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우리 민족이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해 한국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린 날인 3·1 운동 100주년을 맞는 해다.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74년째 되는 해이기도 하다. 일제시대 수많은 독립투사들의 피와 목숨으로 일궈낸 독립을 통해 자유 대한민국의 토대가 만들어졌다. 독립투사들의 정신을 이어받은 후손들은 특유의 민족성을 무기로 우리나라를 단기간에 선진국 대열에 합류시키는 기적을 이뤄냈다. 하지만 일제 치하에서 벗어난 지 거의 한 세기가 흐른 현재 여전히 우리 사회 깊숙이 일제의 잔재들이 남아 있다. 일제의 잔해들은 우리민족의 애국애족 정신을 좀먹으며 우리 역사에 큰 오점을 남기고 있다. 사회 곳곳에서 일제의 잔재를 청소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지만 아직은 열악하기만 한 게 사실이다. 국민 모두가 위대한 민족영웅들의 뜻을 이어받아 하나가 된 모습으로 일제 잔재 지우기에 동참해야하는 이유다. 스카이데일리가 이번 이슈포커스 주제로 ‘일제 망령과 싸우는 민족 영웅들’을 선정하고 독립운동가 후손 및 개인·단체들의 애국애족 활동을 세 편에 걸쳐서 보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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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취재팀=이철규 부장|조성우·강주현 기자]대한민국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린 3·1운동이 100주년을 맞이한 현재 아직 우리 사회 곳곳에 친일의 잔재가 뿌리 깊게 남아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힘썼던 선열들의 뜻을 간직하며 활동하고 있는 이들이 사회 곳곳에 여럿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 중에는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활발히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도 속해 있다.
우리나라 역사의 암흑기인 일제 강점기 시절, 수많은 독립 열사들은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서슬퍼런 총칼 앞에 섰다. 그들의 피와 땀 그리고 목숨이 마중물이 돼 지금의 자유 대한민국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우리나라가 아직까지 독립을 이뤄내기 위해서는 일제의 망령을 지워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선조들의 뜻을 이어받아 완전한 독립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조선의열단 부모를 둔 3선 국회의원…“친일 잔재 뿌리 뽑아야”
김원웅(남·74) 전 항일독립선열선양단체연합(이하·항단연) 회장은 14대·16대·17대 국회의원을 지낸 원로 정치인 중 한 사람이다. 현재는 강원도 인제에서 사회적협동조합 허준약초학교를 개설해 운영해오고 있다. 국회의원 시절부터 당찬 발언과 민족주의적 행보로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된 김 전 회장은 조선의열단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김근수·전월선 선생의 장남이다.
지난 1912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김근수 선생은 일본에 나라가 뺏길 위험에 처하자 중국 만주로 넘어가 독립운동 활동을 전개했다. 조선의열단에 합류한 김 선생은 연락원으로 활동했으며 1941년에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에 합류해 선전 및 정보수집활동을 벌였다. 1923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난 전월선 선생은 16세가 되던 해 중국 계림으로 건너가 조선의용대에 입단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곳에서 일본군에 대한 정보 수집 등 공작활동을 전개했다.
김 전 회장은 부모님에 대해 ‘강직하신 분들’이라고 정의했다. 어린 나이에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해 숱한 어려움을 극복한 인물들이라며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그의 표정에는 훌륭한 부모님을 둔 자랑스러움과 자신도 부모님의 뜻을 이어받아 애국 활동을 이어가겠다는 결연함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아버님과 어머님 모두 어린 나이에 독립운동에 뛰어드셨어요. 아버님은 조선의열단에서 활동을 하셨고 어머니는 조선의용대에서 활동을 하셨죠. 이후에는 광복군에서 같이 활동을 하셨어요. 두 분 모두 생사를 오가는 치열한 항일 운동을 전개하셨죠. 아버지는 일본 순사에게 붙잡혀 갖은 고초를 겪기도 했죠”
김 전 회장은 부모님들의 결혼에 백범 김구 선생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전했다. 광복군에서 만난 두 사람을 김구 선생이 직접 결혼까지 주선했다는 전언이다. 이후 광복 직전 해인 1944년 김 전 회장을 낳았다.
“아버님은 북쪽에서, 어머님은 남쪽에서 주로 활동을 하셨기 때문에 아는 사이가 아니었어요. 이후에 광복군에서 활동하게 됐는데 백범 김구 선생님이 두 분의 결혼을 주선하셨죠. 그래서 1942년에 두 분이 결혼을 하셨고 저는 독립 직전 해인 1944년 중국 충칭에서 태어났죠. 당시 광복군에서 애기가 태어나기 힘들었는데 제가 태어나면서 축제 분위기가 조성됐다고 해요. 저도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성장했어요”
김 전 회장은 최근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에 긍정적인 입장을 표했다. 남성 독립운동가에 비해 알려진 바가 적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겸손한 입장을 전하기도 했다.
“최근에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저희 어머님에 대한 관심도 많아졌어요. 실제로 지난해 국립대전현충원 8월의 독립운동가로 저희 어머님이 선정되기도 했죠. 그런데 어머님이 선정되신 것에 대해 의문이 생겼어요. 저희 어머님보다 더 오래 활동하신 분들이 많거든요. 그래서 문의를 했더니 여성 스스로가 독립운동에 투신한 사례는 굉장히 드물다는 답변을 받았고 그제야 어머님의 8월의 독립운동가 선정을 이해하게 됐죠”
김 전 회장은 독립운동가들과 그 후손들에 대한 열악한 처우를 매우 아쉬워했다. 특히 독립운동가를 비롯한 그 후손들이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는 데 반해 오히려 친일파와 그의 자손들이 좋은 대우를 받으며 목에 힘을 주고 살아가는 것에 대해 아쉬움을 내비췄다.
“어렸을 적 아버님이 독립운동가 동지의 장례식을 다녀오시고 펑펑 우셨어요. 당시에는 집에서 대부분 장례를 치뤘는데 절을 올릴 자리가 없어서 문턱에 이불을 깔고 절을 하셨다고 말씀 하셨죠. 특히 그분이 돌아가시면서 ‘우리 집안에는 더 이상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이 나와서는 안된다’다는 유언을 남기셨대요. 그래야 후손들이 잘 살수 있다면서 말이죠”
“그런데 이런 대우가 아직까지 지속되고 있어요. 많은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하면 각 종 독립행사에 참여하고 싶지 않다는 입장을 피력해요. 단상 위에서 상 받는 사람들 중에 친일파 후손들이 있고 정작 상을 받아야하는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단상 아래 있게 되기 때문이죠. 독립운동가 후손들에게 국가가 지원하는 것 역시 다른 분야에 비해 부족한 것이 현실이에요”
김근수·전월선 선생의 뜻을 이어받은 김 전 회장은 3선 국회의원을 지내는 동안 민족의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김 전 회장은 국회의원 임기 종료 후 항단연을 조직하는 등 독립투사들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지난 2011년 약 30개 단체가 모여 항단연을 조직하게 됐어요. 당시 각 단체들이 주도하는 민족주의 활동이 많았는데 이를 통합해 원활하게 추진하고자 하는 조직이죠. 여러 단체 회장들이 저를 항단연 회장으로 추천했어요. 당시 가장 젊고 당차게 싸울 수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항단연 회장을 8년간 역임을 하며 다양한 민족주의 활동을 전개해 나갔죠”
김 전 회장은 독립운동가들이 꿈꾸던 나라가 아직까지 완성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김 전 회장은 친일 잔재 청산과 남북통일이 이뤄져야 그들이 원했던 나라가 만들어 진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독립운동가들이 꿈꾸던 나라야 말로 청년들의 미래를 펼칠 수 있는 나라가 될 것이라고 피력했다.
“많은 독립투사들이 꿈꾸던 나라는 분단된 나라가 아니에요. 친일의 잔재가 존재하는 나라도 아니죠. 저는 역사 자체가 부력이 있다고 생각해요. 진실은 어느 순간 뜬다는 것이에요. 이를 우리가 눈여겨 봐야하고 이를 통해서 투사들이 원하는 나라를 만들어야 해요.”
“다른 나라에서 봤을 때 아직까지 우리나라가 ‘애국의 표본’이 되는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로잡아 애국의 표본이자 대상이 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한 활동을 전개할 예정이에요. 민족에 바탕을 둔 광활한 시야를 배양하기 위한 활동도 진행할 계획이에요”
의암 유인석 선생 뜻 이어받은 평범한 공무원 “부귀영화보다는 자긍심”
을미의병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유인석 장군은 평생을 의병활동에 몸 바친 인물이다. 유인석(이하·의암) 장군은 춘성군 남면 가정리에서 출생했으며 제천에서 거병해 친일 개화파 관리인 단양군수 권숙과 청풍군수 서상기를 참수해 경종을 울렸다. 충주성을 빼앗기도 했다.
의암은 이후 연해주로 망명해 이상설과 함께 하나의 조직체로 조직을 통일하고 연해주와 블라디보스톡을 중심으로 항일운동을 지속하다 1915년 72세로 타국에서 사망했다. 의암의 아들인 유해동 선생은 17세부터 아버지를 따라 중국과 러시아를 오가며 독립운동에 몸을 바쳤다.
유연창(남·80) 선생과 유경균(남·48) 씨는 의암의 증손과 고손이자 유해동 선생의 아들과 손자다. 이들은 일제의 만행에 저항한 선조들의 활동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제가 저지른 만행에 대해서도 세부적으로 전달했다.
“독립운동으로 피해를 본 것은 하나둘이 아니지만 대표적인 것이 의암이 1900년대 초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 일본군이 저지른 몰살작전이었어요. 일본군은 의암의 초가집을 둘러싸고 불을 질렀죠. 그리고 일본군은 화재를 피해 나오는 남자들을 총으로 쏴 죽였어요. 다행히 유해동 선생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지만 의암의 큰 조카는 목숨을 잃고 말았죠”
하지만 독립운동으로 인해 가세는 급격하게 기울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아들이 독립운동에 몸을 바침에 따라 병조판서까지 지냈을 정도로 부유했던 집안이 한순간에 가난의 나락으로 빠지게 됐다.
“유해동 선생은 늘 말씀이 없으셨으며 곧은 성격으로 가난보다는 나라 걱정이 먼저였던 분이셨어요. 부귀영화보다는 자긍심을 중요하게 생각하셨죠. 하지만 그 신념 때문에 결국 가세가 기울었어요. 의암은 율곡의 학풍을 잇는 화서학파의 마지막 적통이었지만 독립운동을 하다 보니 그의 후손들은 제대로 교육을 받을 수 없게 됐죠. 하지만 선조들은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이다’고 겸손함을 잃지 않으셨죠”
선조들의 뜻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유연창 선생과 유경균 씨는 의암기념관을 비롯해 의암의 정신을 기리는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특히 의암학회를 통해 그의 사상과 문집을 번역하고 있으며 관련 세미나도 진행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들은 독립운동가 집안에 대한 선입견에 아쉬움을 드러냈다. 오히려 이런 선입견이 향후 애국에 걸림돌이 될까 우려의 목소리도 표시했다.
“지금은 국가에서 비석을 세우고 기념관을 설립하는 등 다양한 지원이 이뤄지고 있지만 그전에는 묘지를 관리하고 보존하는 일조차 쉽지 않았어요. 사비를 투입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죠. 다행이도 지금은 의암선생의 뜻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힘을 얻고 있어요”
“독립운동을 하는 분들은 자신은 물론 집안을 돌볼 시간이 없다보니 후손들이 여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에요. 반면 친일파의 후손들은 유명 대학도 다니고 지금도 여유롭게 살고 있죠. 사실에 가깝긴 하지만 독립운동을 하면 못 산다는 인식이 일반화되는 현실이 아쉬워요. 더 이상 이런 인식이 확산되지 않도록 제대로 된 지원과 역사적 사실 규명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조성우 기자 / 행동이 빠른 신문 ⓒ스카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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