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사랑하며 살 것인가? 무엇을 느끼며 살아 있을 것인가? 나에게 중요한 건 그런 삶의 가치예요.”
하운이 내게 말했었다.
“소설가는 이런 걸 경험해야 해”
마리아의 또랑또랑한 선포도 귀에 들렸다.
“봤니? 그래, 봤구나.”
레드삭스가 이기던 날, 아버지의 떨리던 음성이었다.
“과거에서부터 미래를 다시 꿈꿀 거야.”
“나한테 기회를 줘 보려고 해. 그래야 후회가 없을 것 같아서.”
아내와 달봉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 울렸다.
“강무훤 씨가 오랫동안 원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처음 만나던 날, 하운이 내게 한 말이었다. 계단을 밟고 뛰어오를 때마다 내 귀에 속삭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오르고 또 올랐다. 가슴이 터져나갈 것만 같았지만 빛이 보이지 않는 죽음의 세계를 벗어나기 위해 뛰고 또 뛰었다.
나는 유리를 죽였다. 하지만 내가 살해한 것은 살아 있는 유리가 아니었다. 내가 죽인 것은 이미 죽어 버린 유리였다. 삶을 체념해 버린 유리였고 더 이상 꿈꾸지 않는 유리였다. ‘너 같은 애는 모델이 되면 안 돼!’라던 타인의 평가를 실현해 주려는 유리, 그녀 자신을 믿지 못하는 유리였다.
‘그걸 소설이라고 쓰나?’
원고 앞에 앉을 때마다 저렁저렁 울리던 목소리는 평론가 이경수의 비아냥이 아니었다. 그의 독설을 이겨 내지 못한 나 자신의 질책이었다. 내가 계속 소설을 쓰지 못한다면 그의 판단이 옳다고 인정하는 것밖에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무시하고 밟고 일어설 수 없었다. 그가 내 안의 소설가를 살해한 게 아니었다. 내 소설을 죽인 건 나였다. 어리석게도 나는 나 자신을, 내 문장을 믿지 못했다. 그래서 포기했고 내 인생은 어둠에 파묻혀 뒤엉켜 버렸다.
유리도 자신의 워킹을 신뢰해야 했다. 기울어졌든 비뚤어졌든 그녀가 당당하게 걷는 그 자리가 런웨이라는 걸 믿었어야 했다. 나는 유리가 나처럼 포기하지 않도록 저지해야만 했다. 나는 유리를 죽이지 않았다. 내가 처단한 것은 죽음에 대한 순응, 삶에 대한 포기였다. 내가 죽여야만 했던 것은 유리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내가 모두에게 그랬던 것처럼, 또 다른 누군가의 삶을 파괴하려는 끔찍한 절망이었다. 나는 유리를 살해하지 않았다. 내가 살해한 것은 죽음이었다. 삶을 죽이려는 살의, 바로 그것이었다.
“언론이 이번 사건에 관심을 갖고 있소.”
유지오가 스마트폰을 열어 오전에 방송된 뉴스 동영상을 보여 주었다. 여성 앵커가 사건을 간단히 브리핑했다.
“1년 전 자신이 운전하던 지하철 선로에 뛰어든 여성을 살해한 기관사 강무훤 씨, 그를 구명하자는 동료 기관사들의 목소리와 피해자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정당한 법 집행을 요구하는 소리가 맞서고 있어서 향후 재판 과정에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리포터의 영상이 이어졌다.
“서울광장에서 천막농성을 벌이고 있는 도시철도와 매트로 기관사 노조는 열악한 근무 환경으로 인해 이번 사건이 일어났다며 근로조건 개선과 정년 연장, 상여금 인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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