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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삼국지 [338] 나당전쟁 ②
태대각간께서 엊그제 운명하셨다 합니다
임동주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5-29 06:30:20
 
 
군사들이 처참하게 도륙당하는 모습을 본 원술은 분을 참지 못하고 적진 속으로 뛰어들려 했다. 순간 담릉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혼자서 적진에 뛰어들어 봤자 헛되이 목숨을 잃을 뿐입니다.” 
구차하게 살아남느니 당나라 놈 하나라도 더 베고 죽는 길을 택하겠다.”
원술은 말의 배를 걷어찼다.
담릉은 필사적으로 말고삐를 붙들고 애걸했다.
죽는 건 쉽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패배하고 죽는다면 그 치욕을 어찌 씻을 수 있겠습니까. 목숨을 보전하여 훗날을 도모함만 못 합니다.”
담릉이 간곡히 만류하자 원술은 흥분을 가라앉혔다. 죽는 건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역사에 패배자로 기록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내 이대로 돌아간다면 아버지의 얼굴을 어찌 볼 수 있겠나.”
큰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순간의 굴욕쯤은 참을 줄 알아야 합니다.”
담릉의 충언에 원술의 마음이 움직였다. 그는 입술을 깨물고 힘겹게 말머리를 돌렸다.
 
석문에서의 패배는 신라 조정에 큰 충격을 던져 줬다. 정예군을 투입하고도 당군에게 대패했다는 것은 신라군의 전략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뜻이었다.
문무왕은 대책을 의논하기 위해 유신을 불렀다. 왕의 부름을 받고 입궁한 노신의 얼굴은 타다 만 나무처럼 어두웠다.
석문의 패배는 실로 뼈아픈 일입니다. 이후로 적의 공세가 더욱 거세질 겁니다. 태대각간의 고견을 들려주십시오.”
문무왕이 공손히 답을 구하자 유신은 막힘없이 방책을 내어놓았다.
당군의 전력은 여전히 막강합니다. 정면으로 격돌하면 승산이 없습니다. 그러니 일단 수비에 치중하면서 장기전으로 끌고 가야 합니다. 저들의 힘을 소진하게 하는 한편 전력을 보강해야 합니다.”
 
장기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어찌해야 합니까?”
호로하와 왕봉하(王逢河) 사이에 여러 성을 쌓아 방어선을 구축함으로써 당군의 남하를 막는 겁니다. 산성을 중심으로 교전을 펼치면서 시간을 끌면 결국 보급이 당군의 발목을 잡을 겁니다. 또한, 군대를 새로이 정비하고 우리가 흡수한 백제인으로 구성된 부대를 만들어 전선에 투입하십시오. 그들은 전투에 능하므로 전력 보강에 도움이 될 겁니다. 앞으로는 당군이 총력전으로 나올 겁니다. 우리도 고구려 사람·백제 사람 가릴 것 없이 끌어모아서 대비해야 합니다.”
 
문무왕은 눈을 가리고 있던 어둠이 걷히는 듯했다. 유신의 말대로만 한다면 당군과 충분히 겨뤄볼 만했다.
그러자면 먼저 군의 기강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번 패배에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주장으로서 많은 군사를 잃고도 살아 돌아온 의복과 춘장은 물론이고, 분열을 조장했던 당주와 비장들에게도 그 죄를 물어 목을 베야 마땅합니다.”
유신이 참형을 거론한 사람 중에는 그의 아들인 원술도 포함돼 있었다. 아들의 이름을 언급할 때는 분노와 실망감으로 몸을 떨었다. 신라의 많은 젊은이가 나라와 백성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던졌건만 그토록 믿었던 아들이 비겁하게 도망쳐 왔다고 생각하니 지옥불 위에 떨어진 듯한 기분이었다.
한낱 비장에게까지 그런 중한 벌을 내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지금은 전시라 한 명의 인재도 아쉽습니다. 패전에 책임이 있는 주장은 참형에 처해야 마땅하지만 그동안의 공로를 생각해서 유배를 보내겠습니다. 명령에 복종하지 않고 임의로 군사를 돌린 당주들은 태형에 처하지요. 비장들은 다음 전투에서 죄를 씻을 기회를 주겠습니다.”
 
문무왕이 관대한 처분을 내리려 하자 유신은 모욕당한 사람처럼 얼굴이 벌게지더니 급기야는 원술을 지목했다.
원술은 왕명을 욕되게 하고 가훈을 저버렸으니 마땅히 죽음으로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입에서 나올 수 없는 가혹한 말이었다.
문무왕은 유신의 심정을 헤아렸다. 아들에게서 느낀 배신감이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폭발했을 뿐이지 죽음을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짐이 이미 뜻을 정했으니, 그 문제는 앞으로 거론하지 마십시오.”
문무왕은 충직한 노신의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분기가 가라앉으면 유신도 아들을 용서할 거로 생각했다.
 
서력 6737, 신라에 대한 당군의 공격이 여전히 계속되는 가운데 호로하 이남 지역에서는 이를 막기 위한 성곽의 축조와 보수가 한창이었다. 이처럼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인데도 금성 근교의 농장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원술은 마당 한가운데 놓인 평상에 누워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창 기승을 부리던 무더위도 어느덧 끝자락인지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하늘을 날던 솔개가 먹잇감을 찾는지 농장 위를 빙빙 돌았다. 마당에는 수탉 한 마리가 붉은 볏을 흔들며 겅중겅중 걷고 있었다.
고즈넉한 분위기에 젖어 있다 보니 전장의 함성과 피비린내가 옛일처럼 어렴풋하게 느껴졌다. 그의 눈꺼풀이 스스륵 감겼다.
 
원술은 어느새 집 앞에 와 있었다. 벌써 1년이 훌쩍 지났건만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웅장한 솟을대문과 높은 담은 사람들에게 위압감을 심어 주었다. 오랜만에 정겨운 집을 보니 부모님과 형제들이 그리웠다. 당장 뛰어들어가서 자신이 돌아왔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집 안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다.
그가 전장에서 돌아와 농장에 숨은 이유는 차마 아버지의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었다. 화랑의 계율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부친이었기에 전장에서 도망쳐 온 비겁한 아들을 용납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원술이 집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을 때 갑자기 대문 안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재빨리 담 모퉁이로 몸을 숨겼다. 곧 문이 열리더니 군복을 입은 장정 수십 명이 차례로 나왔다. 그들은 하나같이 소리 죽여 울고 있었다.
원술은 문득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집안에 변괴가 생긴 게 분명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군사들이 저편으로 사라지자 그는 재빨리 대문으로 달려갔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원술은 무작정 문고리를 잡고 흔들었다. 문은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았다. 문이 부서지라 두들겼지만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원술은 크게 소리를 질렀다.
게 아무도 없느냐?”
소리가 입안에서만 맴돌 뿐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았다. 온몸을 뒤틀며 소리를 토해 내려 애썼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때 어딘가에서 들려온 괴성이 귓전을 때렸다. 정신을 차려 보니 솔개가 수탉을 채어 날아오르고 있었다.
 
도련님, 웬 식은땀을 그리 흘리십니까?”
담릉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원술은 그제야 자기가 평상에 누워 있다가 잠이 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탉이 거닐던 마당에는 닭털이 낭자하게 흩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집안에 변괴가 생긴 듯하구나.”
원술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잠시 집에 다녀와야겠다.”
원술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마구간으로 달려갔다. 담릉은 영문도 모른 채 그의 뒤를 따랐다.
 
금성에 도착한 원술은 곧장 집으로 가지 않았다. 우선 객점에 든 후 담릉을 보내 집 안의 동정을 살피고 오게 했다. 만일 자신이 괜한 걱정을 했다면 다시 농장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아직은 아버지의 얼굴을 대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객점의 방 안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자니 담릉이 슬픈 얼굴로 들어왔다.
태대각간께서 엊그제 운명하셨다 합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그게 참말이냐?” 
원술은 믿기지 않아 재차 물었다.
한 달 전부터 자리에 누우셔서 시름시름 앓으셨다 합니다. 닷새 전에는 폐하께서 몸소 병문안을 오시기도 했답니다.”
원술은 넋이 나간 듯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봇물이 터지듯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렇게 가시다니. 이리도 허무하게 떠나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정말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야!”
원술의 넋두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아버지는 그에 대한 실망을 안고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신 것이다.
이 불효를 어찌한단 말이냐!”
천을 찢는 듯한 원술의 절규가 심복의 가슴에 아프게 파고들었다.
담릉은 주군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가 말을 꺼냈다.
가 보셔야지요.”
가야지. 가서 용서를 빌어야지.”
원술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의 몸이 허깨비처럼 나부꼈다.
 
1년 만에 찾은 집은 상가(喪家)가 되어 있었다. () 소리가 바람을 타고 흘러나왔다. 조문하러 온 사람들의 줄이 길게 이어졌다.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 아는 체를 했지만 그의 눈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원술이 대문으로 들어서려는데 하인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지나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다.
태대각간께서 유언하시길 도련님이 와도 집 안으로 들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네 이놈들, 어찌 이리도 잔인하단 말이냐!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자식 된 도리를 못하게 하는 게 말이 되느냐!”
원술이 하인들을 윽박질렀다. 하지만 대부인의 지엄한 명이 있었던지라 그들 역시 물러설 수 없었다.
용서하십시오. 도련님을 집 안에 들이면 저희가 죽습니다.”
원술은 기운이 빠졌다. 죽는 마당에도 자식을 용서할 수 없었던 부친을 생각하니 죄스러운 마음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어머니라도 뵙고 가야겠다. 연통을 넣어라.”
하인들도 이 부탁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럼 여기서 잠시 기다리십시오. 제가 대부인께 여쭙고 오겠습니다.”
 
잠시 후, 집 안으로 들어갔던 하인이 돌아왔다. 그의 얼굴은 눈에 띄게 어두웠다.
어찌 됐는가?”
원술이 재촉하자 하인은 송구해하며 말했다.
마님께서 이리 전하라 하셨습니다. ‘아녀자에게는 삼종지도(三從之道)가 있다. 혼인 전에는 아버지를 따르고, 혼인한 후에는 남편을 따르고, 남편이 돌아가신 후에는 자식을 따라야 한다. 내가 홀몸이 되었으니 아들을 따라야겠지만 원술은 아들 노릇을 하지 않았으니 따를 수 없다.’ 그러시면서 만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원술은 모친에게마저 버림받은 것이었다. 그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는 가슴을 치고 바닥을 구르며 통곡했다. 누구도 그를 위로하려고 나서는 자가 없었다.
보다 못한 담릉이 원술을 다독였다.
훗날 공을 세워 가문의 이름을 빛내신다면 모두 용서하고 받아들일 겁니다.” 
하지만 원술의 귀에는 위로가 들리지 않았다.
너의 말을 들었던 나의 잘못이다. 죽을 자리에서 죽지 못하면 살아도 산 게 아님을 왜 몰랐던가!”
밤이 깊을 때까지 통곡하던 원술은 날이 밝자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담릉은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어디서도 원술에 관한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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