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로 보는 상권|빌딩|재건축 뉴스

뒤로 리스트 인쇄
news only email오류보내기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톡

[인동초]-한용수 서울교통공사 기관사

“선량한 北주민 위해 통일 견인하는 기관사 되고 싶어요”

목숨 걸고 DMZ 넘어 탈북, 끈기·성실·노력으로 공기업 취업문 통과

한대의기자(duhan@skyedaily.com)

기사입력 2021-05-12 13:00:55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 한용수 기관사(54)는 자유 대한민국을 찾아온 탈북민 중 한 사람으로 언젠가는 북으로 이어진 철로를 통해 고향으로 달려가는 꿈을 안고 꾸준히 자신의 역량을 키워가고 있다. ©스카이데일리
 
“열차를 몰아 새벽을 가를 때면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뿌듯한 마음이 들곤 해요. 서울시민의 발이 되어 그들을 일터와 집으로 안전하게 모시는 게 저희 기관사들의 사명이자 자랑이죠. 이 철길이 쭉 뻗어 내 고향 땅까지 연결되는 그날, 그 철길 위로 기관차를 몰아 고향으로 가는 것이 저의 가장 큰 꿈이에요.”
 
‘탈북민’하면 떠오르는 또다른 이름이 바로 ‘실향민’이다. 실향민은 전후 대한민국을 이끌어온 원동력의 일부였으며, 이북에 두고 온 가족들을 만나는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사회 곳곳에서 북한보다 더 훌륭한 국가건설을 위해 열심히 봉사해왔다. 제2의 실향민으로 불리는 탈북민 역시 그러하다. 서울시의 생명선인 교통을 책임지고 있는 서울교통공사 소속 한용수 기관사(46)도 자유 대한민국을 찾아온 탈북민 중 한 사람이다.
 
그는 DMZ를 넘어 대한민국 땅에 발을 디딘 이후 각고의 노력 끝에 서울교통공사에 입사했다. 역무원에서 차장을 거쳐 기관사가 된 지금까지 26년의 세월 동안 서울시민들의 아침 출근을 책임지고 있다. 스카이데일리는 서울시 지하철의 주요 구간을 지나는 2호선에서 묵묵히 시민의 발이 되어온 그에게서 곡절 많았던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
 
“탈북 후 수많은 기업의 문을 두드렸고 끝내 성공했어요”
 
▲ 서울교통공사 한용수 기관사. 그는 26년이라는 세월을 오직 철도라는 두 줄기 레일 위의 인생을 자신의 꿈을 실현할 최고의 천직으로 생각하며 살아왔다. ©스카이데일리
 
“1995년 6월이었을 거에요. 점심 식사를 마치고 노곤해진 부대원들이 잠시 피곤을 풀러 그늘을 찾아 들어갔죠. 저는 그때 산나물을 채취하라는 임무를 받고 군장을 한 채 산으로 향하고 있었어요. 누구도 따라오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지체 없이 남쪽으로 향해 달렸어요.”
 
한 씨의 가족은 북한의 ‘핵심계층’이었다. 아버지는 평양의학대학을 졸업한 치과 의사로 수년간 리비아에서 의료 활동을 했다. 어머니도 북한 핵심 간부들의 자녀들만 갈 수 있는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으로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 여성이었다. 그러한 배경을 가진 그가 처음으로 북한 체제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된 것은 군에 입대한 직후였다. 그는 당시 북한 측 GP에서 근무했다.
 
“당시는 북한의 경제난이 막 시작되던 시기였죠. 그 여파는 북한 군 전체에 영향을 미쳤어요. 보급품 사정이 너무 어려워서 군복을 비롯한 피복에 대한 지원도 끊긴 상태였죠. 군 내부에서는 폭력이 성행했고, 식량 사정으로 하루 한 끼도 못 먹어 허약자들이 속출하기 시작했어요. 그 중 일부는 영문도 없이 사라지곤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모두 부모가 당 간부이거나 고위직 인사들이었어요. 결국 남은 사람들은 가장 힘없는 계층의 사람이었어요. 부대원들과 대화를 나눌수록 그들은 제가 살아온 세상과 전혀 다른, 매우 힘든 세상을 살아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죠.”
 
그는 매일 삐라(전단)와 방송을 통해 남쪽에서 날아오는 소식을 접했고, 젊은 마음은 호기심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군에서 주는 허술한 식단마저 ‘가뭄에 콩 나듯’ 나오니 그의 의지는 더욱 명확해져만 갔다. 하지만 늘 2, 3인조로 움직이는 북한군의 특성상 최전방 부대에서의 생활은 혼자 있을 기회가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3년을 기다린 끝에 철책을 넘을 절호의 기회를 잡고야 말았다.
 
“당시 저는 식량을 보충하라는 임무를 받고 산나물을 뜯으려고 혼자 산으로 오르고 있었죠. 철책 사이엔 강이 있었는데 저는 휴대했던 소총과 수류탄 6개를 강기슭에 가지런히 내려놓고 강을 건너기 시작했어요. 혹시 모를 사격이 걱정이 됐지만 그땐 오직 강을 건너야 살 수 있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그렇게 부대를 이탈한 뒤 강을 건너 국군 경계초소에 도달했고, 그들이 저의 신병을 인도해서 3시간 만에 헬기를 타고 성남 비행장에 도착하게 됐어요.”
 
스무 살의 나이에 한국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딘 그는 꿈과 열정으로 세상과 부딪혔다. 인생에서 처음 맛보는 자유라는 ‘무한대’에 몸을 맡겨보기도 했고, 자그마한 임대아파트에서도 부러운 것 없이 만족하며 마음 놓고 살기도 했다. 가끔 혼자라는 고독감에 잠기기도 했고, 가족들이 그리워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털고 일어나 꿈꿔온 미래를 향해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처음 서울에서 시작한 일은 건설 현장 노동자였어요. 일단 먹고 살아야 하니 뭐든지 일을 해야 했으니까요. 그러나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생각에 기업들에 지원서를 내며 전문직을 찾아 다녔죠. 수많은 기업에 지원서를 내고 고배도 여러 번 마셨어요.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어요. 그러다 우연히 서울도시철도공사 채용 공고를 보고 지원서를 내게 됐죠. 아마 그해 7월에 채용됐다는 통지서를 받았던 것 같아요.”
 
그가 서울도시철도공사에 취직한 후 처음 시작한 일은 차표를 판매하는 일이었다. 당시는 현금으로 전철 요금을 받던 시기여서 그 일을 하려면 모든 역의 요금을 다 알아야 했는데 그는 출근 하루 만에 모두 외워버려 선배들을 놀라게 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열심히 일해도 평가는 달랐고, 일부 동료들의 삐뚤어진 시선으로 상처를 받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이 적응 단계라고 생각하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나 도맡아 하며 묵묵히 이겨냈다고 회고했다.
 
“당시 처음 서울도시철도공사에 출근을 시작했을 때 주변 동료들이 많이 도와줬어요. 하지만 일부 시선은 멋쩍었죠. 사실 그러리라고 예상은 했지만 화가 날 때도 많았어요.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도 나를 인정해줄 시기가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죠. 그래서 항상 솔선수범하기로 마음먹었어요. 생각해보니 지난 26년간 단 한 번도 지각한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매일 1시간씩 일찍 출근했고, 사람들이 기피하는 어려운 일들을 제가 앞장서서 하곤 했죠. 혹시라도 열차 사고로 인명피해가 나면 항상 먼저 뛰어 들어가 구조작업을 한 것 같아요. 점차 동료들이 저를 인정해주기 시작했죠.”
 
“믿음으로 입은 상처, 믿음으로 이겨내 다시 일어설 수 있었죠”
 
서울교통공사 한용수 기관사. 매일 아침 그가 운전하는 지하철 열차로 수많은 서울시민이 출퇴근을 하고 있다. ©스카이데일리
 
한창 회사에서 인정을 받던 그 시절, 그는 또 다시 인생의 고배를 마셨다. 며칠 후 갚겠다고 돈을 빌려간 친구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2000만원은 그에겐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거기에다 빚까지 내어 마련해줬던 돈이라 그는 사람에 대한 배신에 자책하며, 매우 힘든 나날을 보냈다.
 
“빚 독촉이 하루도 끊이지 않았죠. 게다가 당장 생활비마저 거덜이 나서 버스비를 아끼려고 당산에서 가양에 있는 집까지 걸어서 퇴근했고, 그 돈으로 350원짜리 우유 하나 마시고 잠자리에 들곤 했죠. 사실 그때 많이 울었던 것 같아요. 오죽하면 열차에 스스로 뛰어드는 사람들의 심정을 조금은 알 수 있겠더라고요.”
 
한 씨에게 있어서 죽음은 별로 어려운 선택이 아니었다. 하지만 고향에 두고 온 부모님을 생각하면 꿈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빚쟁이들의 행패는 나날이 심해졌고, 극도의 스트레스 때문에 직장을 때려치울 생각도 했었다. 당시 그는 자신을 잡아준 한 친구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지금쯤 다른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 회상했다.
 
“사실 제가 사람에게 믿음을 주고 배신을 당한 이후로 사람을 잘 믿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러다 우연찮게 핸드폰 가게에서 핸드폰을 바꾸다 그 가게 사장님과 친해진 거죠. 나이도 비슷했고 친구로 지내면서 어려웠던 그 시기에 정말 저를 많이 도와줬어요. 빚을 갚느라 돈에 쪼들리던 저에게 1년이 넘는 기간을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회사 근처로 찾아와 점심밥을 사주기도 했어요.”
 
“지금은 그 친구와 종종 만나 그때 일을 안주삼아 술을 마시곤 하죠. 당시 그 친구가 응원해 준 덕분에 점차 직장생활도 안정을 되찾았고, 빚도 줄여가며 심적으로나 재정적으로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죠. 때마침 고향 출신인 아내를 만나 1년 넘게 열애하고 결혼에 골인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땐 아내에게 정말 미안했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귀여운 딸도 태어나고 한 가정의 가장이 됐죠. 따뜻한 가정이 저를 반겨줬고, 저 또한 책임감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오며 삶의 의미를 다시 느끼는 계기가 됐던 것 같아요.”
 
그는 직장 생활을 한 지 10년쯤 지났을 때부터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근면성실함과 바른 성품으로 직장에서 인정을 받고 있었지만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직업상 남들과의 경쟁에서 뒤처지는 느낌은 감출 수 없었다. 다소 늦은 나이였지만 그는 아내의 지지로 공부를 더 하기로 결심하고 전문대에 입학했다고 설명했다.
 
“2010년 35세에 명지전문대학교에 입학했죠. 직장생활을 하면서 일주일에 3일씩 야간 수업을 들었어요. 11시 수업이 끝나 수원에 있는 집에 가면 새벽 1시가 됐어요. 잠깐 눈을 붙이고는 다시 출근하곤 했었죠. 몸은 힘들었지만 배우는 마음은 지칠 줄을 몰랐죠. 철도 부문 종사자를 위한 특별 코스까지 마치고 학사 자격을 취득한 후 내친 김에 2018년 한양대학교 철도시스템공학 석사 과정에 도전해 석사학위까지 받게 됐어요.”
 
그는 올해 동양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 과정을 시작했다. 철도분야 전문가인 그가 갑자기 경영학을 하게 된 계기는 미래의 남북통일을 위해서다. 근 30년 동안 철도에서 일한 자신의 경험에 전문 지식을 살려 철도 분야에서 실질적이고 지속적인 남북협력을 모색하는 연구를 해보려고 경영학 박사 과정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교수로 나라의 철도를 책임질 후배들을 양성하고 싶다는 꿈도 그리고 있었다.
  
인터뷰를 마친 기자의 마음도 뜨거워졌다. 열정이 담긴 그의 눈동자에서 분단으로 끊긴 남북의 철로가 하나로 연결돼 그 위로 달리고 있는 행복한 기관사의 모습이 비치는 듯 했다.
 
[한대의 기자 / 시각이 다른 신문 ⓒ스카이데일리]

  • 좋아요
    5

  • 감동이예요
    3

  • 후속기사원해요
    0

  • 화나요
    1

  • 슬퍼요
    0

<저작권자 ⓒ스카이데일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K팝(K-POP) 가수를 처음 탄생시킨 개척자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 회장 소유 건물의 있는 동네의 명사들
강승중
한국수출입은행
신민자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
뒤로 리스트 인쇄
email오류보내기 트위터 페이스북 밴드 카카오톡
독자의견 총 1건의 댓글이 있습니다.
등록하기

스카이 사람들

more
“사람들의 추억 속에 남을 수 있는 ‘픽시’가 되겠어요”
올해 2월 데뷔, 신인답지 않은 실력 뽐내

미세먼지 (2021-06-19 19:00 기준)

  • 서울
  •  
(양호 : 38)
  • 부산
  •  
(최고 : 15)
  • 대구
  •  
(좋음 : 21)
  • 인천
  •  
(좋음 : 26)
  • 광주
  •  
(좋음 : 29)
  • 대전
  •  
(보통 : 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