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릉 
광주 
제주 
목포 
)
온사문은 항구를 장악하고 난 후 석광도성주(石鑛島城主)가 이끄는 함대를 향해 붉은 깃발을 올렸다. 신호에 따라 석광도성주는 선단을 이끌고 군사들과 함께 상륙했다. 그들은 땅에 발을 디디자마자 전속력으로 조선소를 향해 달렸다. 가는 도중에 삼삼오오 떼를 지어 도망치는 당군의 모습이 보였지만 거들떠보지도 않고 더욱 속도를 높였다.
고구려 군사들은 조선소 곳곳에 불을 놓았다. 불길은 목조 건물과 건조 중이던 배들을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마치 산불이라도 난 듯이 불길이 하늘을 찔러 주변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온사문은 조선소가 불타는 것을 본 후에야 뭍으로 올랐다. 그는 먼저 양곡창과 병기창을 둘러보고 전소된 것을 확인했다.
고구려 군사들은 내친김에 산동 지방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리자고 외쳐댔다. 온사문은 난감했다. 그가 대막리지에게서 받은 명령은 등주를 불태우는 것까지였다.
한참 분위기가 어수선한 가운데 걸회수가 수백 마리의 말을 끌고 나타났다.
“근처 목장에서 데려온 말들입니다. 이놈들을 타고 당나라 땅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게 어떻겠습니까?”
걸회수는 당장 당의 도읍인 장안까지 달려갈 기세였다.
석광도 성주까지 거들었다.
“당군의 주력은 전부 요동에 나가 있기 때문에 이 일대는 무주공산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병력만으로도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석조가 반대하고 나섰다.
“안 될 말이오. 내주(萊州)에는 여전히 당군의 정예가 포진하고 있소. 우리가 기습 작전으로 등주를 초토화하기는 했지만 제대로 붙는다면 그들을 감당할 수 있겠소?”
걸회수가 반박하고 나섰다.
“내주의 당군이 정예라고는 하지만 대부분 원정군에 차출되었기 때문에 그 수가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상부에서 명령이 내려오기 전까지는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겁니다. 우리에게는 저들을 제압할 충분한 시간이 있습니다.”
온사문이 곰곰이 생각해 보니 걸회수의 말이 그럴듯했다.
걸회수는 대장군의 마음이 자신 쪽으로 기우는 듯하자 고삐를 더욱 당겼다.
“그동안 당군 때문에 고통을 받았던 백성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 우리가 그들의 복수를 해 줘야 합니다.”
백성까지 들먹이자 온사문은 마침내 결심을 굳혔다.
“장군들은 각기 휘하 군사를 이끌고 산동 곳곳을 불태워라. 단, 늦어도 모레 정오까지는 돌아와야 한다. 나는 이곳에 남아 주변을 수습하겠다.”
온사문의 승낙이 떨어지자 모든 군사가 환호성을 질렀다. 고구려 군사들은 각 장수의 인솔하에 인근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고구려군의 무시무시한 기세에 겁을 먹은 당나라 사람들은 싸움을 포기하고 무조건 항복했다.
그로부터 사흘간 산동 지방을 누비며 고구려의 위용을 드높인 군사들은 많은 전리품을 가지고 등주로 돌아왔다. 온사문은 이들을 배에 태우고 묘도 군도로 향했다.
묘도 군도에 도착한 고구려군은 당군의 양곡창을 습격했다. 다량의 양곡을 얻은 그들은 휘파람을 불며 석성도로 가는 뱃길에 올랐다.
한편, 연개소문은 군사 도수금·아우 연정토와 함께 오골성을 떠나 천산산맥을 넘었다. 그들은 고정의의 부대가 진을 친 곳으로 나아갔다.
고정의를 만난 연개소문은 전공을 치하했다.
“대로의 뛰어난 용병술 덕분에 당군을 요동에 묶어둘 수 있었습니다.”
대막리지는 노장을 예우해 늘 깍듯하게 대했다.
고정의는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이 모두가 대막리지 합하의 뛰어난 전략 덕분입니다.”
대막리지가 물었다.
“당나라의 동향은 어떻습니까?”
“당군이 여러 번 안시성을 공격했으나 성주가 잘 막아 내고 있습니다.”
얼마 전부터 당군이 성을 공략하기 위한 토산을 쌓고 있지만 안시성 군사들의 방해로 당 태종이 매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얘기를 덧붙였다.
“유격 전술로 당군을 괴롭히는 일은 계속하고 있겠죠?”
“물론입니다. 별동대를 새롭게 편성해 요동성에서 안시성에 이르는 길 곳곳에서 기습 작전을 펼치고 있습니다. 당의 본대를 들이칠 시기가 무르익은 것 같습니다.”
연개소문도 동의했다.
“그렇습니다. 온사문 장군이 등주의 보급창을 초토화시키겠다고 했으니 앞으로 해로를 통한 보급은 불가능할 겁니다. 지금부터는 당주 이세민이 이끄는 본진을 압박해야 합니다. 그들은 독 안에 든 쥐나 다름없습니다.”
고정의는 미소를 지으며 대막리지에게 물었다.
“일전에 철륵족의 나라인 설연타(薛延陀)에 오죽루를 사신으로 보내지 않으셨습니까? 혹시 무슨 소식이라도 있습니까?”
설연타는 요서 서북쪽 초원 지대에서 유목 생활을 하는 부족 중 하나였다. 일전에는 당과 합세해 동돌궐을 무너뜨리기도 했다. 그런데 당이 다시 동돌궐과 손을 잡으면서 그들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다.
설연타의 수장 진주 가한이 죽자 적자인 발작(拔灼)이 왕위를 계승했는데, 이가 바로 다미(多彌) 가한이었다. 그는 용맹함에서 천하의 누구도 따를 자가 없었다. 게다가 휘하의 기병이 20만에 이를 정도로 군세가 자못 막강했다.
설연타의 힘을 인정한 연개소문은 당나라를 고립시키기 위한 외교적 포위 전략의 하나로 그들과 공수 동맹을 맺기로 했다.
대막리지는 흡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처음에는 주저했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는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했답니다. 그러니 머지않아 그들이 당나라를 공격할 겁니다. 이미 각궁 5만 자루와 교관 50명을 설연타에 보냈습니다. 조만간 그들이 만리장성을 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겁니다.”
고정의는 크게 기뻤다. 만일 설연타가 당군의 후방을 친다면 아무리 고집 센 당 태종이라도 군사를 거둘 수밖에 없었다.
이날 연개소문과 고정의는 밤늦도록 앞으로의 일을 의논했다.
며칠 후, 건안성에서 장량의 군대를 격파했다는 낭보가 날아왔다. 대막리지는 도수금과 함께 고정의의 막사를 찾아갔다. 이때는 고정의도 이미 건안성에서 승리한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다.
도수금이 화색이 도는 얼굴로 말을 꺼냈다.
“건안성에서 장량 부대를 대파했다니 축하할 일입니다.”
고정의도 기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건안성주 기동부는 참으로 뛰어난 장수입니다. 장량이라면 이세민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자인데, 그처럼 혼쭐을 내 줬으니 참으로 통쾌합니다.”
도수금은 한 발짝 더 나아갔다.
“건안성으로 지원군을 보내야 합니다. 승세를 타고 몰아붙이면 당군을 요하 서편으로 밀어낼 수 있을 겁니다.”
고정의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머리를 돌렸다.
“당주에게도 건안성의 소식이 전해졌을 겁니다. 이세민은 과연 어떻게 나올까요?”
잠자코 듣고만 있던 연개소문이 입을 뗐다.
“아마도 지원군을 보내지 않겠습니까. 장량이 요하에 배수진을 쳤다고 하니 어디서든 도와주러 오길 바랄 겁니다.”
여기서 말을 끊고 도수금을 바라보며 물었다.
“온사문 장군에게서 아직 소식이 없소?”
“아마 오늘이나 내일 중으로 소식이 올 겁니다. 틀림없이 임무를 완수했을 겁니다.”
때마침 온사문이 보낸 전령이 당도했다. 그동안 비사성과 등주에서 있었던 성공적인 임무 수행을 보고하면서 비사성주의 아들 걸회수의 전공을 소상히 전했다. 주위에 서 있던 장수들은 승전보에 환호성을 질렀다.
대막리지는 좌우에 모인 장수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지금 당장 지원군을 보내 장량의 부대를 치겠소. 장량의 군대를 요하 밖으로 몰아내면 당주 이세민의 본대는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질 것이오. 그다음에는 본격적으로 당의 주력군과 싸워 요동성을 탈환하겠소.”
고정의가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다.
“누구를 보내실 겁니까?”
“이번에는 전황도 살필 겸 내가 직접 출전하겠소.”
연개소문은 군사 3만을 이끌고 건안성으로 내려갔다.
한편 안시성 인근에 진을 치고 있던 당 태종은 연이어 날아온 패전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
한동안 침묵하고 있던 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큰일이구나. 비사성에 정박하고 있던 양곡선이 불타 버렸다면 보급에 치명적인 타격이다. 그런데다가 장량은 건안성을 함락시키기는커녕 대패하고 물러나 요하 하구에 배수진을 쳤다는구나.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누구 하나 감히 말을 꺼내는 자가 없었다.
태종은 잔뜩 못마땅한 눈초리로 주위를 살피다가 내뱉듯 말했다.
“당장 지원군을 보내 장량을 돕도록 하라.”
장손무기가 조심스럽게 아뢰었다.
“지금 고구려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근자에 이르러 요동성에서 안시성에 이르는 길목마다 고구려군이 날뛰고 있습니다. 유격 전술로 우리의 숨통을 조이려는 듯합니다.”
이세적도 장손무기에 동조했다.
“우리가 안시성에 집중하고 있는 틈을 타서 고정의가 우리의 수족을 자르려 하는 겁니다. 이미 임유관에서 요하에 이르는 길은 고구려 유격대의 출몰로 차단된 거나 다를 바 없습니다. 이 때문에 군량의 수송이 매우 어렵습니다. 게다가 해로까지 막힌다면 우리는 꼼짝없이 갇힌 신세가 될 겁니다. 며칠 전에 연개소문이 군사 도수금과 함께 오골성을 떠났다고 하니 조만간 대대적인 공격이 펼쳐지리라 예상됩니다.”
“무엇이라 했느냐? 연개소문이 이곳으로 온다고?”
태종은 연개소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말을 듣고 손에 쥐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리며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태종이 몹시 놀라자 이세적은 오히려 당황했다.
“그가 어디로 갔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태종은 심란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 회의를 일찍 끝마쳤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추천해요
좋아요
감동이에요
화나요
슬퍼요
추천해요0
좋아요0
감동이에요0
화나요0
슬퍼요0
대하역사소설 ‘우리나라 삼국지’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기사제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