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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연합(UN·유엔)을 인류 정의 구현의 주체로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따지고 보면 1945년 10월 출범 이래 유엔은 대한민국의 성립과 유지에 큰 도움을 준 공로 외에 내세울 게 없다. 그런 의미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23일 유엔총회 연설은 거대 국제기구에 대한 ‘현장 고발’이자 새로운 세계 질서로의 전환을 알리는 선언이었다.
이날 유엔본부 건물 내 에스칼레이터 급정거, 마치 그의 연설 순서를 기다리다 작동을 멈춘 듯한 연단 프롬프터 등을 트럼프는 평소의 문제 의식을 적극 호소할 매개로 활용했다. 일련의 (기계 고장) 해프닝이 유엔 비효율·타락상의 은유가 된 꼴이다. 트럼프는 약 1시간의 즉흥 연설로 상황을 돌파했다. 우선 부동산 개발업자 시절 2001년 유엔본부 리노베이션 때 입찰에 응모했다가 떨어진 일을 거론했다. 당시 유엔은 (트럼프 제안보다) “열등한 쪽을 선택했다”고 한다.
준비된 원고를 쓸 수 없게 된 가운데 트럼프 특유의 대중적 언어와 순발력이 빛을 발했다. 에스칼레이터 급정거를 꼬집어 “멜라니아와 나는 건강해 그 정도엔 끄떡 없다” 응수했고 “(프롬프터) 담당자가 곤란에 처할 것”이라며 공교로운 사고들의 배후를 넌즈시 짚었다. ‘고장난 시스템으로서의 유엔’이라는 진단을 생생히 드러낸 셈이다. 트럼프에게 유엔이란 ‘글로벌리즘 엘리트의 성역’이다. 유엔 관료조직과 그것을 떠받쳐 온 NGO·싱크탱크·재단·빅테크 등이 일종의 카르텔을 이룬다고 보는 것이다.
이들이 각국 유권자들 의사와 무관한 정책들을 결정하니 국민에게 선출되지 않은 자들이 권력을 행사하는 전형적인 구조다. 서유럽 주요 국가들에서 근년 이어진 대규모 반이민 시위들과 자국중심주의 정당들의 약진 모두 다 일맥상통한 글로벌리즘의 그늘이라고 할 수 있다. 글로벌 엘리트들의 기후·인권·이민·다문화 담론이 고상한 수사로 포장됐지만 그 끝은 중산층의 몰락과 불평등 심화였다.
2025년 트럼프 유엔 연설 골자는 ‘실패한 글로벌리즘’과 유엔이 그것의 강고한 성채로 존재한다는 지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사실상 공산권 관리 차 탄생한 게 유엔이다. 경비 약 4분의1을 미국이 부담해 왔다. 냉전이 끝나자 좌경화된 의제를 국제규범으로 강요하며 각국 주권을 침해하는 조직으로 변질됐다는 게 트럼프의 유엔관(觀)이다. 트럼프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애국주의를 재정의했다. 각국이 자기 나라를 아끼고 자국민을 우선시한 정책 위에서 타국과 협력할 때 진정한 국제 질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마가(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의 국제화, 즉 중산층 부흥 운동을 각국이 공유하자는 이야기다. 유엔이 더 이상 초엘리트들의 무대가 아니라 애국적 국가들의 협력체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1990년대 초반 글로벌리즘은 지구촌 공동번영의 메시지로 보였다. 무역 장벽이 낮아지고 자본과 노동력은 자유롭게 흐르며 유엔 등 여러 국제기구가 새로운 규범을 주도하는 듯했다. 그러나 30여년의 결과를 보라. 값싼 임금을 찾아 일자리가 대거 해외로 빠져나간 미국엔 다국적 기업과 금융자본이 주도한 불평등 심화만 가중됐다. 소수의 초엘리트 거부들 출현 속에 마약·보조금에 기대 사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글로벌리즘 아래 소외된 중산층과 노동 계층 부활 운동이 마가의 본질이다. 트럼프는 제조업 기반 회복, 에너지 독립, 교육·문화에서의 보수적 가치 회복을 통해 ‘보통시민’이 다시 사회의 중심이 되는 비전을 제시했다.
글로벌리즘이 국가주권과 전통적 공동체 해체 쪽으로 작동한 게 더 근본적인 문제점이다. 국경 없는 세계를 강조하며 무분별한 이민 확대, 다문화주의, ESG·기후 담론 등을 ‘인류애적 보편 가치’로 포장했지만 네이션스테이트를 약화시키고 초국가적 엘리트 통치의 영향을 강화시켰다. 글로벌리즘 주도의 세계 질서 아래 급증한 이민·난민과 그들을 배려한 정책에서 납세자들 삶이 망가지기 시작했으며 이에 불만을 토로하면 ‘혐오발언’으로 처벌받는다. 서유럽이 이렇게 된 지 오래됐고 미국 역시 상당히 비슷해져 있었다. 2015년 트럼프가 “워싱턴DC 늪의 물을 빼겠다”며 대선 출마를 단행한 배경이다. 원래 늪지대에 건설된 워싱턴DC인데 그는 이를 정·관계 기득권 집단의 비유로 썼다.
특권적 글로벌리스트 진영의 인권·지속가능성·다양성 등에 숨은 기만을 여지 없이 폭로하면서 트럼프는 글로벌리즘이 강요한 일방적 통합에 맞선 대안을 제시했다. 고립주의·보호무역주의로 비판받던 자국우선주의를 ‘건전한 애국주의’로 재정립했다는 게 획기적이다. 20세기 말 이상화된 ‘세계시민주의’의 형해(形骸)를 보며 이젠 국민적 뿌리와 정체성 재발견의 시대로 이동 중임을 트럼프는 평범한 직설적 언어로 표현해 냈다. 첫 임기때 동일한 취지를 유엔에서 펼쳤다가 무시 당하고 놀림 받았으나 이번 연설은 탈냉전 세계질서의 종언과 새 시대 도래를 천명한 역사적인 장면으로 기록될 것이다. 에스컬레이터·프롬프터·마이크 고장이 단순 사고였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트럼프를 적대시한 세력의 저항 몸부림으로 기억되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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