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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일이지만 너무 잔인해서 잊히지 않는 사건이 있다. 밤에 강도가 들어와 아버지를 협박하고 어린 아들의 손가락을 자른 사건이었다. 뉴스에서 이 얘길 듣는데 너무 끔찍했다. 그런데 며칠 후에 드러난 사건의 내막은 달랐다. 아버지가 보험금을 타려고 꾸민 자작극이었고 손가락 하나만 자르자고 아들을 설득했다는 거였다.
둘 다 참혹하긴 마찬가지인데 왠지 두 번째 사연이 좀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왜 그렇게 느꼈을까. 어찌 보면 강도가 돈을 뺏겠다고 아이를 해친 것보다도 아무리 가난에 내몰렸다지만 아버지가 자식한테 그런 짓을 한 게 더 끔찍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런데 두 번째 스토리가 그나마 낫다고 느꼈던 건 아마 손가락을 잘리는 아이에게 내가 감정이입을 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생면부지 낯선 타인이 달려들어 위협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아버지가 부탁했던 게 아이가 덜 공포스러웠을 것 같았다.
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의 ‘제국의 위안부’가 나오기 전까지 나는 위안부는 일본군대의 총칼 협박에 강제로 끌려가 집단강간을 당한 소녀들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제국의 위안부’를 통해 위안부 중에는 폭력에 의해 끌려간 이도 있고, 취업 사기에 넘어간 이도 있고, 가난한 가족에 의해 팔려간 사람도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그 편이 차라리 낫다고 느꼈다. 총칼 협박에 끌려간 거나 가난 때문에 팔려간 거나 참담하긴 마찬가지지만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그나마 덜 공포스럽고 덜 억울했을 것 같았다.
위안부가 처했던 상황은 인신의 자유가 없고 자의로 그 일을 그만둘 수 없는 명백한 감금 상태였다. 그래도 그 안에 때로는 군인 위안이라는 역할을 담당한 ‘동지’적 관계도 있었다는 대목도 마찬가지 이유로 위로가 되었다. 우리가 들어 온 것과 같은 최악의 잔혹한 상황을 겪은 사람들이 물론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는 사실이 다행스러웠다. 한 가지 형태의 위안부만 있는 게 아니었고, 모두 비극이되 그 안에는 여러 가지 모습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 준 박 교수의 책이 고마웠다.
그런데 이 책에 대해서 그렇게 보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위안부는 ‘잔혹한 일본군 만행의 피해자’라는 균일한 단일체로 봐야만 한다는 사람들은 ‘제국의 위안부’ 에 담긴 “그 안에는 다양한 형태가 있었고 그 사실을 제대로 봐야 극복도 화해도 있다”는 박 교수의 메시지를 증오했다.
위안부가 겪은 피해가 철저하게 가혹하고 무지막지하게 잔인해야만 일본에 대한 분노와 보상 요구를 목청껏 외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인 것 같았다. 그들은 ‘실상은 더 복잡했다’는 말을 하는 이에게 입을 닥치라고 했고, ‘사실은 단순한 거’라고 동의하지 않는 자를 가만둘 수 없다며 소송을 걸었다.
박 교수는 1심 무죄를 받았지만 2심은 “(책에서 위안부를 매춘부라고 말한 적 없지만) 독자들이 그렇게 읽을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1000만 원 벌금형을 받았다.
이 명예훼손 소송은 무려 6년 넘게 대법원에 계류되어 있다가 이달 26일에야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 되었다. ‘역사 안 복잡한 진실을 성실히 추적하는 대신 상대방에게 있는 가장 악마적인 측면이 사실의 전부라고 단정 짓는다면 서로 간 끝없는 갈등을 가져올 뿐’이라는 주장을 했다는 이유로 박 교수는 10년 가까운 세월 소송에 시달려야 했다.
지금 우리는 양쪽으로 갈라진 정치 세력이 서로를 최악의 모습으로 단순화하고 악마화하며 증오하는 갈등 속에 있다. 박 교수의 무죄 판결을 지켜보며 나는 서로의 복잡한 결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우리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모든 걸 단칼에 선악구조로 파악하려는 게으름을 경계한다면, 그렇다면 이 험악한 대립의 시대를 극복하고 화해하는 길도 열리리라는 희망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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