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려스럽다’는 정부가 더 우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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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 Talk]-반도체 산업 위기

오창영 기자페이지 + 입력 2021-10-20 00:02:30

우리나라의 수출 효자로 꼽히는 국내 반도체 산업이 자칫 경쟁력을 잃을지 모른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지난달 미국이 글로벌 반도체 업체와의 화상 회의에서 45일 이내에 반도체 재고와 주문, 판매 등 공급망 정보를 제출하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바이든 행정부가 요구한 정보 제출 기한은 다음달 8일까지다. 제출 기한까지 한달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업체들은 정보 제출 여부를 놓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미국의 요구를 마냥 들어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시할 경우엔 미국의 눈 밖에 나 뒤탈이 우려되는 상황이어서다.

이런 와중에 미국이 주요 반도체 업체에 정보 제공을 요청한 것과 관련해 자율적으로 제출하라는 전제를 달았다는 해명을 내놨다.

현지시간으로 13일 이수혁 주미대사는 미국 워싱턴DC 주미대사관에서 열린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미국은 글로벌 반도체 업체에 대한 정보 제공 요구에 대해 자율 제출이라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대사는 “미국은 글로벌 경영에 굉장한 관심을 가지고 미국 내 공급망 확보를 위해 각국 기업을 컨트롤하거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 왔다”며 “자율이라는 전제를 달았으나 반도체 업체들에게 있어 민감할 수밖에 없는 정보를 제출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제아무리 미국이 자율 제출이라는 점을 강조하더라도 정보 제공은 주요 반도체 업체에게 큰 압박이 된다. 반도체 영업 기밀을 미 정부에 제출한다는 것은 사실상 동종 업계 내 경쟁 업체에도 고스란히 공개하는 것과 진배없다.

이에 전 세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1위 업체인 TSMC는 미국의 정보 제공 요구에 반대 입장을 내놨다. 이달 6일 TSMC의 법무 담당 책임자인 실비아 팡은 “미국 정부의 공급망 정보 요구는 민감한 정보, 특히 고객 정보를 넘기라는 것이다”며 “이를 받아들일 수 없고 향후 대응 방안을 평가하고 있다”고 밝혔다.

TSMC가 미국의 요구에 반하는 입장을 발표한 데에는 대만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가 힘이 됐다. 쿵밍신 대만 국가발전협의회(NDC) 장관은 “TSMC는 고객의 기밀 데이터를 공개하지 않을 것이다”며 “고객과 주주의 권리를 위태롭게 하는 관행에는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우리 정부의 대응은 대만 정부와 큰 대조를 이룬다. 국내 반도체 업체의 든든한 아군이 돼야 할 산업통상자원부(산업부)는 미국의 정보 제공 요구에 대해 “통상적인 상식으로는 이례적인 조치라고 생각한다”면서도 향후 대응 방향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 등 매우 미온적으로 대처하고 있다.

오죽하면 이달 5일 국회에서 열린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시대전환 조정훈 의원은 문승욱 산업부 장관을 상대로 “대한민국 산업부가 왜 미국 편을 들고 있냐”고 질타했다.

이에 문 장관은 “반드시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이 최선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미국 정부에 우리의 우려 사항을 전달했고 계속 협의할 예정이다”고 해명했다.

15일 관세청에 따르면 지난달 수출액은 지난해 같은달 대비 16.7% 증가한 558억달러(약 65조9668억원)로 집계됐다. 이는 역대 월 수출액 중 최고 기록이다.

수출이 호조를 띠게 된 데에는 반도체의 역할이 가장 컸다. 지난달 반도체 수출액은 5개월 연속 100억달러를 상회한 것으로 나타났다. 반도체 수출은 15개월 연속으로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6개월 연속 20% 이상 성장하는 기록을 달성했다.

이렇듯 반도체가 국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한데도 정부는 미국의 정보 제공 요구에 대단히 소극적으로 대처하고 있다. 국내 반도체 업체들을 지키기 위한 단호하고 책임 있는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미국에 기밀을 통째로 내준다면 전 세계 반도체 시장을 선도하고 있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업체들의 경쟁력은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밖에 없다. 정부는 미 정부와 긴밀한 협의를 통해 국내 반도체 업체들의 불안을 해소해줘야 한다. ‘우려스럽다’는 입장만 전달하는 정부가 매우 우려스러운 지금이다.

오창영 cyoh@skyedaily.com 기자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