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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혁재의 지구촌 IN & OUT

미련한 사람이 그립습니다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21-09-14 09:16:08

 
▲이혁재 언론인·전 조선일보 기자
/정상적인 토론은 사라지고
/말장난 솜씨만 뽐내는 세상
/칼날같이 예리한 언변보다
/맹하게 현명한 사람 그리워
 
좌우대립이 극심했다던 해방 직후. 그 땐 안 살아봐서 잘 모르겠지만, 요즘 벌어지고 있는 대립도 그때만큼 심한 편이 아닌가 싶다. 왼쪽 오른쪽으로 나라가 갈라져 죽어라 싸우는 요즘 같은 때는 두 가지 방법 밖에 없지 않나 싶다.
 
첫째 총기 소유를 자유화하는 것이다. 어차피 말로는 해결 안 된다. 둘째 이번 기회에 나라를 둘로 나눠, 생각 맞는 사람끼리 모여 사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안 하는 걸 보면 둘 다 현실적이지 못한 모양이다. 그래서 연일 TV에선 토론이란 이름의 진영갈등이 벌어진다.
 
하지만 TV에서 하는 것은 말로만 토론이다. 정상적인 토론은 상대편 얘기가 맞는 것 같으면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건 지면 죽는다고 생각하는지 판세가 뒤집힐 때까지 사생결단, 죽어라 말싸움 한다. 그러니 항상 발언시간이 부족하다.
 
요즘 토론에 나오는 사람 중에 변호사들이 많은 것도 말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가 아닌가 한다. 그러니 아무리 TV를 봐도 어떤 주제에 대한 지식이 깊어지질 않는다. ‘누가 누가 말 잘하나’ 프로를 보는 것이니 당연하다.
 
고대 그리스를 닮아가는 대한민국
 
이런 현상을 보면서 우리나라가 기원전 5세기로 거슬러 올라간 것 아닌가, 혹시 위치는 극동에서 그리스로 옮겨간 것 아닌가 착각하게 된다. 그 때 그리스에서는 설득을 목적으로 하는 논변술을 강조했고, 진리와 정의는 상대적인 것으로 취급하던 ‘소피스트’들이 있었다.
 
최초의 소피스트라 불리는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했는데 “사람이 먼저”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 걸 보면 우리와 그리스는 멀지 않은 것 같다.
재미있는 건 이렇게 좌우갈등과 말싸움이 극심한 우리나라에서 언론개혁법 인가 뭔가로 말싸움을 못하게 막으려 한다는 점이다. 
 
그걸 보면서 얼마 전 접한 영국신문 얘기가 생각났다. 그 영국신문이 우리 언론개혁법이 추구하듯 모범적이거나 교훈적인 신문이어서는 아니다. 그 신문은 편안하게 독자들 의견을 반영해주고, 그냥 알고 싶어 하는 기사를 실어주는, 그러면서 욕도 많이 먹고 있는 그저 평범한 신문이다. 그래도 그 신문 얘기 읽다 보니 마음 편해졌고, 그래서 그저 그런 신문 하나쯤 세상에 존재하는 것도 나쁜 건 아니겠구나 생각 들었다. 별 의미 없이 그냥 소개한다. 지금 영국에서, 아니 세계에서 제일 잘 팔리는 신문 ‘데일리 메일(Daily Mail)’ 얘기다.
 
세속적이고 마음 편한 데일리 메일
 
이 신문은 아일랜드의 가난한 변호사 아들 알프레드 햄스워드가 창간했다. 그는 ‘이 세상의 온갖 화제에 대한 독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란 긴 이름의 잡지를 발행한 뒤 그 잡지 독자를 이어받는 형태로, 아직 참정권도 없던 중산계급을 타깃 삼아 1896년 이 신문을 창간했다.
 
타블로이드판 신문 데일리 메일은 영국뿐 아니라 미국 독자의 마음도 끌고 있다. 이 신문의 인터넷판인 ‘메일 온라인’ 월간 방문자수는 5000만명(비중복)으로 뉴욕타임스를 제치고 세계 최다다. 더불어 가장 미움 받고 조롱의 대상이 되는 신문이기도 하다. 코미디언이 공연 중 “데일리 메일에 따르면”이라고 신문 이름을 대는 순간 폭소가 터진다고 한다. 이름만 대도 말이다.
 
이 신문을 영국의 양심이라 부르기도 힘들다. 다만 ‘어느 정도’ 중산층 잉글랜드인의 의견을 대변해주고는 있다. 소수파에 차별적이란 비난까지 듣고 있는 이 신문의 도대체 어떤 면이 독자를 빨아들이고 있는 것일까. 아니, 데일리 메일을 읽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
 
해리포터 이모부 같은 신문
 
창간 125년의 데일리 메일은 중산층 잉글랜드 사람을 응축한 것 같은 신문이라고 한다. 중산층 잉글랜드인은 영화 해리포터에서 이모부로 나오는 뚱뚱한 더즐리, 신경질적인 이모 페튜니아를 연상하면 된다.
 
가장 많은 독자가 있지만 최고 신문은 아니다. 하지만 영국인의 가장 많은 공통점을 대변한다고 한다. 그 공통점이란 문화적으로 엄청 보수적이지만, 타인의 성생활이나 지저분한 얘기, 누군가의 실패담 읽는 것을 매우 즐겨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신문은 누군가 섹스 스캔들을 일으키면 흥미와 혐오감을 한껏 즐길 수 있도록 충분히 내용을 소개하고, 거기에 꼭 필요한 정보까지 반드시 첨가한다. 예를 들어 하원의원이 불륜 스캔들에 휘말렸다면, 불륜이 일어났던 ‘60만 파운드짜리 저택’이란 식으로 부동산 정보를 빠뜨리지 않는다.
 
표현도 엄청 신파조다. 좌파를 공격할 때 붙인 제목이 ‘왜, 도대체 우리는 왜 좌파의…’ 같은 식이다. 신문인지 셰익스피어 희곡인지 헷갈린다.
 
자유롭게 말하는 것, 정확하게 말하는 것
 
영국인의 또 다른 공통점은 궁금한 게 많다는 거다. 그래서 데일리 메일은 다양한 화제를 다룬다. 수년간 고쳐지지 않은 포장도로, 자신을 개라고 생각하는 오리, 히틀러와 똑 닮은 고양이, 그리고 암에 이르기까지 건강에서 도덕적인 삶 등 다루지 않는 주제가 없다. 여성의 육체를 데일리 메일만큼 자세히 다루는 신문도 없다. 그게 최대 부수의 비결 중 하나라고 자평한다.
 
진보진영에서 볼 때 데일리 메일은 존재 자체가 공포다. 이 신문이 정부의 주택 정책을 공격하면, 그 여파는 돌고 돌아 주택부족 문제를 일으키는 난민, 인구증가를 초래하는 이민 문제를 공격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들 문제에 동정적인 좌파에 타격을 주는 것이다. 반면 공평과 양식에 대해 강한 자의식을 갖고 있어, 흑인 청년 스티븐 로렌스가 살해당했을 때는 유족을 후원하자는 캠페인도 벌였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자유롭게 말하는 게 정확하게 말하는 것과 동등하게 중요하다고 보는 사람이 있다. 모범적이지 못하고 허점 많은 사람도 사회 구성원이다. 아니 그게 사랑스러운 우리 가족과 친구일 수도 있다. 똑똑한 사람들이 죽여야 할 원수는 아니다.
 
신문인 주제에 가르치려 들면 안 된다
 
데일리 메일은 1·2차 세계대전과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부침을 거듭했다. 하지만 오늘날 확고한 자리를 구축할 수 있었던 비결은 다름 아닌 ‘독자를 이해하려는’ 자세에 있다. 주권은 독자에게 있으며, 별 볼일 없는 신문 주제에 독자에게 가르치려 들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 신문이 독자들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라이벌 신문들은 보지만 사실은 독자들의 욕망과 불안이 이 신문에 반영돼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 신문만큼 대중을 잘 아는 신문은 없다는 말이 나온다.
 
데일리 메일처럼 문제는 있어 보여도 상식이 어느 정도는 좀 통하는 사회에 살고 싶다. 한 핏줄로 태어난 백의민족이란 게 무색할 정도로 너무 칼끝같이 대립하고 사는 요즘엔, 한편으로 세속적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솔직하게 미련한 사람들이 그립다.
 

 [스카이데일리 / skyedaily__ , skyedaily@sky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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