안팎의 상황을 두루 살펴본 후 군사를 이끌고 백제 땅으로 내려갔다.
고국양왕이 고구려 제18대 왕으로 등극한 이듬해, 백제에서는 침류왕이 재위 2년 만에 승하했다. 이에 근구수왕의 둘째 아들이자 침류왕의 동생인 진사가 제16대 왕으로 즉위하니, 바로 진사왕(辰斯王)이다.
진사왕은 부왕이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해 구축한 방어선을 점검했다. 대둔산과 천마산을 등지고 있는 도압성을 중심으로 서남쪽의 치악성(雉岳城·배천)과 서북쪽의 구두성(九頭城·평산(남천))이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기병과 보병·도수병·궁수병으로 이루어진 4만의 고구려 정예군은 수곡성을 지나 굴어압성을 단숨에 함락시켰다. 이어서 백제 최전방의 요충인 도압성으로 향했다.
고국양왕은 북부대인 아불파연(阿佛破然)과 남부대인 우나굴(于那屈)에게 각기 1만 명의 군사를 주어 치악성과 구두성을 치도록 했다. 자신은 나머지 군사를 거느리고 도압성을 공격했다. 도압성에는 1만, 치악성과 구두성에는 각기 5천의 백제 군사가 주둔해 있었다. 이들의 관계는 마치 뱀의 머리와 꼬리 같아서 한 성을 공격하면 다른 성들이 유기적으로 대응하게 되어 있었다. 각 성이 고립되게 해야만 이들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었다.
고국양왕은 도압성을 단숨에 함락시켜야 했다. 한성에서 백제의 구원군이 당도하면 적진에서 고립되기 마련이다. 백제를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속전속결이 답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고구려 왕의 전략은 처음부터 어긋났다.
도압성주 진협(眞協)은 근구수왕을 따라 전장을 누비며 수많은 공을 세운 백전노장이었다.
근구수왕이 세상을 뜨기 전 그를 불러 북쪽 국경을 지켜 달라고 부탁한 것은 그에게 일생의 자랑거리였다. 선왕의 유지를 받든 진사왕은 그를 도압성주로 삼아 북변을 수호하도록 했다.
진협은 평시에도 긴장을 풀지 않고 고구려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간자로부터 고구려의 출병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진협은 치악성과 구두성으로 전령을 보내는 한편 도성으로 파발을 띄웠다. 성주의 명을 받은 백성들은 채 익지 않은 곡식을 모두 거두어들이고, 성안으로 피신했다. 이것은 수성전을 펼칠 때 주로 사용하는 청야(淸野) 전술로 적과 오랫동안 대치할 때 효과적이었다. 원정군은 시간이 갈수록 보급이 어려워질 테고, 현지에서 조달이 안 되면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도압성주는 평소 고구려군의 공격에 대비해 성곽을 보수하고 경계를 강화했다. 고구려군이 본격적인 공격을 감행했지만 결코 틈을 보이지 않았다. 성벽을 오르던 고구려 군사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내렸다. 화살이 쏟아지고 돌과 통나무가 낙하하는 가운데 비명이 꼬리를 물었다.
치악과 구두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많은 고구려 군사가 성벽 아래 피를 뿌렸다. 본디 성의 방비만 제대로 갖추어도 공격하는 쪽의 군사가 수비하는 쪽보다 세 배 이상은 많아야 했다. 이처럼 전력이 분산된 상황에서는 성 하나도 함락시키기 어려웠다.
고국양왕은 일단 군사를 물리고 아불파연과 우나굴에게 전령을 보내 군사를 다시 집결시켰다. 많은 희생으로 떨어진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아 줄 묘책이 필요했다.
한편 고구려군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진사왕은 즉시 대책회의를 소집했다.
왕의 총신인 진가모가 호기롭게 왕에게 아뢰었다. 그는 호승심이 강한 장수였다.
“근초고왕 시절에 고국원왕이 우리에게 죽임을 당한 후로 고구려가 위협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겁니다.”
“장군만 믿겠소!”
진사왕은 크게 기뻐하며 진가모에게 보검을 하사하고, 대장군의 칭호를 내렸다. 그리고 1만의 정예병을 이끌고 도압성을 구원하라 명했다.
“폐하께서는 추호도 심려치 마십시오.”
진가모는 호호탕탕 군사를 이끌고 대수(帶水)를 건너 청목령성에 이르렀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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