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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라 쓰고 반일‧반미‧친북으로 읽다
우리나라에선 ‘민족주의’라 쓰고 ‘반일’ ‘반미’로 읽는 편이다. 냉전시대가 끝나자 ‘친북’도 민족주의 범주에 들었다. 외국인 눈엔 일찍부터 이런 경향이 분명해 보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2006년 10월호 한국논단에 당시 산케이신문 서울 특파원 구보타 루리코가 기고문 ‘왜 한국영화 히트작들은 한결같이 반미·반일·친북일까’에서 이런 점을 짚었다.
민족이란 네이션(nation)의 일본 번역어다. 20세기 초 우리나라와 중국에 들어와 각각의 국어가 됐다. 민족국가‧민족주의‧민족성‧민족문학 등 동북아시아에선 서구 본고장과 달리 혈통 공동체 이미지가 강하다. 민(民)·족(族)이라는 한자 조합 자체가 그것의 반영이자 심화의 촉진제였다. 19세기 중반 이래 동북아 역사란 서구에 압도된 시간이었기에 민족주의는 저항의 핵심 논리로 작동했다.
민족국가의 원어는 ‘네이션 스테이트’(Nation State)다. 가치공동체로서의 측면을 살린다면 ‘국민국가’가 더 적절한 표현일 수 있지만 우리나라와 중국에선 여전히 ‘민족국가’가 널리 통용된다. 민족국가·근대국가 다 같은 말이다. ‘주권재민’의 헌법을 가진 법치국가 체제로서 공화국이나 입헌군주국 형태로 존재하는 국가다.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애국‧애족은 흥행불패
40년 전 베네딕트 앤더슨(1936~2015)은 민족을 ‘상상의 공동체’(Imagined Community)라고 규정했다. '상상의 공동체'를 제목으로 한 그의 저서는 전 세계 인문학 연구자들의 필독서다. 이 책에 따르면 18세기 이래 인쇄술의 발달로 대량 생산된 활자매체를 통해 다수의 익명 독자가 생겨나며 ‘우리’ ‘우리나라’라는 감각을 키웠다. 이들 독자는 근대자본주의의 성장과 더불어 ‘시장 공동체’, 나아가 ‘정치(운명)공동체’로 발전한다.
근대적 독자를 양성한 신문‧잡지 등 활자매체의 주요 콘텐츠는 문학이었다. 특정 언어로 된 시‧소설‧산문 등이 언어 근대화(국어 성립)에 결정적 역할을 하면서 문학은 민족의 내면을 만드는 기제로 작용했다. 문학이 했던 역할을 오늘날엔 주로 영화나 드라마가 한다.
문학이 대중매체의 읽을거리에서 출발해 시대상과 시대정신을 담아내는 틀로 성장했듯 영화도 그렇다. 다만 영화 제작엔 워낙 큰 자본이 필요하기에 제작자의 예술적 의도만을 고집하기 어렵다. 상업적 성공 없이는 지속될 수 없는 산업이라 돈이 될 것인지 냉철하게 따져야 한다.
우리나라 관객의 수준이 높아진 만큼 구성이며 표현의 기술·기교 등 만듦새가 중요하지만 최근까지 흥행에 무엇보다 효과적으로 이용된 것은 민족주의 정서였다. 애국주의를 강하게 호소하는 작품을 국가 차원에서 지원하는 중국 영화 못지 않은 흥행 효과를 올린 것이다. 2010년대 이래 중국에선 ‘공산당의 항일 투쟁’을 전면에 내세운 드라마‧영화들이 풍미하더니 미‧중 대결구도 속에 ‘항미’ 기조로 대체됐다.
6‧25전쟁 당시 통일을 목전에 둔 시점에 1.4후퇴를 유발한 역사의 맥락을 중국공산당의 입장에서 그린 ‘장진호’가 그 대표적 사례다. 이 영화는 2021년 10월1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일 국경절 연휴에 맞춰 나와 중국 내 역대 최고인 57억7500만 위안(약 1조516억 원)의 흥행 수익을 올렸다. 속편도 대성공이었지만 해외에선 모두 철저히 외면당했다.
19세기 중반부터 중화인민공화국 성립까지를 ‘치욕의 세월’로 규정해 온 중국공산당의 공식 역사관이 중국산 대중서사와 교육 현장에 배어 있다. 2017년 시진핑 체제 2기 들어 중국몽이 기본 의식주 해결 상태를 말하는 샤오캉(小康)사회를 넘어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으로 확장됐으며 그런 방침이 영화‧드라마에 충실히 반영됐다. ‘애국주의’는 내부 모순을 무마하기에 편리한 도구다.
중국은 마침 그런 발전 단계에 있어서 그렇다지만 초고도산업사회로 접어든 우리나라에서 여전히 민족주의가 우세한 것은 특이한 현상이다. 우리의 민족주의는 일본을 절대악으로 규정해 식민지시대를 ‘수탈과 착취’의 시간으로만 기억하도록 강요한다. 2024년 현재 여전히 한글 작업 시 ‘일제시대’를 입력하면 ‘일제강점기’로 자동 변환된다.
반일‧반미 코드의 명암
반일과 반미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입장이다. 2002년 주한 미군의 업무상과실치사였던 효순‧미선의 사망이 ‘주한미군 철수’를 외치는 반미집회의 열기를 높였다. 2006년 1300만 이상의 관객이 모인 영화 ‘괴물’은 미군 기지에서 흘려보낸 독극물이 한강에 괴물을 만들어 냈다는 이야기다. 이 영화는 ‘미국이 곧 만악의 근원’이라는 매우 단순한 은유를 기본 설정으로 스토리를 풀어 간다.
반일을 기대하며 관심을 모으다 만 일본영화도 있다. 1973년 작품인 ‘일본침몰’은 동명의 SF소설을 영화화한 것인데 지각변동과 지진‧화산 분출 등으로 대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분투하는 일본인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렸다. 때마침 석유파동‧물가앙등 등에 직면한 일본 사회의 불안감과 맞물려 일약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일본 열도가 가라앉는 결말의 장면이 압도적이라 영화도 크게 히트했다.
그것의 현대적 리메이크판이 2006년 한국에 들어왔으나 총 관람객 47만 명에 그치고 말았다. 해양탐사대원인 주인공의 영웅적 분투로 일본이 침몰을 면했다는 내용의 수정판에 당시 구보타 특파원은 “침몰하지 않는 ‘일본침몰’이란 사기라고 여긴 것 같다”며 일본의 방위청‧소방청이 협력한 위기 관리나 시민 구출 등 현실감 있는 장면을 한국 매체들이 “군사대국화의 메시지를 여기저기 숨긴 정치 영화”(중앙일보 분수대)로 본 것에 놀라워했다.
반(反)외세‧민족 공조?… ‘실미도’ ‘그때그사람들’ ‘웰컴투 동막골’ ‘한반도’
북파 공작원을 다룬 ‘실미도’(2003)나 10.26을 그린 ‘그때그사람들’(2005)은 허구와 팩트가 뒤섞여 있다. 관련 역사를 잘 모르는 세대는 실화로 받아들이기 쉽다. 군인 출신 대통령들과 정부에 대한 나쁜 이미지 확산에 주효할 영화들이다.
‘웰컴투 동막골’(2005)엔 6·25전쟁에 참전한 미군이 순진무구한 남한 소녀나 호인인 북한 사람(군인)까지 무차별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이미지가 배어 있다. 미국의 이라크 공격을 연상시키는 비판 메시지도 번뜩인다. 2006년 화제작 ‘한반도’에서는 일본이라는 악에 맞서는 민족주의자의 활약이 돋보인다.
구보타 특파원은 한국논단 기고문에서 한반도의 영화 애호가로 “북한 (김정일) 장군님”을 꼽았다. 이어 헐리우드 영화부터 일본영화까지 방대한 컬렉션을 갖췄다고 들었다며 “인민에 대한 선전선동술도 영화 감상을 통해 많이 익힌 것 같다. 한국영화의 악역이 그 장군님의 적(敵)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는 게 정말 우연인가” 물었고 “그게 영화보다 더 무서운 이야기일지 모른다”는 문장으로 글을 끝맺었다.
‘파묘’의 반일(反日) 구조
대표적인 극장가 비수기인 3월 현재 장재현 감독의 영화 ‘파묘’의 인기몰이가 두드러진다. 개봉 1주일 만에 손익분기점인 관객수 330만 명을 돌파했으며 이미 600만을 넘었다. 영화는 거액의 돈을 받고 수상한 묘를 이장한 풍수사‧장의사‧무속인들에게 벌어지는 기이한 사건을 풀어 낸 미스터리 작품이다.
무당인 화림(김고은)과 화림을 따르는 법사 봉길(이도현)이 거액의 수고비를 약속하는 의뢰를 받고 미국 LA로 향한다. 초호화 저택에 살고 있는 의뢰인이 자기 아이를 비롯해 집안에 의문의 유전병을 앓는 사람들이 생기고 현대의학으로 치료가 어려운 상황이라며 화림에게 해결해 줄 것을 부탁한다.
영화는 기이한 병과 불길한 기운이 가득한 집안의 문제가 조상 묫자리에 있다 보고 묘를 파고 관을 들어낸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파묘 시의 굿‧장례 등 영화 속의 여러 소재와 설정 등이 모두 토속신앙에 기반해 있다. 여기에 접착력 뛰어난 반일정서가 한몫을 한다. 영화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이 역사적 비극과 치욕에 기인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나라를 팔아 대대손손 호의호식하는 친일파, 식민지기 조선민족의 정기를 끊고자 주요 명당자리에 쇠말뚝을 박았다는 믿음 등에 근거해 일제가 남긴 역사적 상흔을 무속신앙으로 단죄한다는 설정이다. 영화 속 주요 등장인물의 이름에서도 노골적 항일 기조가 드러난다.
흥행작 ‘암살’ ‘덕혜옹주’ ‘봉오동 전투’… 기대에 못 미친 ‘한산’ ‘리멤버’ ‘영웅’ ‘유령’
2015년 약 1300만 명이 관람한 ‘암살’의 흥행 비결은 작품성과 오락성의 적절한 결합에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김구·김원봉 등 실존 인물을 ‘위인’ ‘선인’으로 보는 기본 시각을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다. 2016년 ‘덕혜옹주’는 2주 만에 손익분기점(350만 명)을 넘어 최종 약 560만 명에 달했다. 조선왕조의 후예들을 순결한 희생자‧민족주의자로 재구성한 설정은 설득력이 떨어졌지만 흥행엔 별 무리가 없었다.
‘봉오동 전투’는 2019년 여름 문재인정부의 반일광풍의 와중에서 특별한 수혜를 누렸다. 1920년 6월 독립군 전투를 그린 역사물로 “특정 영웅이 아니라 민초들의 이야기를 담았다”고 칭송됐다. 다만 이들이 목숨 걸고 지키고자 했던 나라의 실체가 뭐였는지 알 수 없다. 조선왕조의 부활을 꿈꾸진 않았더라도 자유민주공화국을 상상할 소양 역시 보이지 않았다.
‘한산’ ‘리멤버’ ‘영웅’ ‘유령’ 등은 항일 코드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음을 보여 주는 사례들이다. 이순신 장군이 주인공인 ‘한산: 용의 출현’은 726만 관객을 모았지만 전편 ‘명량’(1761만명)에 비하면 반토막도 안 되는 성적이었다.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1년을 담은 ‘영웅’은 개봉한 지 두 달까지 손익분기점(340만 명)을 못 넘겼다. 설경구·이하늬 주연으로 조선총독 암살 작전을 그린 ‘유령’이나 60년 만에 벌인 친일파의 복수극 ‘리멤버’는 참패했다.
학계의 성과가 교육계·대중예술계에 반영돼야
우리나라에서 큰 인기를 끈 1990년대 일본 만화의 명작 ‘슬램덩크’ 속 강백호의 대사 “영감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죠? 난 지금입니다”가 요즘 젊은 관객들에게 더 설득력 있다. 작년 2월 영화시장 분석가 김형호 씨는 언론 인터뷰에서 감독‧제작자‧투자자가 대부분 40·50대라 과거의 관성에 갇혀 있다”며 상업영화들이 애용하던 항일(반일) 소재는 향후 시장을 이끌 2030대 관객에겐 호소력이 크지 않다고 꼬집었다. 이미 여러 면에서 일본을 이긴 시대의 그들은 일본 컴플렉스에서 자유롭다.
영화평론가 윤성은 씨는 ‘유령’과 ‘리멤버’을 두고 “비장하게 접근한 항일 영화는 시대착오적”이라며 OTT 시대엔 콘텐츠의 국적을 문제 삼지 않고 ‘재미 있으면 본다’는 실용주의가 대세임을 강조했다. 충분한 무게로 다가올 지적이다. 다만 세련되게 잘만 만들면 어떤 반일 코드도 괜찮다는 말일까? 학계·교육계와 함께 영화계도 민족주의 극복을 향해 나아갈 필요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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