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때 ‘경기가 침체기에 접어들면 물가가 하락하고, 경기가 호황이면 물가가 상승한다’는 것이 경제 상식으로 통했다. 소득 오름세가 줄어드는 경기 침체기에 국민은 소비를 줄이고, 기업은 안 팔리는 상품 가격을 올리기 어렵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 같은 상식을 벗어난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1970년대 두 차례 석유 파동(oil shock)은 전 세계적인 경기침체(stagnation)와 물가상승(inflation)을 동시에 불렀다. 원자재 등 주요상품의 가격이 급등하는 총공급 충격으로 경기 침체와 함께 물가도 상승하는 전형적인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 현상이었다.
제1차 석유 파동은 1973년 이집트·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제4차 중동전쟁이 도화선이 됐다. 미국이 이스라엘에 무기를 지원하자 이집트 등이 속한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이에 반발해 석유를 무기화했다. 미국 등 이스라엘과 친밀한 국가에 석유 수출을 금지했고, 이듬해인 1974년1월1일 유가를 전년 10월의 4배 가까이 올렸다.
제2차 석유 파동 기간인 1978년12월과 1980년7월 사이에는 유가가 약 2.4배 급등했다. 이번에는 이란이 사태의 주범이었다. 1978년10월 혁명으로 팔레비 정권을 무너뜨리고 권력을 잡은 호메이니가 전 국왕의 망명을 도운 서방 국가에 석유 수출 중단으로 보복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두 차례의 파동은 석유 수출을 재개한 이후에도 한동안 영향이 이어졌다. 세계 각국은 생산비용이 상승하면서 인플레이션이 가속화했고 성장률이 둔화됐으며 무역수지는 악화됐다. 그야말로 국제 금융과 통화 질서를 크게 흔들며 세계 경제를 휘청거리게 만든 일대 사건이었다.
우리나라는 당시에도 해외 의존도가 높아 스태그플레이션 현상이 나타났다. 1975년 소비자 물가는 전년 대비 24.7% 상승했으며, 국제수지는 18억9000만달러 적자를 기록했다. 이에 정부는 물가 안정을 위해 1974년 1월 ‘국민생활의 안정을 위한 대통령 긴급조치’를 단행하며 성장보다 안정을 우선하는 긴축정책을 시행했다. 자금수요를 억제하는 동시에 자금운용의 효율성을 높이려는 통화금융정책을 추진했다. 산업적으로는 중화학공업을 본격 육성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여러 금융기관이 설립됐다. 정부는 1974년 증권 투자를 대중화할 목적으로 국내 최초의 증권투자신탁전업회사(현 한국투자신탁운용)를 설립했다. ‘신용보증기금법’ 제정으로 1976년에는 기업의 채무보증능력을 키우기 위한 신용보증기금이 만들어졌다. 같은 해 중장기 상업차관을 도입할 수 있도록 ‘종합금융회사에 관한 법률’에 근거해 한국종합금융(2002년 퇴출)이 설립됐다. 자본재수출과 해외투자 및 해외자원 개발을 전담할 특수은행으로 한국수출입은행도 출범했다.
2차 석유파동이 시작되면서 국제유가가 급속히 상승해 인플레이션 우려가 증대했다. 정부는 총수요를 관리하고 통화 팽창을 억제하기 위해 수출과 투자에 대한 전략을 재검토했다. 동시에 경제안정화종합대책으로 생활필수품 수급을 원활히 하고 관세인하 등을 통해 가격을 안정시키고, 재정긴축을 통해 재정수지를 개선해 통화환수를 추진하고, 정책금융을 개선하고자 했다. 정책적 필요성이 적은 자금을 일반자금은 금융기관에 자율적 운용에 맡기되, 장기시설자금 및 장기운전자금을 공급하는 민간 장기 설비금융기관으로 한국장기신용은행을 설립했다.
결국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 경험은 중앙은행의 역할 가운데 물가안정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또 1990년대 세계 중앙은행에 물가안정목표제가 확산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한국은행도 1998년 물가안정목표제와 금리중시 통화정책 체계를 도입했다.
요즘의 물가 오름세는 석유 파동시기에는 못 미치기 때문에 물가충격이 크지 않아 우리 경제가 스태그플레이션에 진입할 가능성이 낮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는 한국은행이 물가 안정을 최우선시하겠다고 강력한 의지를 밝힌 것과도 맥이 닿아 있는 얘기다. 지금 물가상승률을 끌어내릴 해법을 찾기 어려운 이유는 자칫 긴축정책을 취했다가 경기 침체를 부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금리 인상 등 대책뿐 아니라 여러 부작용을 보완할 소비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후원하기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추천해요
좋아요
감동이에요
화나요
슬퍼요
추천해요0
좋아요0
감동이에요0
화나요0
슬퍼요0
기사제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