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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발 반도체 패권다툼이 본격화하고 있다. 가장 발빠르게 대응하고 있는 곳은 대만의 파운드리 세계 1위 기업인 TSMC다. TSMC는 미국 애리조나주 챈들러시 등에 3년 내 5개 공장을 증설하는 내용의 투자안을 협의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이 지난달 12일 주요 반도체 기업들을 대상으로 대미 투자 확대를 요구하자 TSMC가 화답한 결과다.
TSMC의 미국 신공장이 들어설 예정인 애리조나주 챈들러시는 미국 반도체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요충지로 손꼽힌다. 인텔의 반도체 생산거점이 들어선 곳이기 때문이다. 시스템반도체 분야 강자인 인텔은 뛰어난 기술력을 갖췄지만 생산을 대만과 한국 등에 대부분 넘긴 탓에 실제 생산능력은 부족하다. TSMC 신공장이 설립되면 인텔은 부족한 생산능력을 보강할 수 있고, TSMC는 인텔의 뛰어난 기술력과 물량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삼성전자가 메모리반도체 부문에서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시스템반도체 이른바 비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선 여전히 마이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전체 반도체 시장에서 비메모리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이 70%가 넘는다는 점에서 이는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이 풀어야 할 숙제로 지목된다.
특히 TSMC는 시스템반도체 파운드리 부문에서 삼성전자의 가장 큰 경쟁자다. 현재 반도체 파운드리 부문에서 TSMC의 세계 시장점유율은 절반을 웃돈다. 반면 삼성전자는 약 2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확고한 2위 자리를 지키고 있긴 하지만 점유율면에서 2배 이상 격차가 난다.
그렇다고 삼성전자가 TSMC와의 격차를 줄이는 것도 쉽지 않다. 이미 TSMC는 지속적인 설비투자를 감행하고 있어서다. 미국 애리조나 생산공장 증설에 이어 최근에는 일본에 약 200억엔(약 2100억원)을 투입해 연구개발 센터 구축을 검토하고 있다. 반도체 미세공정에 필수인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확보에도 사활을 걸고 있다. 과거 삼성전자가 메모리 반도체 분야 1위로 올라설 때처럼 공격적인 투자를 감행하고 있는 것이다.
삼성을 둘러싼 반도체 산업 생태계가 그리 우호적이지 않다는 점도 위기감을 부추긴다. 그간 삼성전자가 D램, 파운드리, 낸드플래시 사업을 모두 영위하는 종합반도체기업(IDM) 이라는 포지션 덕분에 시너지를 낼 수 있었지만, 인텔이 다시 파운드리 재진출을 선언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반도체 최대 고객인 미국의 빅테크 기업들에게 삼성전자는 동업자임과 동시에 경쟁자다. 바이든 정부가 반도체 패권다툼을 자처한 상황에서 외국기업인 삼성전자보단 자국기업에 팔이 굽을 수 밖에 없다. 마이크로소프트와 IBM, 아마존, 구글 등이 반도체 직접 설계에 나서고 있는 상황에서 인텔이 비메모리 반도체 물량을 싹쓸이 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뿐만이 아니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초격차 전략에도 비상등이 켜진 상황이다. 이미 삼성전자가 5나노 파운드리 공정의 수율을 개선하는 사이 TSMC는 5나노 제품을 안정적으로 생산하면서 애플과 AMD 같은 대형 고객사를 확보했다. 이러한 가운데 IBM은 반도체 업계 최초로 2나노미터 반도체 칩 개발에 성공했다. IBM은 반도체 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팹리스 업체다. 그간 삼성전자와 IBM이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해왔다곤 하지만 추후 2나노 공정을 기반으로 한 반도체 칩 생산물량을 삼성전자에 맡길 지 여부는 미지수다.
첨단산업의 결정체라 불리는 반도체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 중요성을 더하고 있다. 자율주행부터 사물인터넷, 인공지능 등 시스템 반도체가 세상을 지배하는 건 시간문제라는 평가가 적지 않다. 코로나 위기에도 한국경제가 버틸 수 있었던 건 반도체와 석유화학, 자동차 등 주력 제품의 수출 실적이 증가한 덕분이다. 지난달 511억9000만 달러를 기록한 수출액 중 20%인 93억4200만 달러가 반도체 수출액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치열해지는 반도체 패권다툼에서 생존하기 위해선 공격적인 투자가 필수지만 삼성은 현재 총수 부재라는 최악의 경영공백 사태를 맞고 있다. 조단위 자금이 투입되는 반도체 설비투자는 오너의 과감한 결단 없이 이뤄지기가 쉽지 않다. 이재용 부회장이 자리를 비운 현재 삼성전자는 미국에 19조원 규모의 파운드리 공장 증설 제안서를 제출했지만 4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부동의 1위에 오르기까지 과감한 결단으로 기회를 선점했던 과거의 삼성과 사뭇 다른 모습이다.
오너의 과감한 투자결정과 뚝심이 얼마나 중요한 지 새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미국과 중국이 국가 차원에서 반도체 패권다툼을 벌이고 있는 사이 삼성전자는 수장을 잃은 채 나홀로 사투를 벌이고 있다. 정부가 한국판 뉴딜을 외치며 반도체 산업을 키우겠다고 외쳐봤자 이를 실행하는 건 결국 기업이다. 그 중심엔 총수 부재의 삼성전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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