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숨죽여 바라봤다. “젠피, 약병을 어르신에게 가져다 줘.”
휴머노이드 로봇 젠피는 잠시 주변을 인식하더니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섯개의 손가락을 움직여 약병을 집어 들고 시연자에게 다가갔다. 거동이 불편한 사람을 부축하는 시연도 이어졌다. 얼마 전 찾은 AI EXPO 현장에서 가장 오래 시선을 붙든 장면이었다.
처음엔 그저 기술 시연이라고 생각했다. 인공지능과 로봇 기술이 어디까지 왔는지를 보여주는 전시장 속 익숙한 장면 말이다. 그런데 현장을 둘러볼수록 생각이 달라졌다. 이 장면은 단순한 기술 쇼가 아니라 금융, 더 정확히는 보험산업이 향하는 방향을 보여주는 예고편처럼 느껴졌다. 몇 년 전 기자가 농담처럼 했던 말이 떠오르기도 했다. “서울에 집은 없어도 입주 로봇은 하나 있지 않을까”라는 말이 부쩍 현실로 다가온 느낌이었다.
그 시연은 KB금융이 운영하는 요양시설을 배경으로 한 돌봄 서비스 모델이었다. 같은 부스에서는 KB라이프의 시니어 관련 플랫폼과 상품 안내도 함께 이뤄졌다. 기자는 현장 직원의 권유로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두뇌 트레이닝 콘텐츠를 매일 받아보는 서비스에도 가입했다. 처음 받아본 퀴즈는 화면에 제시된 과일의 개수와 색깔을 맞히는 문제였다. 방식은 단순했지만 스마트폰을 통해 일상적으로 인지 훈련을 이어가도록 설계됐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보험은 원래 사후 산업이다. 사고가 나고 병이 생기고 입원이나 수술이 발생한 뒤 보험금을 지급하는 구조다. 고객과 보험사가 만나는 순간도 대부분 불행이 발생한 이후다.
하지만 초고령사회에서는 이 공식이 바뀌고 있다. 오래 사는 것이 축복이면서 동시에 관리 대상이 되는 시대다. 의료비 못지않게 돌봄 비용이 커지고, 병원 치료보다 더 긴 시간 필요한 것은 일상 관리다. 보험사가 더 이상 ‘아프면 돈을 주는 회사’에 머물기 어려워진 이유다.
그래서 이제 보험의 경쟁력은 ‘상품 판매량’에서 ‘고객의 삶에 얼마나 깊숙이 들어가 있느냐’로 옮겨가고 있다. 건강관리 앱, 시니어 플랫폼, 요양서비스, 디지털 헬스케어가 동시에 등장하는 배경이다.
AI 로봇은 그 변화의 상징이다. 사람을 완전히 대체하긴 어렵겠지만 반복적이고 정형화된 돌봄 보조 업무부터 빠르게 침투할 가능성이 크다. 약 전달, 이동 보조, 건강 상태 모니터링이 대표적이다. 보험사 입장에서는 비용을 낮추면서 고객 접점을 늘릴 수 있는 매력적인 수단이기도 하다.
물론 돌봄을 효율성의 문제로만 봐선 안 된다. 인간의 온기가 필요한 영역까지 기술 논리로 대체하려는 시도는 경계해야 할 것이다.
다만 방향은 분명하다. 보험사가 보험만 파는 시대는 끝나고 있다. 앞으로 보험사의 경쟁 상대는 다른 보험사가 아닐 수 있다. 헬스케어 플랫폼 기업일 수도, 돌봄 서비스 기업일 수도, AI 기술 기업일 수도 있다.
전시장을 나선 뒤에도 이 장면이 쉽게 잊히지 않았다. 천천히 약병을 옮기던 로봇, 그리고 며칠째 스마트폰으로 받아보는 두뇌 훈련 문제. 보험사의 역할이 사후 보상에서 고객의 일상까지 확장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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