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없이 반대표 남발, 국민연금 주주권 유명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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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현범 기자페이지 + 입력 2021-09-28 00:02:11

시간이 지날수록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 경영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생산부터 소비, 투자에 이르기까지 ESG가 미치는 영향력이 커지고 있어서다. ESG란 환경보호(Environment)·사회공헌(Social)·지배구조(Governance)의 약자다. 말그대로 기업이 환경보호에 앞장서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지원과 봉사활동을 독려하며 법과 윤리를 철저히 준수한다는 걸 의미한다. 대다수 기업들이 앞다퉈 ESG 경영을 표방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다.

소비자들은 가치소비에 앞장서고 있다. 단순히 돈을 더 많이 버는 기업이 아니라 착한 기업, 차별적인 경험을 제공하는 기업의 제품이나 서비스를 소비한다. 유럽이나 미국 등 주요 선진국에선 이미 기업을 평가할 때 ESG가 중요한 기준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ESG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기업일수록 투자 유치에도 유리하다. 산업 데이터 제공업체 모닝스타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2021년 1분기에 지속 가능한 펀드에 2조달러의 투자금이 몰렸다. 한화로 2300조원이 넘는 어마어마한 규모다.

투자자들이 투자 결정을 내릴 때 기업의 재무뿐 아니라 사회공헌과 윤리경영 등이 중요한 고려사항으로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다. 추가 고려 요소에는 기업의 에너지 사용부터 폐기물, 환경 오염은 물론 근무 환경, 이사회 구성원의 독립성까지 모든 게 포함된다. 국내도 예외는 아니어서 주요 대기업들이 앞다퉈 ESG 경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다만 아직까지 ESG 경영을 평가하는 합리적인 기준 자체가 확립되지 않다보니 평가기관마다 다른 결과가 나오는 문제는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업체별로 평가결과가 다르다는 건 시장의 혼란을 야기할 뿐 아니라 지속가능한 경영을 추구하는 기업 입장에서도 투자자 수요가 줄어드는 등 악재가 될 공산이 크다. ESG 경영에 앞장서는 기업인데도 대규모 자금을 움직일 수 있는 연기금이나 재단과 같은 기관이 정작 정반대의 평가를 내린다면 그 기업은 불이익을 받을 수 밖에 없어서다.

상황이 이런 만큼 평가뿐 아니라 직접 지분을 갖고 의결권까지 행사할 수 있는 국민연금의 역할과 책임은 막중하다. 국민연금은 최근들어 ESG와 스튜어디쉽 코드를 강조하며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에 나서고 있다. 주주권익 제고를 명분으로 주주총회에서 각 의안에 반대표를 행사하는 사례도 늘었다. 그런데 정작 국민연금이 의결권을 행사할 때마다 정반대의 결과가 도출되는 사례가 늘면서 과연 책임감있는 주주권 행사에 나서고 있는지 여부에 대해선 의문부호가 달린다. 세계에서도 손 꼽히는 연기금 규모를 갖춘 국민연금이 ‘되면 좋고 안되면 말고’ 정도의 인식을 갖고 주주권 행사에 나서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된다.

단적으로 국민연금은 SK이노베이션과 LG화학의 배터리 사업 분할 안건에 대해 반대표를 행사했지만 모두 큰 이변없이 통과됐다. 분할계획 취지와 목적에는 공감하지만 핵심사업부문인 배터리 사업 비상장화에 따른 주주가치 훼손이 우려된다는 이유에서였다. LG화학에서 분할 안건이 통과되자 주가는 급등세로 전환했고, SK이노베이션 역시 분할 안건 통과 이후 오히려 주가가 상승했다. 국민연금의 우려와 달리 시장에선 두 기업의 배터리 사업 분할에 대해 기대감을 드러냈다. 국민연금이 말한 주주가치 훼손 우려는 말그대로 우려에 그쳤다.

국민연금이 과연 진정성을 갖고 주주권 행사에 나서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국민연금이 대주주로 있는 회사에서 이사나 감사 선임에 반대표를 행사해도 실제 부결되는 비율은 현저히 낮았다. 보건복지위 소속 고영인 의원이 국민연금으로부터 확보한 자료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올해 상반기 주주로 참여하고 있는 회사의 이사·감사 의결에서 174건의 반대 의견을 냈지만 실제 반영된 건수는 7건(4%)에 그쳤다.

국민연금이 이사·감사 선임에 반대한 사유는 다양하다. 장기연임부터 이사회 참석률 저조, 과도한 겸임, 감시의무 소홀, 회사·계열회사와의 이해관계 등이다. 내용만 놓고 보면 ESG 경영을 위해 국민연금이 충분히 반대표를 던질만 한 사유들이다. 스튜어드십 코드가 도입된 이후 과거보단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에 나서곤 있지만 실효성은 떨어진다.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치곤 안하느니만 못한 초라한 모습만 되풀이되고 있다.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은 투자자뿐 아니라 주식시장 전반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친다. 그런데 실효성 없는 주주권 행사와 성과없는 반대표만 남발한다면 국민연금에 대한 신뢰도 하락은 물론 시장 혼란만 야기할 수 있다.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로 애꿎은 기업이 피해를 입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진정성과 실효성 없는 주주권 행사를 할 바엔 차라리 침묵하는 게 더 나아 보인다. 합리적인 기업평가 기준 마련과 진정성있는 주주권 행사가 이뤄지길 기대해 본다.

임현범 hby6609@skyedaily.com 기자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