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와 월드컵 열기에 가려져 있었지만 이달 8일 주목해야 할 소식이 있었다. 국립환경과학원등이 진행한 가습기살균제 관련 연구에서 가습기살균제 주요 성분인 CMIT/MIT가 호흡기를 통해 폐에 도달해 폐질환을 일으킬 수 있음이 입증됐다는 소식이다. 이로써 피해자가 4000명이 넘고 사망만도 1700명 넘게 발생한 가습기살균제 사건 손해배상 소송도 판세가 뒤집힐 가능성이 커졌다.
가습기살균제 주요 성분에는 PHMG와 CMIT/MIT의 두 가지가 있다. 이 중 옥시 제품에 쓰였던 PHMG의 폐질환과 인과관계는 입증이 되었다. 그래서 옥시는 관련 대표자가 업무상 과실치사죄로 중형을 선고 받았고 피해자들에게 약 3000억 원 넘게 개별 배상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SK케미칼(이하 ‘SK’)과 애경 제품에 쓰였던 CMIT/MIT와 폐질환 간의 인과관계는 확실치 않았다. 그래서 SK와 애경은 피해자 배상에 소극적이었다. 실제로 민사소송 1심에서 피해자들이 패소했고 관련 형사 재판에서도 SK와 애경 임직원에게 무죄가 선고 됐다. 그런데 이번 연구 결과로 최소한 민사 소송만큼은 뒤집힐 수도 있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 반전에 앞서 필자는 8월10일과 9월7일 두 차례에 걸쳐 ‘시작부터 잘못된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법’이란 칼럼에서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법의 문제점을 살폈다. 가습기살균제 사건에는 세 부류의 가해자가 있다. SK 같은 원료물질사업자와 원료 물질의 안전성 검사를 면제하거나 부실하게 통과시켜 준 정부, 그리고 원료물질로 가습기살균제를 제조해 판매한 옥시·애경 같은 가습기살균제사업자가 그것이다. 3자 간 공동불법행위이므로 이들이 각자 1:1:1의 동등한 비율로 피해자들에게 배상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
그런데 2017년 제정된 피해구제법은 책임자에서 정부를 제외시켜 버렸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원료물질사업자의 책임을 가습기살균제사업자에 비해 고작 25%만 인정해 실질적으로 SK에게 엄청난 특혜를 주고 말았다. SK는 유공 시절에 가습기살균제를 최초로 개발했고 인체에 무해하다며 광고해 이를 대중화 시킨 장본인이다. PHMG와 CMIT/MIT 두 가지 원료물질 모두 공급해서 이득도 가장 크게 얻었다. 그래서 책임도 가장 크게 지는 것이 마땅한 데도 알 수 없는 이유로 책임비율이 터무니없이 낮게 매겨졌다. 이렇게 불공평하니 법의 권위가 설 리가 없다. 그래서 피해구제법이 시작부터 잘못됐다는 것이다.
나중에 이 법 제정을 주도했던 민주당 한정애 의원이 환경부 장관에 취임해 추진했던 민간 조정도 결렬되고 말았다. 조정위원회조차도 불공평한 책임 비율을 그대로 고수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니 애초부터 조정이 성사될 리도 없었을 것이다. 현재는 피해구제분담금 추가 출연도 조정위원회 활동 연장도 다 오리무중 상태로 보인다.
사태가 이렇게 된 데 가장 큰 책임자는 피해구제법 제정을 주도했던 민주당이 아닐 수 없다. 다만 최근에 유의미한 행동을 보이기는 했는데 11월18일 박주민 등 민주당 의원 주도로 지난 9월 활동을 종료한 가습기살균제사건 특별조사위원회(이하 ‘특조위’)의 권고사항에 대한 이행촉구 결의안을 발의했기 때문이다.
특조위의 가습기살균제 관련 권고사항은 26건인데 국회 관련 입법 사항도 포함되어 있다. 다만 화학제품안전법·중대재해처벌법 개정과 기업이 안전관리를 실사하고 이를 공표하도록 하는 ‘(가칭)기업실사의무화법’ 제정 같이 소관 부처가 직접 발의해야 할 사항이 대부분이긴 하다. 그러나 국회 단독으로도 입법 발의가 가능한 것도 있는데 환경피해로 인한 업무상과실치사상죄 공소시효 연장이다.
공소시효는 원칙적으로 범죄행위가 종료한 때로부터 기산하는데 업무상과실치사상죄 공소시효는 7년으로 비교적 짧다. 반면에 환경피해는 이보다 훨씬 뒤에 가시화될 수도 있다. 그래서 공소시효가 지난 후에 피해가 가시화 되어 관련자 처벌이 불가능하면 해당 기업은 배상에 소극적이 될 수밖에 없다. 공소시효 관련은 아니지만 SK케미칼과 애경이 자발적 배상에 소극적인 이유도 사실은 형사 재판에서 임직원들에게 무죄가 선고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래서 공소시효를 대폭 연장해 관련자 처벌 가능성을 열어 두어 기업으로 하여금 자발적 배상에 나서게 하면 궁극적으로 피해자 구제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런데 특조위 권고가 나온 지 벌써 3개월 넘게 지났지만 민주당 어느 의원도 업무상과실치사상죄 공소시효를 연장하는 형법 개정안을 발의하지 않고 있다. 다른 권고 대상 법안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피해구제법상 책임 비율부터 정상화시켜야 하는데 고작 특조위 권고 사항 이행촉구만 하고 있을 뿐이다.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법 제정을 주도한 것은 민주당이었고 2017년 8월 문재인 전 대통령이 직접 피해자를 면담하기도 했다. 문 대통령 임기 중에 해결이 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지난 5년을 돌이켜 보면 민간 조정도 결렬되고 가시적인 성과는 별로 없었다. 그래서 과반수 의석을 가졌으면서도 가습기살균제 관련 필요한 입법은 안 하고 생색만 내는 민주당의 처사가 이해하기 어렵다. 회피로만 일관하는 SK에 대해서도 조만간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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