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마가복음 9:23)
일상에서 우리가 흔히 겪는 상황이다. 지우 4명이 여행을 가기로 하고 9시 열차표를 끊은 후 영등포역 광장에서 8시반 까지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1명이 아무 연락도 없이 장소로 오지를 않았다. 휴대폰도 안 된다. 약속했던 9시 열차는 타지 못했다. 성질 급한 친구는 욕도 튀어나올 순간, 저 멀리 지각한 친구의 모습이 보였다. 이때 늦게 도착한 친구의 반응을 두 가지로 상상해보았다.
첫째 헐레벌떡 달려오면서 “미안, 미안, 정말 미안해 휴대폰으로 알람까지 맞춰놨는데 잠이 깊이 들어 듣지 못하고 놀라서 허겁지겁 달려왔는데, 그만 휴대폰마저 방전돼 연락도 못했어, 정말 미안해, 어떻게 하지?”
두 번째 천천히 여유 있는 모습으로 걸어오면서 “야, 살다보면 늦을 수도 있는 거 아냐? 늦었다고 내가 사과까지 해야 하나? 니들도 늦은 때가 더러 있었잖아. 누가 일부러 늦겠어.”
두 번째 상황의 친구가 첫 번째 친구의 미안해하며 쩔쩔매는 모습을 보았다면 과연 어떠했을까? 모르긴 몰라도 그 친구 머리를 치면서 “에구 머저리 같은 놈. 살다보면 늦을 수도 있는 게지”라며 그 친구의 뒤통수를 쳤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똑같은 상황에서도 생각의 차이가 있다. 미안해하는 친구를 보면 도리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러나 두 번째 친구처럼 뻔뻔함으로 자기변명을 하는 경우는 집단 스트레스가 확 올라갈 수밖에 없다. 그 뻔뻔함에 일행의 멘탈은 무너지고 말싸움이 격해지다가 결국은 파탄으로 끝을 맺는 경우가 많다.
제도와 상식이 존재하는 선진사회일수록 두 번째 친구 같은 뻔뻔함이 통용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권력 주변의 정치는 그렇지 못한 것 같다. 개인 일탈을 제도 탓이라 하고 내 큰 잘못을 남의 작은 잘못을 빌미로 오히려 덤터기 씌우기, 사람 동원해 윽박지르기, 불편한 진실은 조작이라고 우기기, 사실관계가 틀리면 그런 건 중요치 않다며 돌려치기 등등 미안해하고, 사과해야 할 사람이 ‘내가 뭘 잘못했는데?’ 라고 큰소리치는 부류들, 뻔뻔함이 신념으로 포장된 상태에선 상식과 합리가 낄 틈이 없다.
순진한 다수는 처음에는 기가 막혀 분노하지만 뻔뻔함이 일상화되면 그 힘을 현실로 받아드리며 체념한다. 심지어는 분노했던 그것들을 따라 하게 된다. 잘못을 했어도 잡아떼고 우기면 일단 살아남는다는 이상한 학습효과가 이 사회에 만연해 있다.
모든 사람들이 두 번째 친구의 뻔뻔함을 닮은 행동을 한다면 이 사회에 미치는 파장은 어떠할까? 상식의 파괴, 가치의 혼돈, 비상식이 더 큰소리를 친다면 그 같은 혼란은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사회의 자정제 역할을 해왔던 정의·공정·미안함과 염치마저 내몰고 있는 이 뻔뻔함의 바이러스야말로 이 코로나 시대에 우리가 정녕 경계해야 할 악종 사회적 바이러스가 아닌가. 먼 나라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을 보면 권력의 맛에 취해 권력중독 현상을 보이는 이들이 너무나도 많이 눈에 띈다. 어떻게 보면 완장 찬 권력의 힘이 원래 자신의 모습인 양 착각하는 이들도 있고 갑자기 쥔 권력의 맛에 어찌할 바 모르는 군상들도 있는 것 같다.
이렇게 권력중독에 빠져 권력의 맛을 마음껏 누리려는 정치인들이 많을수록 국민은 더 비참해지고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국민을 위한다면서도 국민과 공감하려 하지도 않고 자신이 추구하는 것은 무조건 선(善)이라는 오만과 이기심에 안하무인까지 넘쳐나면서 정작 국민을 피지배계층 정도로 그래서 완전 무시해도 되는 대상으로 바라본다는 게 문제다.
문재인 정권의 특성 중 하나가 권력이 너무 많은 곳에까지 깊숙이 파고들어가 모든 것을 간섭한다는 것이다. 삼부와 국정원이 있지만 그림자가 같은 존재일 뿐이다. 그 권력이 지금은 국민의 지지를 받는 것처럼 보이고 있지만 역사에서 보듯 정권은 영원하지 않다. 무소불위의 칼날을 휘두르며 한국 사회가 오랫동안 이뤄놓은 법과 상식의 지배를 흔들어 놓고 다수라는 미명 아래 독주를 하는 모양새는 유감이 아닐 수 없다. 특히 검은 것을 검다고 해야 하는데 모두가 집권자의 눈치를 보며 검은 것을 검다고 하지 않고 무거운 입을 굳게 닫고 있다.
각 부처들도 정책개발에 앞서 몸 사리기에 급급하다. 정책이 아무리 정당하다 해도 조치는 적법하게 이뤄져야 한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지 않는다는 인간 사회의 작동원칙이 문재인 정부라고 달라질 순 없다.
권력의 부패는 은밀한 성역에서 진행된다. 성역이 강성하면 정권이 쇠락한다. 총선에서 177석을 차지한 거대 여당이 제 세상 만난 것처럼 설쳐대는 등 시대착오적 행태를 보이고 있어 예상은 했지만 미래가 걱정된다. 지금이 조선시대도 아니건만 과거사에 너무 집착하며 한(恨) 풀이를 하려고 해서 실망스럽다.
권력의 맛을 누리는 최상위가 당연히 대통령일 것이다. 그 최정상에서 국민과 공감하는 대통령이 되기란 말같이 쉽지 않다. 그래서 선거 때는 국민과 함께 하겠다고 말하기도 하고 국민이 대통령이라면서 국민을 떠받들 것처럼 말하지만 정작 청와대 주인이 되면 사람이 달라진다.
이미 연구 결과에서도 나타났지만 권력의 정상에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뇌가 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권력에 취해 '권력의 맛'을 향유하기 시작한다. 그럴수록 국민과는 괴리되는 판단을 하고 또 국민에게 배신감을 주는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사실 문대통령의 권력의 맛에 취한 오만함은 이미 숱하게 드러난 바 있다. 이미 권력의 맛에 취해 대한민국의 삼권분립은 없다. 사법부는 더 이상 독립적 기구로 볼 수 없다. 심지어 헌법재판소마저 권력의 눈치를 본다. 국회는 이미 대통령의 거수기로 전락했고 행정부는 아예 자율성을 청와대에 헌납했다. 그러다보니 권력의 맛에 취한 문재인 정부의 행태는 오만함과 안하무인으로 나타난다.
세상이 대통령 1인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그만큼 권력의 맛에 도취돼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다보니 대통령이 통합의 상징이 아니라 분열의 출발점이 돼 버렸다. 그럼에도 권력의 맛에 취한 대통령과 추종자들은 그 권력의 힘으로 모든 것을 재단하고 판단하며 억누르려 한다.
그러면서 자기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 그러다보니 울산시장 선거에 개입해 놓고도 큰소리 치고 오히려 이를 수사하려는 검찰을 잡겠다는 방자함으로 나타나는 것 아니겠는가?
최근 들어 가장 권력의 맛을 마음껏 누리는 사람 중의 하나가 최강욱 열린민주당 대표일 것이다. 그동안 여러 차례 검찰 소환에 계속 불응하고 경찰이 보낸 참고인 서면 조사서를 백지로 돌려보내기도 했다. 청와대 비서관이라고 위세를 부리면서 안하무인의 행동을 한 것이다.
그러다가 국회의원에 당선되자마자 검찰을 향해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확실히 느끼도록 갚아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첫 재판에 출석하면서 “이미 시민들 심판은 이뤄졌다”고 했다. 한마디로 완장 찬 자신이 법원마저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권력을 쥐면 뇌도 바뀐다고 했는데 대표적 케이스 중의 하나가 바로 최강욱 의원인 듯 보인다. 지금 최강욱 의원은 '권력의 맛'에 흠뻑 도취된 정치인이다.
대법원 확정 판결을 받은 한명숙 전 총리에 대해서도 강압수사와 사법농단의 피해자라며 뒤늦게 판결 뒤집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수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스스로 “진보 성향 판사 모임 국제인권법연구회 소속 판사라 '양승태 블랙리스트'에 올랐다”며 자신에게 모욕감을 준 “사법농단 판사들에 대한 탄핵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어찌 최강욱이나 이수진만 권력의 맛에 빠졌겠는가? 한 집단 전체가 그러한 '권력의 맛'에 단체로 빠질 수도 있다. 지금 민주당이 딱 그 모양새다. 177석의 거대한 정당이 된 민주당에겐 지금 눈에 뵈는 것이 없다. 권력의 맛을 누리기 전에는 저렇게 똑똑하고 현명했던 자가 왜 이리 추악한 괴물로 변했는지 이제 알 듯하다.
권력의 맛이 그를 중독으로 이끈 것이고 그 권력의 맛이 한 사람을 저렇게 마음까지 타락시킨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권력의 맛'에 빠진 권력중독은 마약중독과 비슷하다. 인간은 약하다. 그래서 누구든지 권력에 중독될 수 있다.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 '갑질'이라는 것이 바로 권력의 맛에 취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래서 스스로 겸비하면서 괴물이 되지 않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리고 권력을 쥔 자들은 권력의 한계를 스스로 정하고 이중, 삼중의 잠금장치를 해야만 한다. 그러한 피눈물 나는 자기 채찍이 없으면 누구나 언제든지 괴물이 될 수 있다. 똑같은 현실에서 일어나는 똑같은 사건을 앞에 놓고 어떤 사람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그러나 어떠한 자세냐에 따라 그 둘의 결과는 전혀 달라진다는 것은 변함없는 진리이다. 국민의 마음은 물과 같아 변한다는 것도 알아야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신명기 8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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