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가 치매 진단을 받으신 지 2년째입니다. 요양비가 필요해 아버지 명의의 예금과 부동산을 활용하려 했지만, 아버지 동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더라고요. 결국 가족끼리 빚을 내고, 형제 간 갈등까지 생겼습니다.”
치매에 걸린 부모에게 재산이 있어도 가족은 그 돈을 제대로 쓸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부모 명의의 계좌에서 자금을 인출하거나 부동산을 처분하려 해도 법적 제약이 많기 때문이다. 이처럼 쓸 수 없는 돈을 ‘치매머니’라 부른다. 결국 재산은 묶인 채 방치되고, 가족 간 갈등만 깊어지는 상황이 반복된다.
돌봄의 주체는 가족이 돼야 하지만 법과 제도는 여전히 치매 환자의 ‘의사 미확인’을 이유로 자산의 활용을 막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자산이 있어도 못 쓰는 불합리한 현실을 해결하기 위한 해법으로 신탁이 주목받고 있다.
기자는 얼마 전 이 주제를 다룬 한 세미나에 참석했다. 현장의 화두는 명확했다. 치매머니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제도적 해법이 바로 ‘신탁’이라는 것이다. 단순히 재산을 관리하는 것을 넘어, 고령자 본인의 의사를 반영하고, 가족 간 갈등을 최소화하며, 자산을 안전하게 운용할 수 있는 장치로서 신탁이 가장 적절하다는 평가가 나왔다.
특히 ‘후견신탁’은 치매 초기 단계에서 고령자가 자신의 자산(예금, 부동산 등)을 신탁 설정을 통해 관리하게 하고, 이후 인지능력이 떨어졌을 때에도 수탁자가 그 목적에 맞게 자산을 활용하게 한다. 이렇게 되면 가족들은 요양비나 생활비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고 재산 운용에 따른 법적 분쟁도 크게 줄일 수 있다.
일본의 경우 치매 고령자 사고를 대비한 ‘지자체 치매 피해 보험’을 도입해, 사고가 발생했을 경우 가족이 아닌 지자체가 책임을 분담한다. 고령자의 보호 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불안을 줄이는 구조적 장치다.
세미나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신탁의 확장 가능성을 보다 적극적으로 제시했다. 예를 들어 미국은 유언비용신탁을 활용하면 상속세 감면 혜택을 받을 수 있는데, 재산 흐름이 투명해지고 사회적 비용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일본도 증여신탁을 활용해 손주 교육비, 자녀 결혼 자금 등 일정 목적에 한해 큰 금액의 비과세 혜택을 부여한다. 이처럼 신탁이 목적에 따라 설계되면 정부도 자산의 사용처를 통제하기 쉬워지고, 세제 혜택과 사회복지의 접점을 형성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제 신탁을 단순한 부자들의 자산관리 도구가 아니라, 치매와 고령사회에 대응하는 복지 수단으로 재정립해야 할 때다. 국민·하나은행 등은 유언대용신탁을 운영하고 있고 미래에셋생명, 삼성생명, 한화생명, 흥국생명, 교보생명의 5개 생명보험사에서 종합신탁을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한 전문가는 “손해보험 회사 중에는 아직 종합재산신탁업을 인가받아 운용 중인 회사가 없다”며 현 운영상황을 전했다. 삼성화재와 KB손해보험도 신탁상품이 있으나 금전신탁에 한정돼 있다.
지금까지의 치매 정책은 보호자에게 책임을 전가하거나 요양시설을 지원하는 것에 국한돼 있었다. 하지만 자산 활용의 관점에서 보면 신탁은 치매머니를 풀 수 있는 가장 유연하면서도 실질적인 제도다. 일본처럼 지방정부가 관련 보험제도를 도입하거나 중앙정부가 신탁을 활용한 고령자 복지 지원에 나선다면 우리 사회도 보다 촘촘하고 따뜻한 고령사회 대응체계를 구축할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치매와의 싸움은 제도와의 싸움이다. 준비된 신탁은 고령자의 존엄을 지키고 가족의 부담을 덜며 사회 불안을 막아줄 수 있다. 신탁을 ‘돈의 감옥’을 푸는 열쇠로 삼아야 할 때다.
후원하기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추천해요
좋아요
감동이에요
화나요
슬퍼요
추천해요0
좋아요0
감동이에요0
화나요0
슬퍼요0
기사제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