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에서 LG로 사명을 변경한지 얼마지나지 않은 1995년 봄 당시 LG정보통신 개발진은 기자에서 조약돌 몇개를 보여줬다.
새롭게 출시할 무선호출기(일명 삐삐)라며 보여준 조약돌 모습의 스토니(Stony) 목업이었다. 각진 사각형에서 유선형의 패션을 강조하는 경쟁제품들이 출시되는 시점에 비정형의 전혀 다른 컨셉이라 낮설었다.
▲ LG가 사명 변경 직후 출시했던 무선호출기 스토니. 각진 부분이 없는 비정형 제품. 출처불명 자료사진을 생성형 AI를 활용해 재편집함
30년 넘은 기억이라 온전하지 않지만 어릴 적 추억처럼 맨들맨들한 조약돌 감성을 전자기기에 더했다는게 개발진의 설명이었다. 실제 사용하면서 호주머니 속에 두고 만지작거릴 때마다 개발진의 이야기에 공감하게 됐다. 첨단과 패션에 초점을 맞추던 시절, 감성을 끌어낸 제품이라 오래토록 기억되지 싶다.
이후 2011년 세계 최초 의류관리기로 나온 트롬 스타일러, 2021년 출시된 이동식 스크린 스탠바이미로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고 식물재배기 틔운, 맥주 제조기 홈브루, 신발관리기 슈케어, 고양이 캣타워와 공기청정기를 합친 에어로캣타워까지 어느 포지션에 놓아야 할지 분류가 애매한 융복합 가전제품을 제시하며 실험적이고 혁신적인 제품을 끊임없이 제안하고 있다.
올해도 다리미판을 재해석한 시스템 아이어닝을 두고 “LG가 또 이상한 거 만들어옴” 밈은 이어지고 있다.
또한 일반인이 기억하기 쉽지 않지만 생명공학부분에서도 성공을 목표로 하지 않는 남다른 행보를 보여줬다. 최초의 FDA 승인 국산신약 기록 역시 LG가 보유하고 있다. 플루오로퀴놀론계 항생제 팩티브가 23년 전인 2003년 지역사회 획득 폐렴 등 적응증으로 FDA 승인을 받았다.
국내 바이오시밀러의 원조 역시 LG다. 바이오시밀러라는 용어 자체가 생소했던 1993년 인성장호르몬 '유트로핀'이 출시했다. 2006년과 2007년 벨트로핀을 상품명으로 FDA·EMEA 승인을 받아냈다. 국내 첫 바이오의약품이다.
피지컬 AI 기업으로 다시 평가받은 LG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낮선 제품을 누적해오던 LG가 피지컬 AI 구현기업으로 재평가받고 있다.
피지컬 AI는 거대언어모델처럼 화면 안에서 답을 생성하는 AI와 달리 카메라와 센서로 현실 공간을 인식하고, 학습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판단한 뒤 로봇·가전·차량·공장설비 등을 통해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기술이다.
LG가 주목받는 이유는 가전, 모터, 센서, 배터리, 전장, 통신, 스마트팩토리, AI 모델을 한 그룹 안에 모두 갖춘 구조 때문이다.
LG AI연구원의 엑사원(EXAONE)이 두뇌 역할을 맡고 LG전자가 로봇과 구동부, LG이노텍이 센싱·광학부품, LG에너지솔루션이 배터리와 전력 솔루션, LG CNS가 산업현장 적용과 시스템 통합을 담당하는 피지컬 AI의 게열화다. 그동안 따로 보였던 계열사 역량이 피지컬 AI라는 이름 아래 하나의 밸류체인으로 묶이는 구조다.
▲ LG전자가 계열사의 역량을 결집한 피지컬 AI 비전을 제시했다. 사진출처=LG전자
자본시장도 반응하며 LG전자는 지난달 로봇과 피지컬 AI 기대감이 맞물리며 가격제한폭까지 올랐다. 시장은 LG를 TV와 생활가전 중심 기업이 아니라 현실 공간에서 AI를 구현할 수 있는 제조 기반 AI 기업으로 다시 보기 시작했다.
구광모·젠슨 황 회동, 재평가에 실체 더했다
이같은 재평가에 실체를 더한 자리가 8일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에서 열린 LG와 엔비디아 최고경영진 회동이다.
LG는 이날 구광모 LG 대표와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최고경영진 회의를 열고 피지컬 AI, AI 인프라, 모빌리티 분야 협력 확대 방안을 논의했다.
글로벌 AI 생태계에서 가장 강한 컴퓨팅 플랫폼을 가진 엔비디아와 현실 세계에서 AI를 구현할 제조·인프라 즉 하드웨어 역량을 보유한 LG가 협력을 모색하는 자리다.
▲ 구광모 LG 대표와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는 8일 여의도 LG본사에서 만나, 협력방안을 논의했다. 사진=연합뉴스
구 대표는 "엔비디아가 그리는 AI 생태계의 청사진이 고객의 일상과 글로벌 산업 현장에 가치 있는 변화를 만들고자 하는 LG의 미래 모습과 일치한다"고 밝혔다. 젠슨 황 CEO도 한국의 제조, 메카트로닉스, AI 경쟁력을 언급하며 로보틱스와 피지컬 AI가 한국의 핵심 성장산업이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는 LG가 피지컬 AI의 일부 부품만 가진 기업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엔비디아가 AI 컴퓨팅과 로보틱스 플랫폼을 제공한다면 LG는 이를 가정, 공장, 차량, 데이터센터에 적용할 수 있는 현장을 갖고 있다.
로봇 협력, 제조 데이터가 기반
양사의 첫 번째 협력축은 피지컬 AI다. LG전자는 엔비디아의 아이작(Isaac), 그루트(GR00T), 코스모스(Cosmos) 등 로보틱스 플랫폼을 기반으로 휴머노이드와 물류로봇 등 차세대 로봇 개발 협력을 확대한다. 데이터 구축, 시뮬레이션, 학습, 행동으로 이어지는 로봇 개발 전 과정이 협력 대상이다.
아이작은 로봇이 가상 시뮬레이션에서 움직임과 작업을 학습하는 플랫폼이다. 그루트는 범용 휴머노이드의 두뇌 역할을 하는 AI 추론모델이며 코스모스는 현실세계의 물리 법칙을 반영한 가상공간에서 로봇의 행동 결과를 예측·학습하는 월드모델 플랫폼이다.
LG가 올해 CES 2026에서 제시한 AI 홈로봇 클로이드(CLOiD)와 로봇용 액추에이터 악시움(AXIUM)도 이 흐름 속에 있다. 클로이드는 AI가 가전과 연결돼 실제 생활공간에서 움직이는 사례이고 악시움은 로봇의 관절 역할을 하는 구동부 기술이다.
▲ LG전자의 로봇용 액추에이터 전시 모습. 액추에이터는 로봇의 관절 역할을 하는 핵심 구동부품이다. 사진=LG전자
가전기업 LG전자가 로봇 관절부품을 전면에 제시한 것은 세탁기와 냉장고, 청소기에서 축적한 모터·구동부 기술을 로봇 영역으로 확장하겠다는 의미다. 로봇 완제품뿐 아니라 피지컬 AI 구현에 필요한 핵심부품 경쟁력까지 확보하려는 방향성으로 해석된다.
LG이노텍은 로봇의 눈 역할을 담당할 고성능 센싱 모듈과 광학부품 개발에 참여한다. LG CNS는 산업현장용 로봇 플랫폼 피지컬웍스(PhysicalWorks)에 엔비디아 로보틱스 기술을 접목해 제조와 물류 현장의 AI 전환을 추진한다.
공장·데이터센터·차량으로 협업의 확장
LG와 엔비디아는 제조 현장에서 축적한 생산기술 데이터와 AI 컴퓨팅, 디지털트윈 기술을 결합해 지능형 자율 제조 생태계를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원재료 조달부터 생산, 물류, 고객 전달까지 전 과정을 데이터와 AI로 연결하는 방식이다.
AI 인프라 분야 협력도 병행된다. LG전자는 엔비디아의 DSX AI 팩토리 아키텍처를 기반으로 냉각수 분배장치(CDU), 콜드플레이트, 액침냉각, 프리패브 모듈형 설계 등 액체냉각 솔루션 인증 협력을 추진한다.
AI 데이터센터는 전력과 냉각이 경쟁력으로 부상한 영역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차세대 GPU 서버의 전력 수요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 800V 직류 기반 데이터센터 전력 솔루션 협력을 논의 중이다.
모빌리티 분야에서는 LG전자의 차량용 인포테인먼트와 전장 하드웨어 역량에 엔비디아의 자율주행 플랫폼 드라이브 하이페리온(DRIVE Hyperion)을 접목한다. 차세대 자율주행 보조시스템(ADAS)을 포함한 모빌리티 AI 시스템 고도화가 목표다.
LG이노텍은 통신모듈, 센싱솔루션, 차량용 라이팅 시스템 등을 기반으로 엔비디아 드라이브 아키텍처에 최적화된 전장부품 개발을 확대한다.
엑사원 생태계도 엔비디아와 연결
LG AI연구원은 엔비디아의 최신 블랙웰(Blackwell) GPU와 AI 개발 플랫폼 네모(NeMo), 추론 성능 강화 소프트웨어 텐서RT-LLM(TensorRT-LLM)을 활용해 엑사원의 학습 효율과 추론 성능을 높일 계획이다.
엔비디아의 네모트론(Nemotron) 오픈 데이터셋도 엑사원 학습 품질 향상에 활용된다. 엔비디아는 LG AI연구원의 소버린 AI 모델 구동과 함께 LG그룹 사업 전반의 AI 전환을 지원하게 된다.
결국 이번 회동은 LG가 피지컬 AI 기업으로 재평가받는 흐름 위에서 이뤄진 전략적 접점이다. 엔비디아가 AI 컴퓨팅과 로보틱스 플랫폼을 제공하고 LG가 제조, 가전, 배터리, 전장, 데이터센터 인프라를 결합하는 구조다.
시장을 선도했던 ‘이상한 제품’의 결론
LG가 완성한 피지컬 AI 생태계는 또 이상한 거를 매번 내놓던 LG의 결과물이다. 스타일러, 스탠바이미, 틔운, 홈브루, 슈케어, 에어로캣타워로 이어진 ‘이상한 제품’의 누적이 현실 공간에서 움직이는 AI의 토양이 됐다.
시장성을 확인하고 뛰어는게 아니라 시장을 선도하면서 쌓아 놓은 데이터는 최적의 테스트베드를 역할을 하게돼 상용화 속도도 가장 빠를 것으로 기대된다.
이상함은 새로운 시장의 전조다. 30년 전 호주머니 속 조약돌 삐삐가 전자기기에 감성을 더했다면 2026년의 LG는 AI에 몸을 부여하는 단계로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