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열의 스파이 세계] <5> 영국 비밀정보부 MI6를 경악케 한 ‘조지 블레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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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열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2-06 06:31:00

1966년 10월22일 오후 9시 영국 대다수 TV·라디오 방송에서는 긴급뉴스가 보도되었다. 1961년 체포되어 42년형을 선고받고 런던의 한 감옥에서 복역 중이던 악명 높은 스파이 조지 블레이크(George Blake)가 탈옥했기 때문이다. 외신을 접한 전 세계가 경악할 뉴스였다.

조지 블레이크(1922~2020)는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터키 태생의 유대인인 아버지와 네덜란드 출신의 개신교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936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이집트 카이로로 건너가 작은아버지 큐리엘(이집트 공산당 창시자) 밑에서 학생 시절을 보냈다. 이때 공산주의 사상을 처음 접했다.

그는 1939년 네덜란드로 돌아왔는데 1940년 독일군이 네덜란드를 점령하자 유대인임이 밝혀져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탈출하여 레지스탕스(저항운동)에서 활동하다가 1943년 영국으로 건너갔다. 영국 해군으로 입대하여 소형 잠수함 운용 훈련을 받고 영어·프랑스어·독일어 등을 구사하는 언어 역량을 인정받아 장교 훈련을 받은 후 연합군사령부에서 근무하였다. 제대 후 러시아어까지 공부하여 영국 MI6(비밀정보부)에 채용되었다. 1948년 외교관 신분으로 위장하여 한국 주재 영국 대사관의 부영사로 발령을 받았다. MI6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그는 중국 동북 지역과 한국 공산주의 관련 첩보활동을 해 왔다.

당시 블레이크는 서방 정보기관으로는 최초로 한국에서의 전쟁 발발 가능성을 본부에 보고했으나 묵살당했다. 1950년 북한군에 의해 서울이 점령되자 그는 영국 대사관 직원들과 함께 억류되어 3년간을 수용소에서 보냈다. 이때 소련에서 파견된 KGB 심리공작관과의 면담에서 포섭되어 KGB 비밀요원으로 자원했다. 1953년 석방 후 영국으로 돌아가 MI6에 복귀하였다. 이때 MI6 비서이자 동료였던 질리언 앨런과 결혼했으나 1961년 체포된 이후 이혼했다.

블레이크는 1955년 MI6 베를린 지구에 파견돼 동독 내의 첩보조직 관리를 담당하게 되었는데 1959년 영국으로 복귀할 때까지 4년간 엄청난 양의 기밀을 KGB로 빼돌렸다.

대표적 사례로 그는 MI6과 CIA가 합동작전을 벌였던 베를린 터널 설계도를 KGB에 전달했다. 또한 골드 작전(Operation Gold)으로 불리는 소련과 동독의 통신도청 작전의 기록도 빠짐없이 전해 주었다. 특히 동유럽에서 활동하는 영국 첩보요원(42명)의 명단을 전달해 요원 대부분이 암살되거나 체포당했다. 여기에는 MI6가 어렵게 구축한 고위급 첩보망인 동독의 안보국 국장도 포함되었다. 블레이크의 반역 활동으로 어렵게 구축한 유럽 내 영국 스파이망이 일격에 궤멸된 것이다. 또한 400명에 달하는 MI6 요원에 대한 정보도 넘겨주었다. 이 밖에 유럽 국가들의 대(對)소련 군사 편성에 관한 정보와 베를린 지하철역 전화 도청 장치의 존재 등 MI6가 수집한 정보들이 통째로 소련으로 넘어갔다. 소련 KGB는 블레이크 덕분에 영국뿐만 아니라 미국 및 서방 정보기관들의 대 소련 관련 핵심 비밀들을 입수하여 대처할 수 있었다.

1960년 레바논 베이루트에 파견 나가 활동 중 1961년 본국에 소환되어 체포되면서 블레이크의 스파이 활동은 막을 내렸다. 그의 스파이 행각은 미국 CIA가 구축한 스파이 암호명 ‘스나이퍼’(미하일 골레니옙스키·폴란드 정보부 부부장)의 지속적 제보로 발각되었다. 스나이퍼는 폴란드 정부의 방첩책임자로 KGB의 신뢰받는 첩보망이었는데, CIA에 의해 포섭된 고위 첩보망이었다. 스나이퍼는 CIA에 소련을 위해 활동하는 스파이가 있는데 그를 통해 소련은 MI6의 모든 비밀문서를 입수했고 폴란드에서 활동하는 영국 스파이 명단을 가지고 있다고 제보했다. CIA는 이 사실을 즉각 MI6에 통보했으나 MI6는 이를 믿지 않고 묵살하다가 거듭된 제보를 받고서야 수사에 들어가 블레이크를 특정하게 된다. 1961년 3월 블레이크는 체포되었다.

그는 왜 소련 스파이가 되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1990년에 출간된 자서전 ‘다른 선택은 없다’(러시아판 ‘Другого выбора нет’·영국판 ‘No Other Choice’)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서울에서 억류되었을 때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고 공산주의에 빠졌으며 미국의 잔인한 민간인 폭격 등을 보고 마르크스주의로 기울게 되었다며 소련을 위한 스파이 활동이 신념에 의한 것임을 분명히 했다.

1966년 영국을 탈출하여 프랑스·서독·동독을 경유하여 소련에 도착한 블레이크는 레닌 훈장과 붉은기 훈장을 받았으며 국가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블레이크는 소련에서 재혼했다. 이후 KGB 대령으로 은퇴 후 1974년부터 소련과학아카데미 국립경제 및 국제관계연구소(IMEMO)에서 근무했다. 2007년 85세 생일에는 푸틴 대통령으로부터 러시아 평화에 기여했다는 공으로 ‘우호 훈장’을 받기도 했다.

블레이크는 2020년 12월26일 98세의 나이로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세계 첩보사에서 오랜 역사와 막강한 첩보력을 자랑하던 MI6는 블레이크 사건으로 세계 첩보사에 기록을 남길 만한 치욕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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