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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의 생활명상 즐기기

그때 그냥 침묵하고 있을 걸

당신의 침묵이 생명을 키울 수 있다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21-02-12 11:10:14

 
▲김성수 작가·마음과학연구소 대표
지나고 나면 그때 그냥 침묵하고 있을 걸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내 아버지의 가장 큰 특징 하나를 꼽으라면 과묵혹은 침묵이다. 이상한 일이다. 당신이 침묵했던 시공간의 기억은 세월이 흐를수록 내 의식 영역에서 계속 팽창하고 있는 듯하다. 당신이 나에게 잔소리 하던 기억보다 침묵했던 기억이 생생히 각인돼 있음을 알게 된다.
 
그 때는 그저 아버지가 나이 들수록 말수를 줄이시는구나정도로 생각했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어린시절 당신은 꽤나 잔소리가 심한 분으로 인상지워져 있기 때문이다. 아들이 며칠짜리 여행이라도 가게 될 예정이거나, 당신 마음에 들지 않은 일이 발생했을 때 아버지는 나를 안방 윗목에 앉혀놓고 일장 훈시를 하셨다. ‘여행이란 이런 것이니, 여행의 의미는 이런 것이고, 그 목적은 이런 것이 아니겠냐. 명나라 큰스승 왕양명은 여행을 다니면서 천하를 교과서 삼아 읽고 다닌 끝에 사상 통일을 이루었던 것 아니냐.’ 무릎 꿇고 있던 다리가 저리다 못해 내 몸과 분리감을 느낄 즈음에서 아버지는 그래 됐다, 가봐라하고 나를 놔주곤 하셨다.
 
내가 결혼하고, 사춘기 아들한테 꼰대니 잔소리꾼이니 하는 불평을 듣게 될 즈음, 고향의 아버지는 만나뵐 때마다 더 과묵해지는 기색이었다. 모르긴 해도 내 나이가 십대나 이십대라면 당신의 그런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나도 젊은 시절 아버지처럼 내 아이의 정수리에 대고 꽤나 잔소리하는 꼰대세대가 됐기 때문에 그런 양면 관찰이 가능했을 것이다. 나이 들어가면 잔소리와 중언부언이 많아진다는 통념을 할아버지가 되신 당신은 의도적인 노력으로 거스른 듯하다.
 
아버지가 일궈놓은 침묵의 시공간은 어머니와 형제들의 기름진 수다 농토가 되었다. ‘근엄이나 가장의 권위따위로 수식되는 그 세대 남성들이 응당 누려왔던 권위의 언어를 내려놓음으로써 우리집은 일찌감치 여섯 형제의 다양한 수다가 자유로이 오가는 시공간이 된 것이다.
권력자일수록 명상이 필요한 이유
 
복잡한 언어 체계를 통해 지구 행성을 석권한 인간이 자신의 언어를 포기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일까. 당신에게 언어나 소리는 존재자체를 의미한다. 그것이 외마디건 짧은 신음이건 마찬가지다. 그런 신호를 언제 어느 때든 마음껏 드러낼 수 있는 존재는 누구인가. 말할 것도 없이 우리집에서는 아버지셨다. 그는 전쟁의 상처와 보릿고개가 엄연했던 시절에 다자녀를 키우는 데 소위 뼈골이 빠졌던가장이었다. 환갑을 지나 공직에서 은퇴한 당신은 혁혁한 무공 수훈자처럼 언제 어느 때든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도 그의 식솔들은 수긍해야 할 터였다. 인간세에 인과의 법칙이 작용한다면 당연한 순리 아니겠는가.
 
하지만 당신은 어느 순간부터 침묵을 즐기기 시작한 듯하다. 내가 침묵을 즐기기 시작했다고 표현할 수 있는 근거는, 당신의 표정 때문이다. 당신은 말(언어)과 엷은 미소를 맞바꾸기라도 한 사람 같았다. 결혼한 형제들이 명절이나 제사 때 모여 앉으면 가끔 구원(舊怨)을 풀기 위해 모여든 집단 같기도 하다. 형제간에 갑자기 긴장감이 치솟을 때가 있다. 이 상황은 마치 닭싸움처럼 싱겁게 끝나곤 했는데, 잘 되돌아보면 그 상황을 지켜보는 아버지의 미소 띤 침묵이 늘 함께 했었다.
 
권력의 서열은 곧 언어의 서열이기도 하다. 어느 시공간이든 말을 더 많이 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사람이 권력자다. 권력자에게는 훗날의 국민이 붙여주는 수식어가 있다. 독재자, 민주주의자, 이상주의자, 현자, 박애주의자 등등이다. 이 수식어는 권력자가 자신에게 집합된 권력을 어떻게 활용했느냐에 따라서 후손이 붙여주는 꼬리표다. 위 수식어 중에서 당신이 알고 있는 위인을 연상해보시기 바란다. 마하트마 간디, 링컨, 세종대왕, 칸트이들에게서 수선스러운 수다를 상상하기는 어렵다. 간디와 함께 살아보지는 않았지만 그에게서 완전한 침묵과 평화를 느끼는 것은 어렵지 않다. 기도하는 링컨은 연상되지만 수다스런 링컨은 잘 그려지지 않는다. 세종대왕의 침묵, 칸트의 침묵 또한 마찬가지다.
 
마음은 잘 멈추지 못한다. 심리학이나 불교 경전에 따르면 사람의 마음은 언제든 무엇인가를 행한다. 가만히 앉아 있을 때에도 마음은 무엇인가 일거리를 찾아 헤맨다. 스치는 중국 음식점 냄새에 들러붙기도 하고, 들려오는 바람 소리에 올라타기도 한다. 입안에 감도는 침의 감각을 아는 데에도 마음이 가지 않으면 알아차릴 수 없다. 심지어 잠을 자면서도 마음은 깨어서 활동하곤 한다. 그런 마음의 활동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조차 기억나는 것을 우리는 꿈이라고 한다. 당신이 아시다시피 생각이나 감정은 침묵 환경을 좋아하지 않는다.
 
침묵은 멈춤이지만 생각이나 감정의 멈춤이 아니다. 언어의 멈춤이다.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 맡고, 귀로 듣고, 혀로 맛보고, 피부로 감촉하는 것에 대한 언어적 반응을 보류하는 것이다. 결과는 놀랍다. 일단 시간적 공간을 챙긴다. 타 존재와의 긴밀한 교류를 잠시 멈춤으로써 물리적, 심리적 공간을 확보하기도 한다. 언어화된 생각이나 감정 표현을 정지함으로써 응축된 에너지를 갖추게 되기도 한다.
 
침묵에는 두 가지 방향성이 있다. 하나는 내 의식 바깥으로 열려 있는 침묵이다. 타 존재의 태도나 상태를 평가하고 판단하느라 경황이 없어서 본의 아니게 생산된 무음 상태다. 나는 이것을 외향적 침묵이라고 한다. 반면에 내 의식의 안쪽을 주시하는 침묵이 있다. 생각하고 있음을 아는 침묵, 냄새 맡고 있음을 아는 침묵, 기억이 일어나고 있음을 아는 침묵, 말하고 싶음을 알고 있는 침묵 따위다. 내향적 침묵은 일종의 자기 주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명상이다.
 
그렇다면 내 아버지의 침묵은? 당신 자식 여섯 형제 내외가 갖은 수다를 떨고 있는 모습을 미소 띠며 바라보고 있는 당신의 침묵은 외향성인가 내향성인가. 알 수 없다. 유추하건대, 당신 자녀들도 바라보고, 그 자녀들에 대한 당신 마음도 바라보는 상태이지 않았을까. 안팎을 균형있게 바라보면서 엷은 미소를 담고 있는 침묵. 우리집 최고 권력자의 언어가 기꺼이 그 자리를 내줬을 때 발생한 따뜻함이나 다정함이 떠도는 공기는 그런 균형감을 바탕에 둔 침묵 덕분이지 않을까.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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