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며칠 후 진무가 진사왕에게 달려와 고했다.
“고구려 왕은 이미 율구에서 수군과 합류했다 합니다. 조만간 동래로 나아갈 것 같습니다.”
진사왕은 뱃속부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우리와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군사를 일으켜 산동반도를 도모하겠다? 고구려는 군사가 백만이라도 된단 말이냐. 담덕이 스스로 제 무덤을 파는구나. 자신감이 과하면 오히려 화가 되는 법이거늘.”
병관좌평도 왕의 생각에 동의했다.
“고구려가 패하 이서를 공격한 것은 연나라를 공격하기 전에 우리의 기세를 꺾기 위함이었나 봅니다.”
진사왕이 기염을 토했다.
“지금 즉시 달솔 진가모에게 패하 이서에 주둔한 고구려군을 공격하라고 해라. 짐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지원에 나설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우리 백제의 무서움을 보여 주리라.”
고무가 이끄는 선단이 앞서 나갔다. 뒤를 이어 광개토태왕의 모함이 돛에 바람을 가득 안고 포구를 떠났다. 갈매기가 승전을 기원하기라도 하는 듯 배를 따라 날며 우아한 날갯짓을 선보였다.
율구에서 출항한 고구려 선단은 장산곶을 거쳐 곡도(鵠島·백령도)에 도착했다. 동래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었다.
곡도에 하선한 태왕은 군사들을 해변에 집결시켰다. 3만에 이르는 병력이 대열을 갖추니 온 섬을 뒤덮을 만했다.
광개토태왕은 선단을 3대로 나누었다. 제1함대는 80척의 배에 1만2천의 군사로 태왕이 직접 이끌었다. 제2함대는 60척·9천의 병력으로 고무가 통솔했다. 제3함대 역시 60척·9천의 병력으로 남부사자 해진압이 지휘했다.
태왕은 여러 장수를 모아 놓고 작전 회의를 했다.
“기습의 묘를 살리기 위해서는 백제 초계선의 눈을 속여야 하오.”
“우리는 대선단이라 저들의 눈을 속이기 어렵습니다.”
걱정하는 해진압에게 돌아온 태왕의 답은 의외였다.
“그래서 이번에 전선을 새로이 건조하면서 진(晋)의 상선을 본뜨게 한 것이오.”
장수들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쳐다봤다.
“매년 이 시기가 되면 진의 대규모 상단이 곡도와 용유도를 거쳐 미추홀로 들어가게 되어 있소. 우리가 동진(東晋)의 깃발을 달고 상단으로 위장하여 접근한다면 백제의 초계병을 속일 수 있을 것이오.”
장수들은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태왕은 이어서 명령을 내렸다.
“고무 장군은 전선을 이끌고 우도로 가서 진의 상선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시오. 해진압 장군은 전선을 진의 상선으로 위장하여 용유도로 가시오. 짐은 함대를 이끌고 연안에서 멀찍이 떨어져 뒤를 따르겠소.”
고구려 선단은 함대별로 곡도를 떠나 남쪽으로 선수를 돌렸다.
진사왕이 친정한다는 소식을 들은 진가모는 청목령에 웅크리고 있을 수 없었다. 그는 도압성을 수복할 계획을 세우고 주변 성읍의 군사를 부소갑(扶蘇岬)으로 집결시켰다.
고구려 장군 우나굴이 이끄는 주력부대는 한홀(漢忽)에 머물고 있었기에 도압성에 남은 고구려군은 3천이 넘지 않았다.
진사왕이 도착하기 전에 성을 함락해야 했기에 진가모는 전군을 독려해 도압으로 달려갔다. 성 앞에 도착하자마자 잡아먹을 기세로 달려들었지만 수비가 견고하여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해가 질 때까지 처절한 전투가 이어졌다. 성벽을 오르던 백제 군사가 시석(矢石)에 맞아 떨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백제군의 사상자가 크게 늘었다. 어둠이 짙어지면서 진가모는 어쩔 수 없이 군사를 거두었다. 마음이 조급한 그에게는 철벽같은 성곽이 야속하기만 했다.
공성전이 시작된 지도 사흘이 지났다. 진가모가 막사에서 눈을 떴을 때 부장이 급히 뛰어 들어와 보고했다.
“이상한 일입니다. 도압성이 텅 비어 있습니다.”
놀라서 벌떡 일어난 진가모는 성으로 달려갔다. 성문은 열려 있는데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군사 몇을 보내어 확인한 결과 성안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없었습니다.”
“저들이 겁을 먹고 달아난 게 분명하다.”
진가모는 굳은 얼굴을 풀고 크게 웃었다.
“어찌 이리 금세 사라진단 말입니까.”
“부장의 말을 듣고 보니 이상하긴 하다. 척후병의 말에 따르면 사람은커녕 가축 한 마리, 곡식 한 자루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 야음을 틈타 달아나면서 이리 깔끔하게 사라지기는 쉽지 않을 텐데.”
의아하긴 했지만 당장 진의를 알 방법은 없었다. 진가모는 애써 의구심을 떨치며 성문으로 들어갔다.
백제군은 여세를 몰아 수지의 일대를 장악한 후 굴어압으로 북상했다. 이곳의 고구려군도 다르지 않았다. 처음에는 격렬히 저항하다가 며칠 지나지 않아 한밤에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힘들이지 않고 여러 성을 탈환한 진가모는 자만에 빠졌다. 이대로 간다면 단숨에 평양성까지 내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한편, 도성을 출발한 진사왕의 군대는 부소갑에 도착했다. 이 소식을 들은 청목령의 사첨이 바로 뛰어와서 왕을 맞았다.
“전황은 어찌 되어가고 있소?”
진사왕의 물음에 사첨이 대답했다.
“진가모의 군사가 도압성을 함락시키고 굴어압까지 손에 넣었습니다.”
“대장군의 용맹은 견줄 자가 없구려.”
승전을 거듭하는 가운데도 사첨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고구려 군사의 퇴각이 너무도 정연하고 신속합니다. 의도적으로 아군을 내륙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듯합니다.”
진사왕은 귀담아 듣기는커녕 오히려 꾸짖었다.
“지나친 생각이오. 이 모두가 대장군의 뛰어난 용병술 덕분임을 어찌 부정하려 드는가.”
왕의 질책에 사첨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부소갑을 떠난 진사왕은 치악성으로 향했다. 진가모의 군대가 다지홀을 우회하여 우차탄홀, 조파의(租波衣·봉산)를 거쳐 한홀로 가는 길을 택했기에 왕은 치악을 거쳐 다지홀을 제압하고 조파의에서 진가모의 군대와 합류할 계획이었다. 한홀에서 고구려 장수 우나굴의 군대만 격파하면 패하 이서를 모조리 탈환하는 것이었다.
진사왕은 3만의 군대를 이끌고 어둠을 틈타 치악성으로 다가갔다. 해가 떠오를 무렵에는 백제군이 성 주위를 새카맣게 둘러싸고 있었다. 그런데 치악성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진사왕이 공격 명령을 내렸다. 병관좌평 진무는 군사들을 독려하여 일제히 성벽을 오르게 했다. 백제 군사가 사다리와 갈고리를 이용해 성벽을 반쯤 오를 때까지도 성에서는 무반응으로 일관했다. 고구려군이 이미 성을 비우고 달아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때 백제 군사들의 머리 위로 펄펄 끓는 기름이 쏟아져 내렸다. 뜨거운 기름을 뒤집어쓴 군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떨어졌다. 이를 보고 독이 오른 진사왕은 계속해서 성벽에 군사를 투입했다.
뒤이어 올라간 군사들도 위에서 날아오는 불화살을 맞고 불덩이가 되어 떨어졌다. 한 식경이 지나자 성벽 아래는 불타는 시신으로 가득했다.
많은 희생을 치르고도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자 진사왕은 머리끝까지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저런 작은 성 하나 어쩌지 못하고 이리 시간을 끈단 말이오.”
진무는 왕의 책망을 받고도 흔들림이 없었다.
“성의 방비가 만만치 않습니다. 무모하게 밀어붙이다가는 희생만 늘어납니다.”
“대장군의 군대가 승승장구하고 있는데 왕군(王軍)이 보조를 맞추지 못한다면 어찌 체면이 서겠소.”
진사왕이 막무가내로 나왔기에 좌평으로서도 대꾸할 말이 없었다.
진무는 일단 군대를 물리고, 군사들에게 모래주머니를 만들게 했다. 치약성은 다시 정적에 휩싸였다. 황량한 들판에 모래바람이 불었다. 성벽 주변에는 불에 탄 시신이 나뒹굴고 있었다.
진사왕의 독촉이 심해지자 백제군은 제대로 준비도 끝내지 못한 채 쫓기듯이 성곽으로 다가갔다. 어둠에 잠식당한 성 위로 비바람이 흩뿌렸다. 성벽 가까이 접근한 군사들은 모래주머니를 쌓아 올렸다. 성벽 높이 3분의 2쯤 되는 지점에 다다랐을 때 준비한 주머니가 동났다.
군사들이 머뭇거리자 이를 본 진사왕이 진무를 불러 호령했다.
“고구려군이 눈치 채면 만사가 수포로 돌아가오. 급한 대로 성 주변에 널린 시체들을 쓰시오.”
진무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어찌 나라를 위해 희생한 군사의 시신을 함부로 다룬단 말인가.
좌평은 왕의 잔혹함에 치를 떨었다. 하지만 왕명은 지엄한지라 차마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짓을 수하들에게 시켜야 했다. 시체를 쌓아 올리는 군사들의 입에서 탄식과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지옥 같은 밤이 지나고 날이 밝았다. 치악성 앞에는 어느새 성벽 높이의 언덕이 솟아 있었다.
진사왕은 호위 군사들을 거느리고 그 위로 올라갔다.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손·발·머리가 밟히기도 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언덕에 올라서자 치악성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곳에서 활을 쏘면 성안의 고구려군을 쉽게 제압할 수 있겠구나.”
왕은 발작하듯 웃음을 터뜨렸다. 진무는 그것이 발아래 놓인 시신들의 원망처럼 들려 귀를 틀어막았다.
진사왕을 호위하고 있던 은솔(恩率) 사지모(沙支謀)가 아뢰었다.
“성안이 이상하게 조용합니다.”
그 말을 듣고 놀란 진무가 성 쪽을 자세히 살폈다. 은솔의 말대로 괴이할 정도로 적막했다.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진무는 척후대를 보내 성내를 살피게 했다.
성벽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던 군사들이 한참 후에야 성문을 열고 나왔다.
“기묘한 일입니다. 사람이라고는 한 명도 눈에 띄지 않습니다. 모두 어디로 증발이라도 한 듯 성이 텅 비어 있습니다.”
좌평은 허탈하여 다릿심이 풀렸다. 이 빈껍데기를 차지하기 위해 아군의 시신까지 훼손하는 소동을 벌인 것인가.
치악성을 차지한 진사왕은 바로 다지홀로 진격했다. 승리감에 도취한 왕은 전우의 시신을 훼손한 일로 백제 장졸의 사기가 땅에 떨어졌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고구려 장군 우나굴은 한홀에 머물면서 백제군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고구려군이 지시에 따라 후퇴를 거듭하는 가운데 양로로 진격한 백제군은 굴어압과 치악에 이르렀다.
고구려군이 성을 내주고 물러난 것은 백제군의 주력을 내륙 깊숙이 끌어들이기 위한 광개토태왕의 계책이었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백제군에 맞서 싸워야 했다. 더 물러났다가는 패하 이서의 땅을 모두 백제에게 내줄 수도 있었다.
우나굴은 패하 이서에 흩어져 있는 군사들을 조파의로 집결시켰다. 그 규모가 본진 군사 2만을 포함하여 무려 3만 명이나 되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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