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왕에게는 항시 따라붙는 단어가 있다. 삼천궁녀이다. 우리는 수많은 궁녀가 백마강(금강)에 몸을 던졌다는 낙화암의 전설을 떠올릴 때면 으레 삼천궁녀를 연상한다. 삼천궁녀는 역사적 사실일까?
삼천궁녀는 문학적 표현
삼천궁녀를 처음 쓴 사람은 조선 중기 문신 김흔(金訢)이다. 그가 자신의 문집 『안락당집』에 실은 ‘낙화암’ 칠언고시에 나온다. 원래 삼천궁녀는 많은 궁녀를 지칭해 쓰는 표현이다. 중국사서에도 적잖이 나오는데 진시황도 삼천궁녀를 쓴다. 한자에는 평측(平仄)이 있다. 일종의 높낮이로 많은 숫자를 표시할 때 나란히 놓인 삼천(三千)을 쓴다. 불교에서 말하는 삼천세계도 마찬가지이다. 김흔 역시 많다는 의미에서 삼천궁녀를 썼다.
의자왕은 삼천은 아니더라도 수많은 궁녀를 둔다. 『삼국사기』에 의자왕이 자신의 서자 41명을 좌평에 봉한 내용이 나온다. 후궁과 궁녀소생의 서자(庶子)만 41명이니 정실왕후 소생의 적자(嫡子)와 공주까지 합하면 얼추 100명 정도의 자식을 둔 셈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의자왕의 궁녀는 최소 수십 명은 될 것이다. 『주서』에 따르면 당시 사비도성의 인구는 남녀노소 전체 5만명이다. 인구비율을 고려하더라도 삼천궁녀는 절대 무리이다.
향락과 타락의 화신으로 매도
그렇다면 의자왕에게 삼천궁녀 딱지는 어떻게 해서 붙여졌을까? 삼천궁녀는 조선 중기 유학자들에 의해 하나둘 언급되기 시작한다. 유교적 관점에서 볼 때 삼천궁녀를 거느린 의자왕은 향락과 타락의 화신이며 백제 멸망을 가져온 추악한 죄인이다. 이후 일제강점기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각색되고 역사소설과 대중가요 등을 통해 윤색되며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 굳어졌다.
의자왕은 나당연합군이 사비도성을 압박해오자 왕실가족과 일부 측근만을 데리고 탈출했다가 웅진성(공주)에서 항복한다. 이날이 백제가 공식적으로 멸망한 서기 660년 7월 16일이다. 700년 백제 역사가 문을 닫는 날이다.
이후 의자왕은 당의 수도 장안(시안)으로 끌려가나 4개월 만에 사망한다. 망국군주로서의 압박감을 이겨내지 못한 탓이다. 당고종은 의자왕을 ‘금자광록대부위위경’에 추봉하고 낙양의 북망산에 장사지낸다.
1995년 의자왕 묘 찾기에 나선 충남 부여는 1996년 중국 낙양과 문화교류사업 결연을 맺고 본격적으로 의자왕의 묘를 찾아 나섰으나 결실을 맺지 못한다. 대신 2000년 중국의 협조를 얻어 주변의 흙 일부를 가져와 부여 능산리 고분군에 가묘를 만들고 비석을 세운다.
삼천궁녀 딱지는 의자왕이 스스로 만든 업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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