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
세상은 요지경이어라, 라고 느껴지고는 한다. 부조화의 광경이 더러 목격돼서 그렇다. 모순이 천연덕스레 공존하는 광경은 엉뚱한 이질감을 넘어 괴이한 공포를 자아내기까지 한다.
부조화의 앙상블은 영화에서도 발견된다. 장준환의 장편영화 감독 데뷔작 ‘지구를 지켜라!(2003. 이하 ‘지구’로 약칭)’가 그 예다. 이 영화는 흥행 실적은 저조했으나, 괴이하고도 걸출한 개성이 인정돼 부조화의 고전으로서 생명력을 잇고 있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영화 ‘부고니아(2025)’는 그래서 해괴한 반가움으로 다가온다. 괴짜는 괴짜에게 매료되는지, ‘부고니아’는 ‘지구’의 리메이크작이다. 괴이한 영화 세계로 유명한 그리스의 괴짜 팬이 명작으로 고평가된 한국 영화를 리메이크한 상황은 기묘하게 엄숙하다. 비교(祕敎)의 신도가 불온한 경전을 정성스레 두 손으로 받들어 봉독(奉讀)하는 듯한 형국이다. 양자의 영향 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러함에도 ‘부고니아’를 ‘지구’의 리메이크로만 분석하는 시선은 편협할 수 있다. 전자의 독립적 특색을 간과할 우려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부고니아’가 ‘지구’를 일정히 변용한 지점들을 어떻게 고유한 영화적 개성으로 삼는지 분석하려 한다. 이 분석은 ‘부고니아’가 벌[蜂]을 매개해 ‘지구’의 악독한 폭력성에 집중한 결과로 비교적 서늘한 정조를 품게 된 영화임을 보여줄 것이다.
두 영화의 공통점은 벌이다. 양자 모두에서 벌은 끔찍한 폭력에 엮이는 양상을 띤다. 그 양상은 서로 다르다.
‘지구’에서 벌은 폭력과 살해의 직접적 도구로 악용된다. ‘지구’의 주인공 병구는 벌꿀을 형사에게 뿌려, 벌떼가 그 형사를 둘러싸고 쏘게 한다. 형사는 수많은 벌의 공격을 당한 끝에 절벽에서 추락사한다.
‘부고니아’에서도 벌이 폭력과 살해에 이용되나, 간접적으로 그러하다. ‘부고니아’는 벌이 사라졌을 때 소의 시체를 썩히면 그 시체에서 벌이 재탄생한다고 믿는 것을 뜻하는 고대 단어다. 이 단어가 제목인 것은 주인공 테디의 과대망상을 교묘히 드러내는 의도로 보인다.
오프닝 시퀀스도 벌들이 클로즈업된 쇼트들로 시작하는 데다가, 양봉장에서 대화하는 테디와 돈도 보여준다. 이 벌의 의미를 오프닝 시퀀스에 나온 테디의 대사로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외계인이 지구인들을 벌처럼 만들고 지구인들의 군집인 지구를 찢어서 온 지구인을 죽일 계획이라 말한다. 이 말은 의미심장하다. 외계인이 지구인에게 가할 (것이라 맹신되는) 악행은 벌에 대한 인간의 착취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이렇게 벌은 인간 종이 우위를 독점해 저지르는 온갖 죄악상에 대한 염세적 비판을 드러내는 데에 연관된다. ‘지구’도 표명하는 이 비판은 냉랭한 깊이를 영화에 더한다.
그렇게 서늘한 광기가 ‘부고니아’에서도 흐른다. 테디도 자기 양봉장에 온 경관에게 벌들을 뿌려 공격한다. 그러나 ‘지구’와 달리, 벌은 경관을 교란시키는 정도에 그치고 그 경관을 직접 죽이는 자는 테디다. 지하실에서 갑자기 총으로 자살한 돈에게서 터진 피가 미셸의 얼굴을 새빨갛게 덮어버리는 장면은 강렬한 시각적 충격을 준다.
돈의 돌연한 자살은 ‘부고니아’의 한계를 묘하게 빗대는 대목으로도 보인다. 돈은 ‘지구’에서 병구를 돕는 여인 순이를 대체한 인물인데, 상당한 활약을 펼치는 순이와 달리, 돈의 비중과 역할은 미미하다. 돈이 조금 희미해지는 만큼 테디와 미셸의 대립이 더 날카로워지는 효과가 있다.
다른 한계는 테디가 미셸을 전기로 고문하는 씬이라 분석된다. 이 전기 고문 씬은 ‘지구’의 물파스 고문 씬이 변용된 것이다. 병구와 순이가 강만식을 외계인으로 여겨 납치한 후, 그의 두 발등을 때수건으로 벗겨 물파스로 칠하는 씬은 ‘지구’의 부조화 양상을 압축한 장면으로 분석된다. 반면, 물파스를 전기로 바꾼 ‘부고니아’는 미셸의 비명과 신나는 음악을 동시에 들려줌으로써 부조화의 미학을 구성했음에도 원래 씬의 불균질적 개성은 넘지 못했다고 판단된다.
‘부고니아’의 변별적 성취는 테디의 아픔을 전하는 흑백 화면 연출에 있다. 두 번 나타나는 이 연출은 전부 그의 모친이 미셸의 회사가 만든 치료제의 부작용으로 의식을 잃은 불행에 관련된다. 한 화면은 테디가 모친과 대화하는 상황을 상상하는 정황이고, 다른 하나는 미셸이 테디와 그의 모친에게 사죄했던 과거가 담긴 플래시백이다. 양자 모두에서 테디의 모친은 온몸에 수많은 주삿바늘이 벌침처럼 꽂힌 채 벌처럼 붕 뜬 상태로 나온다. 현실적 아픔과 비현실적 이미지가 차분한 톤의 흑백 화면에서 공존하는 이 연출은 ‘지구’의 부조화와 이질감을 벌에 연관된 이미지로 서늘하게 변용한 ‘부고니아’의 고유한 성취로 포착된다.
두 영화는 이토록 엉뚱한 죄악상을 담고 있다. ‘지구’가 울퉁불퉁한 괴행성이라면, ‘부고니아’는 그 괴행성의 봉독(蜂毒)을 평탄한 음정으로 봉독(奉讀)하는 차가운 벌집이다.
영화 ‘부고니아(2025)’ 줄거리
대형 바이오 기업의 물류 센터 직원인 테디 개츠는 그 기업의 여성 CEO인 미셸 풀러가 안드로메다 왕실의 고위 관료 외계인이라 확신한다. 그는 벌이 줄고 자기 모친이 치료제 부작용으로 혼수상태에 빠진 일의 원흉이 그녀의 기업이 만든 살충제라 맹신한 끝에 사촌 남동생 돈과 협력해 그녀를 납치하고 자택 지하에 감금한다. 테디는 갖은 폭력과 고문을 미셸에게 가해 그녀의 지구 파괴 계획을 막으려 한다. 그녀는 테디를 속여 죽이고서야 탈출에 성공한다. 사실, 미셸은 정말 안드로메다 왕실의 고위 관료 외계인이었다! 외계인이 지구의 온 생명체를 죽이는 결말을 맺으면서 영화가 끝난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영화는 엉뚱하고 괴이한 음영을 머금었다. 이 경향이 뚜렷한 영화로 ‘더 랍스터(2015)’와 ‘킬링 디어(2017)’가 있다. 요상한 규칙들로 운영되는 커플 메이킹 호텔이 배경인 전자가 서로에게 반한 데이비드와 근시 여인이 각자의 이어폰으로 같은 음악을 듣는 상황을 통해 진정한 사랑의 한 모습을 보여준다면, 신성한 사슴의 살해로 번역됨 직한 영어 원제를 가진 후자는 사슴이 제물로 바쳐지는 에피게네이아 신화를 변용한 영화로서 침울한 정조와 불명확한 전개를 통해 자기 아들을 사살해 버린 한 의사의 잔혹한 운명을 어둡게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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