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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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사 주홍아당(朱紅兒堂)이 천기를 살펴 폭풍우를 예견한 것이었다.
고중이 나서서 도사를 거들었다.
“도원수께서 말씀하시길 우리가 굳이 손을 대지 않아도 수군은 자멸할 거라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내 무엇을 걱정하겠소.”
건무는 걱정을 덜고 수군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얼마 후 2백여 척의 수군 전선이 비사성 앞바다에 나타났다. 동래 총관 왕탁이 이끄는 전단은 방어에 나선 고구려 함선에 접근해 화살 공격을 퍼부었다. 고구려군도 밀리지 않고 불화살로 맞대응했다. 미끼 역할이었던 동래 해군은 적당히 싸우다가 못 견디는 척하며 먼바다로 물러났다.
해가 서산으로 넘어갈 무렵, 주라후의 선단은 패수구가 보이는 바다에 당도했다. 뱃머리에 선 주라후는 들뜬 얼굴로 눈앞에 펼쳐진 육지를 바라봤다. 평양성을 함락시키고 영양왕을 발아래 꿇릴 생각을 하니 절로 입가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고구려인들은 닥쳐올 재난을 모르는 채 방심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패수를 따라 올라가면 내일 점심쯤에는 말로만 듣던 고구려 평양성의 화려한 성곽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을 것이었다.
주라후는 의기양양하게 부총관을 돌아봤다.
“어떻소? 하늘조차 우리 편이지 않소. 콧대 높은 고구려 왕이 고개 숙일 날도 얼마 남지 않았구려.”
부총관 장익은 할 말이 없었다. 어쨌든 험한 바다를 무사히 건너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는 불안감이 남아 있었다. 패수구 앞바다는 이상하리만치 잔잔했다. 마치 폭풍 전야의 고요함 같았다. 알 수 없는 조바심으로 그의 입술이 바싹 타들어 갔다.
장익은 주라후에게 후퇴하자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군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린다는 질책을 받을 게 뻔했기에 입을 다물었다.
주라후는 고개를 돌려 뒤를 따르는 선박들을 응시했다. 1000여 척에 달하는 선박이 산이라도 집어삼킬 기세로 물살을 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마음이 든든해진 총관은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그때였다. 갑자기 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전함의 돛이 찢어질 정도로 부풀어 올랐다. 먹장구름이 순식간에 하늘을 뒤덮었다. 사방이 컴컴해지더니 천둥이 진군을 알리는 북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번개가 당장에라도 배를 쪼갤 듯이 번쩍였다.
잔잔하던 바다는 어느새 안면을 바꾸고 미친 듯이 날뛰었다. 함선은 방향을 조정하는 키와 상관없이 강풍에 이리저리 떠밀렸다. 파도가 점차 몸집을 불리더니 나뭇잎처럼 떠다니는 수군의 전함을 뒤덮었다. 태산 같은 파도에서 간신히 벗어난 배들도 몰아치는 비바람 속에서 돛대가 꺾이고 고물이 부서져 침몰했다.
폭풍우는 죽음을 부르는 망나니처럼 춤을 추며 밤새도록 몰아쳤다. 무시무시한 바람 소리가 군사들의 절규를 집어삼켰다. 집채만 한 파도는 혀를 날름거리며 무언의 살육극을 벌였다. 부서진 배의 파편과 물에 빠진 군사가 서로 뒤엉켜 물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이튿날 아침, 요행히 파도에 떠밀려 상륙한 수나라 군사들은 해안을 지키고 있던 고구려 군사들의 사냥감이 됐다. 갯벌은 졸지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수군의 시체가 패수구의 해안을 까맣게 뒤덮었다.
행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성문을 걸어 잠근 개모성에서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왕세적의 수군이 요택을 지나 개모성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강이식은 개모성주를 비롯한 장수들을 불러모았다. 그들 중에는 유성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돌아온 재증협무도 끼어 있었다.
강이식이 재증협무를 쳐다보며 말했다.
“치욕을 씻을 기회를 주겠다. 군사 1만을 내줄 테니 낙수 계곡으로 가서 매복하라. 내가 왕세적을 그곳으로 유인하겠다.”
재증협무는 도원수의 배려에 고개를 숙였다. 부장으로서 수장을 지키지 못하고 혼자만 살아 돌아왔다는 자책감이 그를 괴롭혔다. 칼을 뽑아 자진(自盡)하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비참하게 떠난 연자유의 복수를 해야 했기 때문에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었다. 그런 그에게 도원수가 기회를 준 것이었다.
도원수 강이식은 뒤이어 개모성주 손자연에게 명했다.
“손 장군께서는 적을 맞아 싸우다가 적당한 때에 패한 척, 북문으로 달아나시오. 그리고 북림(北林)에 숨어서 기다리다가 수군이 나타나면 그들의 퇴로를 막으시오.”
모든 장수에게 작전을 일러 준 강이식은 출전 준비를 위해 처소로 돌아갔다.
왕세적의 군대가 성 앞에 다다랐다. 강이식은 성벽 위에 올라 그들의 형세를 살폈다. 과연 명장(名將)이 이끄는 군대답게 기치가 정연하고 사기가 높아 보였다.
성안에서는 기병들이 언제든 뛰어나갈 수 있게 준비하고 있었다. 강이식은 계단을 따라 내려가 대기하고 있는 말 위에 올랐다. 기마병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뒤를 따랐다.
드디어 성문이 열리더니 고구려 군사들이 달려 나와 대형을 갖췄다. 이를 바라보던 왕세적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험한 산 위에 자리한 개모성은 요동성이나 신성보다 규모가 작았다. 그래서 성안의 고구려군이 이처럼 적극 대항해 오리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다. 자고로 상대와 전력 차가 많이 날 때에는 수성(守城)이 병법의 기본이었다.
왕세적이 평범한 장수였다면 적장의 어리석고 무모한 선택을 비웃었으리라. 하지만 그는 이미 고구려 장수들의 뛰어난 지략을 간파하고 있었기에 무슨 속셈이 있으리라 의심하고 함부로 치고 들어가지 않았다.
왕세적은 고구려군 진영을 유심히 살폈다. 선두에 선 부대는 고구려의 전통적인 철기병이었다. 갑옷의 철린(鐵鱗)이 햇빛을 받아 차갑게 반짝였다. 아무도 안중에 없다는 듯 대형을 유지한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가끔 말이 발굽으로 땅을 고르거나 고개를 흔들며 콧소리를 낼 뿐이었다.
수나라 군사들이 잔뜩 긴장한 채 철기병을 바라보고 있을 때 강이식의 진격 명령이 떨어졌다. 고구려군은 적진을 향해 돌격했다. 명성대로 고구려 군사의 기세는 하늘을 찌르고 바다를 뒤덮을 만했다.
왕세적의 지시에 따라 수군 좌우에서 깃발이 흔들렸다. 수군 진영이 두 대로 갈라지면서 선두에 선 경기병이 고구려군의 측면으로 달려들었다. 고구려 철기병이 이에 맞섰지만 수군 경기병은 이들을 지나쳐 후위에 자리한 고구려 보병을 쳤다. 이것이 바로 고구려군의 약점이었다. 철기병은 말까지 철갑을 두르고 있었기에 기동성이 떨어져 방향 전환이 쉽지 않았다. 날렵한 수나라의 경기병은 수적 우세를 이용해서 고구려군의 후위를 무력화시켰다.
전세는 순식간에 뒤집어졌다. 철기병의 뒤를 따르던 고구려 보병은 적군의 기세에 밀리면서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수군이 주변을 에워싸고 포위망을 좁히면서 승기(勝氣)는 수나라 쪽으로 기우는 듯 보였다.
강이식은 군사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달아났다. 이를 본 왕세적은 부장 장평에게 성을 공격하라 명한 후 휘하의 군사들을 이끌고 도망치는 고구려군을 맹추격했다.
장평의 군대가 개모성을 공격해 오자 성주 손자연은 도원수가 지시한 대로 한동안 맞서 싸우다가 못 견디는 척 성을 버리고 북문을 통해 달아났다.
한편 퇴각하는 고구려군을 쫓던 왕세적은 잔뜩 들떠 있었다. 전장에서 호적수를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상대와 맞붙어 완벽하게 무릎 꿇리는 일은 무엇에도 비할 수 없을 만큼 신나는 일이었다. 왕세적은 강이식을 인정하는 만큼 한시라도 빨리 굴복시키고 싶었다.
한참을 쫓다 보니 울창한 숲이 나타났다. 고구려 군사들은 숲속으로 뛰어들어가 모습을 감추었다. 그제야 왕세적은 자신이 어느새 산속을 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나무가 우거진 숲길이 점점 좁아지더니 계곡으로 변했다. 어찌나 좁은지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왕세적은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주변 지리에 익숙한 군사를 불러 지명을 물어보니 낙수 계곡이라 했다. 낙수(落隋)라 하면 수나라가 떨어진다는 의미가 아닌가.
왕세적은 가슴이 철렁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흥건하게 배었다. 그는 말을 세우고 주변을 살피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고구려 군사들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마치 봄날의 안개처럼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왕세적은 위기감을 느끼고 군사를 돌리려 했다. 이때 계곡에서 첨벙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무언가에 홀린 듯 빽빽이 솟아 있는 나무들을 헤치고 소리 나는 쪽으로 걸어갔다. 호위 무사가 그 뒤를 따랐다.
울창한 숲을 빠져나왔을 때 왕세적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놀라서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곳에는 아름답고 웅장한 계곡이 풍광을 뽐내고 있었다. 계곡의 상류는 바위가 급경사를 이루며 쌓여 있어 흡사 계단을 연상시켰다. 바위 아래로 급전직하(急轉直下)하는 물줄기는 작은 폭포를 방불케 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가 하류 쪽에서 들려왔다. 바위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본 왕세적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고구려 군사들이 한가롭게 천렵을 즐기고 있는 게 아닌가. 갑옷을 벗어 던지고 소매를 걷어붙인 채 물에서 뛰어다니는 군사들의 모습은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같았다. 어느새 창은 고기 잡는 작살이 되고, 칼은 잡은 물고기를 다듬는 식도(食刀)로 쓰이고 있었다.
한동안 어안이 벙벙했던 왕세적은 정신을 가다듬고 주위를 찬찬히 살폈다. 한 장수가 계곡 너럭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그는 군사들의 노는 모습을 쳐다보며 술병으로 나발을 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위엄이 느껴지는 걸로 보아 강이식이 분명했다. 그의 옆에서는 군사 하나가 솥을 걸고 불을 지펴 어탕을 끓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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