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아주 보기 드문 독특한 이념분쟁을 벌이고 있다. 좌우 진영논리로 극단적 대립이 계속되면서 국민 간 갈등과 증오가 도를 넘었다. 이 같은 대립은 세대싸움, 지역다툼, 빈부갈등까지 한껏 부추기고 있는 중이다. 이에 따라 근본적인 해결방안이 멀어져 가고 국운 쇠락의 음울한 기운이 확산되고 있다. 부강한 국가와 잘사는 국민을 만들어 가기 위한 현안이 산더미처럼 산적해 있는데도 앞으로 나아가기는커녕 후퇴하고 있는 것이다. 이젠 냉정함을 되찾고 전혀 다른 눈으로 새로운 번영의 길을 찾아 나설 때다. 국민 모두가 조화롭게 하나가 돼 국운의 영속적인 발전의 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될 중차대한 시점에 있다.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국가로 성장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국민적 좌우명이 필요하다. ‘부의 열쇠 시즌2’를 통해 이 같은 국운 융성의 지혜로운 길을 찾아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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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에 이어]
Q. 진보가 진보답지 못한 이유로는 이순신 장군의 비유적 설명 이외에 다른 설명이 더 보완돼야 하지 않을까
A. 행복론으로 이야기하면 도움이 될 수 있다. 공동선은 가급적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공유하는데 있다. 양적·질적 공리주의를 합하면 많은 구성원들이 행복에 가깝게 갈 수 있다. 하지만 공리라는 방점의 현실 가능성을 정확히 들여다봐야 한다. 공리는 구성원들이 많을수록 보편화하기 어려운 반작용을 촉발한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지향할수록 그에 반하는 반(反) 자유의 요인들이 상대적으로 더 많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611쪽 : 자유가 메마른 죽음의 땅에서는 풀조차 나지 않는다. 그 풀조차 지배할 수 있다고 오만을 부리는 자들이 영혼을 흔든다) 인간의 행복관점은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시대에 따라 대부분 다르다. 보편적 행복론에 해당하는 요소가 의외로 얼마 되지 않고 상대적 행복론이 오히려 상상할 수 없이 많다는 것이다. 특히 같은 행복도 불행의 요소가 되는 것이 혼재한다. 무한 경우의 수가 마치 무리수처럼 끝없이 확장된다. 진보는 이를 일종의 상수처리하면서 세상의 원리를 특별한 잣대로 만드는데 익숙하다. 행복론도 그렇게 아주 작은 테두리에 가두고 행복의 완성을 이야기 한다. 원주율 ‘파이’나 오일러의 수 ‘e’ 처럼 초월수들의 상수처리는 수학적 계산에 대단히 유용하지만 정의는 다르다. 진보가 무한히 복잡하고 패턴이 잡히지 않는 행복론적 정의감을 특별한 용기에 계속 가두려 하면 결국 그릇이 깨지고 만다.
Q. 진보가 한계일 수밖에 없다면 진보는 본래 있을 수 없다는 의미도 되는데
A. 진보가 완벽을 지향하지 않고 불완전을 보완하는 의지를 중단 없이 지켜간다면 진보는 필요하다. 그래서 진보 자체의 필요성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진보의 개념정의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775쪽 :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폭력성과 악마성을 부른다) 개혁, 혁신, 혁명 등이 대개 진보에 입혀진 옷으로 한정되고 있지만 진보는 오히려 그 개념에 억매여 확장되지 못하고 있다. 특정한 사건 보다 포괄적 사건에 방점을 두는 진보의 개념은 완전하지 않은 세상이나 불완전한 생명에서 완전한 눈을 뜨는 일이다. 완전한 이상만을 완결하려 할 때 불완전 속에 숨겨진 선한 동력을 보지 못하거나 무시한다. 선한 의지가 무르익지 않은 불완전성이 나쁘다는 식의 관념은 진보 자신의 발에 족쇄를 채운다. 완벽하게 선한 의지가 없다고 보는 관점은 불완전에 감춰진 선을 보게 한다. 가령 성욕에 대한 희열을 만족감(또는 쾌감)으로 보지 않을 때 성욕의 진실에 다가간다. 넓게 보면 성욕 역시 뇌가 인지하는 전기신호 범주에 있다. 성욕에 대한 만족감은 성욕의 완성이 아니라 생명의 종족보존 본능이라는 늘 불완전한 전기신호를 뇌가 인지하는데 있다. 거꾸로 뇌는 그것을 만족감으로 느끼게 하는 기발한 장치다. 만족감의 정체가 성욕 자체의 완결성이 아닌 불완전한 과정이라는 진실을 볼 때 진보의 정의감이 바뀐다. 진보적 관점의 정의 또한 종족보존의 만족감처럼 멈추지 않는 지속성을 띠어야 한다. 이는 완성이 아닌 불완전에 대응해 멈추지 않아야 할 역동성이다. 완성된 진보를 이야기 하면 불필요한 진보지만 미완성된 진보를 이야기하면 필요한 진보다. 미완성의 진보도 자유의 영역이다.
Q. 완전과 불완전의 개념을 연속과 불연속의 개념으로 이해해도 되는지
A. 의미는 다르지만 전체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의미가 있다. 완전은 불연속, 불완전은 연속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다시 말해 생명이 세상을 인지하는 방식은 거의 불연속이 지배한다. 개체성, 개별성, 유한성 등은 불연속을 표현한다. 사람, 생명, 국가 등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오감으로 들어오는 대부분은 단절적인 불연속으로 간주된다. 그 속에서 인간의 욕망 또한 불연속적 개념에 빠진다. 인간의 욕심은 무엇을 완성하고 완결해야 하는 기본 의지를 갖고 있다. 진보는 과정보다 완성을 중시하는 불연속의 구분 짓기를 중시하는 경향성을 띤다. 하지만 세상과 자연 그리고 생명은 불연속 사이에 필요충분하게 반드시 연속이 흐른다. 단 하나도 연결되지 않는 것이 없다. 하물며 딱딱한 물질도 파장의 개념이다. 아원자의 세계로 무한히 들어가면 태초의 근원 에너지까지 흔들리는 끈이라는 이론이 물리학의 대세가 됐다. 끈은 마치 교향곡의 선율처럼 움직이는 파동에 따라 소립자를 결정해 만물을 만들어 낸다. 미시세계 뿐만 아니라 거시세계에서도 연속이 불연속을 잉태하고 있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빈 공간에는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로 차 있다. 양자화된 우주는 에너지로 가득하다. 보이지 않는 자연의 마법을 표현하는 수(數)만 해도 끝없는 무한소수(무리수) 또는 초월수들이 자연수 사이로 엄존한다. 연속이 지배하는 자연 속 인간의 역사도 분절적이지 않다. 끝이 있으되 끝이 없는 불연속의 연속이다. (616쪽 : 자유는 불연속의 연속 과정에서 정보 에너지와 흐르기 때문에 영원히 추락할 수도 있고 영원히 상승할 수도 있다) 전자는 현상, 후자는 본질이다. 끝을 보고야 말겠다는 이념의 개체성을 중시하는 진보는 자유를 속박한다. 진보는 연속하는 과정으로 눈을 돌려 유아독존의 배타적 전체주의 이념을 버려야 한다.
Q. 진보가 추구하는 가치 중 가장 중요한 행복한 사회를 포기하란 말로 들리는데
A. 행복의 개념을 완성으로 보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은 세상과 늘 싸울 운명을 갖고 태어나는 것이 진보의 허깨비다. 행복 역시 연속으로 보면 과정 속에서 찾는 지혜를 필요로 한다. 무한한 경우의 수들이 지배하는 행복개념을 완성하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행복은 상호적·상대적이다. 관계망이 넓어질수록 행복개념 역시 무한한 다양성을 키운다. IT 기술의 발달로 관계망이 끝없이 확장되고 있다. 개인들 간의 행복뿐만 아니라 소통의 속도 자체가 행복을 좌우하는 관계망에 들어간다. 관계망은 기술적 진보에 따라 거의 한없이 확장되고 있다. 완전한 행복을 포기하면 더 완전한 행복이 보인다. 끝이 없이 커지는 것도 끝이 있고 끝이 없이 작아지는 것도 끝이 있음을 깨우치면 안다. (508쪽 : 자유시장은 늘 관계의 망을 깨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더 강화시킨다) 수학적으로 전자는 무리수, 후자는 미분이 각각 소환된다. 무리수를 상수로 표현하는 방식과 운동량을 계량화 시킨 미분이 현대문명의 메가 기둥이 됐다. 자연의 연속법칙을 불연속으로 잡아들여 인간의 통제 하에 두었다는 것은 연속이 행복의 근간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진보가 추구하는 행복은 절름발이인 셈이다. 성취해도 불완전하고 완전히 성취하면 더 불완전해지는 신기루 같은 행복을 쫓고 있다. 진보의 행복론은 허공에서 춤을 추게 만들어 아무도 행복하지 못하는 세상을 낳고 만다.
Q. 진보이념 중 중요한 근간인 인권과 평등 역시 행복론과 마찬가지로 보아야 하나
A. 인권을 보면 진보 중심의 역차별이 많다. 성소수자 인권을 보호하려다 다수의 건강에 치명적 위협을 가하거나 가족의 불운을 넘어 해체까지 영향을 미치는 일이 대표적인 사례다. 평등을 전제로 한 인간의 존엄성을 추구하는 인권이 도리어 인권을 해치는 문제다. (275쪽 : 자유시장의 독점이 과격할수록 인간의 행복감이 억제되고 왜곡될 여지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조차 자유롭게 두지 않으면 행복감을 느끼는 또 다른 사람들의 자유로운 행복이 억제된다) 자유에 대한 존중 없이 계급을 온전히 제거할 수 없는 현실을 무시해 수억명이 평등혁명이란 이름으로 죽어갔다. 계급투쟁론은 인권을 실현할 수 없는 이상주의 평등이란 사실이 공산주의 도미노 붕괴로 확인됐다. 따라서 인권과 평등 역시 연속이 불연속을 결정하는 구조다. 두 점의 좌표는 불연속이지만 두 점의 좌표를 미분하면 연속이다. 인권과 평등의 두 점은 불연속이지만 점으로 머물 인자들이 아닌 것을 전제한다면 연속을 불연속으로 만들지 못한다. 불연속으로 보이게 할 뿐이다. 인권과 평등 역시 상호 보완 속에 끝임 없이 움직이는 생명체다. 생명은 죽음을 맞아야만 멈추지만 살아 있는 한 절대 멈추지 않는다. 인권과 평등은 선해보여도 완성을 추구할 때 죽음을 질주한다. 평등한 사회일수록 인권이 고양되지만 임계치로 갈수록 말살돼 간다. 인권이 존중받는 사회일수록 평등이 안착되지만 임계치로 갈수록 인권이 사라져 간다. 인권과 평등은 전자의 긍정성이 있지만 후자의 부정성이 대단이 위험하다. 진보의 인권론과 평등론은 메아리 없는 아우성으로 끝나는 것을 늘 예정해 놓고 있다.
#box1#Q. 인권, 평등, 행복 등 인간이 추구하는 근본가치를 완성할 방법은 없나
A. 없지만 있다. 전자는 있다는 전제하에 없다는 것이며 후자는 있다는 전제하에 있음을 상징한다. 인권·평등·행복은 과정 속에 있다. 그것도 고통과 마주하며 존재한다. 없지만 있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과정은 완성이 아니고 고통은 더더욱 세 가지 정체성과 거리가 멀다. 엄밀히 없어야 맞지만 있다는 것은 과정과 고통이 곧 인권·평등·행복이라는 가치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고통 속에서 보이는 희망은 과정을 중시할 때다. 그 희망이 바로 인권·평등·행복의 밑거름이 된다. 옥토를 일구기 위한 자양분이 고통 속 희망으로 만들어진다. 그것은 과정이고 연속이다. 끝없이 노력하는 과정 속에서 느끼는 인권·평등·행복만이 진실하다. 그 모습이 비록 불완전하고 화려하지 않아도 흔들리지 않는 강열한 기둥이 깃들었다. 섣불리 쓰러지지 않는 진정한 진보가치는 그 어떤 것에도 연결된 무애(无涯)의 법칙 속에 있다. 그래서 없지만 있다고 한다. (414쪽 : 기쁨과 희열의 에너지는 무애의 선상에서 자신과 타자 네트워크가 하나가 되는 합일이다. 공통의 흐름이되 흐르지 않는 하나가 무애의 중첩이다)
Q. 자유시장경제 내지 자본주의를 일방적으로 긍정하는 쪽에만 무게를 두는 것 같은데
A. 거꾸로 자유시장경제가 사회주의 통제경제보다 못하다는 증거가 없다. 오히려 공산당 원조국이라고 할 중국, 베트남 등이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받아들여 높은 성장률을 구가해 왔다.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상징인 북한의 배급망도 사실상 붕괴되면서 장마당이 급속히 늘어났다. 시장경제가 얼어붙은 계획경제에서 신기한 싹을 틔웠다. 진보가 추구하는 인권·평등·행복의 가치가 어디서 나오는지를 알려주는 시그널이다. 국가를 지탱하고 사회를 움직이며 가족을 책임지는 원동력은 과정과 고통이 늘 서린 자유시장경제에서 태동한다. 시장경제는 무한히 가속운동 하는 네트워크의 총합이다. 한 국가의 시장경제는 마치 하나의 생명체다. 자연의 속성처럼 가속운동을 멈추지 않는 것이 과정이며 고통이고 또한 결실이다. 숫자로 무한대가 곧 가속운동이다. 무한대를 정수화 하면 방정식을 통해 가속운동을 장악한다. 이것이 진정한 불연속이지 시장경제를 통틀어 장악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712쪽 : 인간은 초정밀 원리에 완벽히 부합하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부족하고 불안해 억지로라도 채우려 하고 완전해 지려 한다. 결핍성은 완전을 지향하는 쉼 없는 목적성이다) 마르크스는 무한성을 정수화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시각을 정수화 해서 오류를 범했다. 자연과 생명의 무한한 연속을 이론으로 체계화 하지 않고 드러난 불연속의 계급이론에 연속을 꿰어 맞추고 말았다. 작은 그릇에 태평양의 물을 담겠다는 속임수와 다르지 않다. 이를 인용하거나 차용하고 배운 진보 이념이 덜컹덜컹 소리만 요란해진 이유다.
Q. 단점과 부작용이 여전히 상존하는 자본주의가 마치 영원할 듯한 주장 아닌가
A. 사회주의 계획경제가 잘못됐다고 해서 자본주의가 완전한 대안이라고 결론내릴 수는 없다. 자본주의는 여전히 불안한 시스템이 맞다. 탐욕으로 발아하는 주기적인 공황이 늘 엄습하고 자본주의의 생명인 생산성과 효율성이 자본으로 인해 떨어지는 요인이 있다. 대안으로 나온 정부의 간섭 정도에 따른 첨예한 경제이론들이 맞서고 있는 중이다. 자본주의 대안은 자본주의가 말해준다. 이 시각이 중요하다. 자본주의의 단점과 부작용을 스스로 치유해 가는 보이지 않는 내적 혁명 속에서 진보 경제이론이 비현실적이라는 것이 계속 증명된다. 신 잉여가치 이론을 정립해야 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미래 수정자본주의는 ‘부(富)의 신뢰망’이다. 투명성을 기반으로 신뢰성이 사슬로 연결되는 구조 속에서 경쟁이 더 큰 의미를 갖게 되는 구조다. 이름은 임계의 부가가치다. 시간이 갈수록 결실이 나오기 힘든 자본주의 구조를 결실이 나오도록 쥐어짜는 구조에 일종의 자양분을 주는 방식이다. 부의 신뢰 자양분은 임계치로 갈수록 경쟁할 그라운드가 넓어지는 그림이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이상하지만 곧 다가올 신 잉여가치 구조 속에서는 당연한 시스템이 된다. 신 잉여가치는 통제되지 않는 탈중앙·탈권위 속에 있지만 오히려 국민과 국가 모두 수혜를 받는 공동번영의 가치개념이다. (182쪽 : 잉여가치는 특정 자본가가 일방적인 주도권을 갖기 어렵다. 부의 오픈 소스 정보들은 강력한 분배효과를 나타내면서 건전한 자유시장의 근간을 형성한다) 진보는 이를 인위적으로 이루고자 했지만 대실패했다. 눈앞의 정석 보다 보이지 않는 포석을 두지 않은 탓이다. 미래는 확연히 보이지 않지만 현재의 자본주의가 그것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진보의 눈으로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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