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8·15광복 이후 정부 수립, 6·25전쟁과 빛나는 산업화 시기를 거쳐 대한민국은 오늘에 이르렀다. 격동의 한반도, 美CIA 요원으로 그 한복판에서 활약한 마이클 이 박사의 숨 막히는 체험…. 북한 정권의 실체와 광주5·18 등 좌경 친북세력이 주도한 사건들에 관한 증언과 분석, 급변하는 국제정세의 소용돌이 속 한반도의 미래에 관한 그의 이야기들이 값지다. 이에 美연방정부 공무원으로 살아온 40년 세월을 담은 그의 저서 ‘CIA와 대한민국’을 지면에 연재한다.
함박눈 속으로 제삼국 국경을 넘으며
그날 오후 4시에 신 감독과 최 여사는 간단한 식사 후에 옷을 갈아입었다. 가발에 굵은 검은 테 안경을 쓰고, 두꺼운 머플러로 목을 휘감은 다음 미 대사관 소속 외교관 차를 타고 미국 외교관 에스코트 한 사람과 동승하여 대사관 뒷문으로 빠져나와 은밀히 비엔나를 떠났다.
제삼국으로 가기 위해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을 무렵, 그때가 3월 중순이었는데도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국경에 도착하자 양국 출입국 관리소에서도 신 감독과 최 여사가 탄 외교 차량 번호를 확인하고는 승객들의 신분도 묻지 않고 무사통과시켰다. 차의 앞 유리창에 쌓이는 함박눈을 와이퍼가 서서히 헤치는 가운데 미지의 나라로 들어갈 때 신 감독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최 여사의 손을 꼭 쥐어 주었다.
그 후 망명에 필요한 입국 수속 등을 모두 마친 다음 신 감독과 최 여사는 비행기를타고 미국을 향했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 도착한 그들은 법적으로 아직 이혼 상태였기 때문에 재결합의 혼례식을 올리기로 했다. 두 사람은 전부터 잘 알고 있는 이경재 신부를 한국으로부터 초청해 가톨릭 의식으로 혼례식을 올렸다.
신 감독과 최 여사는 이로부터 3년 후에 정식으로 미국 시민권을 받았다. 이때 신 감독은 이름을 사이먼 신(Simon Sheen)으로, 최 여사는 테레사 신(Theresa Sheen)으로 바꾸었다. 이런 과정이 모두 끝난 후에 나는 그들의 요청으로 최 여사와 의남매의 결연을 맺었다.
납북이냐 자진 월북이냐
이 사건이 있은 후 국내에선 두 사람이 납북당했다가 오스트리아 빈의 미국대사관을 통해 탈출한 경위를 두고 한동안 납북이냐 자진 월북이냐를 두고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들에게도 나름 근거가 아주 없진 않았다. 이들이 납치당할 당시 두 사람 모두 심한 슬럼프를 겪으며 경제적으로 위기에 처해 있었으며 두 사람 모두 너무 똑같은 방식으로 납치당한 데다 이들이 북한에 머무는 동안 김정일 당시 국방위원장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으며 활발히 활동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 실제로 맞닥뜨려 헤쳐 낸 사람의 입장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이러니저러니 의견을 말하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서는 경우가 많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1984년 4월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현 국가정보원)에서 ‘북한에 의한 강제 납북’이었음을 공식적으로 확인했다.

영화에 대한 변함없는 열정
그 고통스러운 시련을 겪고도 신 감독의 영화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그는 북한 탈출 후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영화제작 활동을 계속했다. 1994년에는 신 감독이 매년 5월에 열리는 프랑스 칸 국제영화제의 심사위원이 될 만큼 그의 영화인으로서의 위상엔 변함이 없었다. 그에게는 죽기 전에 꼭 만들고 싶은 작품이 있다 했는데 하나는 자신의 납북과 탈출을 소재로 하는 작품이고 또 하나는 1950년 말 6·25전쟁 때의 흥남 철수를 소재로 하는 작품이었다.
그 일을 위해 신 감독과 나는 1998년 말에 버지니아주 노포크(Norfolk)에 있는 맥아더기념관에 가서 그곳에 소장되어 있는 6·25전쟁 전사 중에서 필요한 자료를 수집했으며 북 버지니아의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미국재향군인회 본부에 가서 6·25전쟁 참전용사들을 만나기도 했다.
또한 극작가 신봉승 씨가 시나리오를 완성했고 흥남 철수 때 남쪽으로 피난 온 실향민 중에서 재벌이 된 인사들이 자금을 대기로 하는 등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당시 김대중정부에서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낸 박모 씨가 ‘북한을 자극하는 작품’이라는 이유로 제작을 좌절시켰다.
드디어 서울로 돌아온 그들
신 감독과 최 여사의 북한 탈출 사건은 그 당시 엄청난 뉴스가 되어 전 세계 신문의 일면을 도배했다. 특히 한국에서는 전례 없는 대형 뉴스가 되어 수많은 사람이 그들이 한국으로 돌아와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신 감독의 형제들·신정균과 양녀 신명희는 애절한 편지를 써서 그들에게 하루속히 서울로 돌아와 달라고 호소했다. 한국 정부에서는 안기부 2차장(국제담당) 이학봉과 제3국 부국장·수사단장을 미국에 파견해 신 감독과 최 여사를 설득하게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말을 듣지 않았다.
당시 그들이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미국으로 망명한 것을 섭섭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그들은 절대로 조국을 배신한 것이 아니었으며 후에 그들이 쓴 수기를 읽어 보면 얼마나 조국을 사랑하고 그리워했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이 미국을 선택한 데는 그들 나름의 고충과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태우정부 당시 노 대통령과 가까운 사이로 알려진 강원룡 목사가 노 대통령의 부탁으로 신상옥 감독을 만나 서울로 돌아올 것을 설득했다. 신 감독과 강 목사는 청진을 고향으로 둔 동향인이었다. 두 분 다 고집이 센 것도 비슷했다. 노 대통령은 신 감독 부부가 서울에 오면 철저히 보호하고 편히 머물 수 있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했고, 강 목사는 이 말을 신 감독과 최 여사에게 전했다. 이렇게 해서 탈출 3년 후인 1989년 5월 드디어 두 사람은 서울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들이 김포공항에 도착하던 날 공항 주차장은 보도진들의 차량으로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였다.
신 감독이 북으로 납치되어 간 후에 오수미는 아들 상균과 딸 승리를 혼자 키웠고 1982년에 사진작가 김중만과 재혼했다. 신 감독과 최 여사가 북한을 탈출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했을 때 오수미는 교육 문제 등으로 상균과 승리를 미국에 있는 아버지에게 보내기를 원했다.
그런데 오수미도 기구한 운명의 여자였다. 1992년 6월30일에 하와이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최 여사는 로스앤젤레스에서 하와이로 급히 달려가 남편의 전 애인인 오수미의 장례식을 잘 치르고 돌아갔다. 이후 상균과 승리는 최 여사가 친엄마처럼 돌보았다.
영원한 우정의 영토를 남겨 두고
신 감독이 입버릇처럼 내게 충고하던 말이 있다.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 불타는 열정이 없으면 별 볼일 없는 인생을 살다 가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아마도 그렇게 평생을 살았을 것이다. 그 나이에 그 많은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았으며 두 눈에는 항상 빛나는 서기(瑞氣)가 서려 있었고 새로운 창작 활동에 대한 열정이 불타고 있었다. 그의 그런 기질을 잘 아는 친구들과 유력한 인사들이 신 감독을 계속 뛰게 했다.
안양시에는 ‘최은희 거리’라는 이름의 길이 생겼다. 또한 안양시에선 신 감독 부부와의 인연을 소중히 여겨 안양시를 영화예술의 메카로 만들겠다는 꿈을 갖고 안양시 명학동의 안양경찰서가 사용하던 건물을 개수하여 초급대 과정의 ‘신필름 예술학교’를 설립했다. 신 감독과 최 여사는 이 일을 위해 2000년에 미국에서 한국으로 영주 귀국해 여생을 보람 있게 살려고 정착했다.
그러나 세상일은 모두 무상하다. 2006년 4월11일, 신 감독이 지병을 이기지 못하고 떠나 버린 것이다. 최은희 여사도 오랫동안 병마와 싸우다가 2018년 4월16일에 쓸쓸하게 떠났다. 두 사람을 아끼고 존경하던 모든 사람이 그들의 떠남을 슬퍼했고, 우리의 역사 또한 중요한 한 페이지를 넘겼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영원한 우정의 영토를 남겨 두고 갔다.
프로필
△ 美 연방정부 40년 근속
(DIA(Defense Intelligence Agency·국방정보국) 16년·CIA(중앙정보국) 24년)
△ 1976년 미국 외무고시 합격
△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정치학 박사
△ 美 국무성 동아시아 문제 수석연구원
△ 美 국무성 외교연수원 교수
△ 주한 미국대사관 정무관
△ CIA 한·미 안보협력 조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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