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지난달 31일 공개한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전기본) 실무안의 핵심 내용은 2038년까지 신규 원전 3기와 소형모듈원전(SMR) 1기 건설이다. 전기본은 2년마다 수립해 향후 15년간 적용하는 계획인데, 이번에 내놓은 안이 확정되면 신규 원전 건설이 9년 만에 이뤄질 전망이다. 정부가 SMR을 포함해 원전 4기 건설 추진을 밝힌 것은 ‘인공지능(AI)’과 ‘탄소 감축’이라는 세계적 트렌드에 발 빠르게 대응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해석된다.
우선 세계는 바야흐로 AI 전쟁에 뛰어들고 있다. 오픈 AI가 출시한 ‘챗 GPT’를 시작으로 기업이나 교육 현장뿐 아니라 문화·국방 영역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에서 AI 열풍이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문제는 AI 운용에 필요한 막대한 양의 데이터를 처리하기 위해 전력 수요가 엄청나게 폭증한다는 점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2026년 세계 데이터센터의 전력 소비량이 1050TWh가 될 것으로 예측되는데 이는 2022년의 2배 규모라고 한다. 우리나라도 첨단 전략 산업에 전력을 공급할 대책이 필요한 것으로 지적되어 왔다. 지난해 정부는 반도체·이차전지·디스플레이 등 첨단 전략 산업 특화단지 7곳을 선정해 발표했는데, 여기 필요한 전력이 15GW 이상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세계 최대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하는 경기 용인시 특화단지의 전력 수요는 10GW가 넘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서울 전체 전력 사용량과 비슷하다. 이처럼 AI·반도체 산업의 성패는 전력 공급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다른 시대적 요구인 탄소 감축은 이미 전 세계적 추세다.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업체 ASML은 최근 공개된 연간 보고서에서 “2040년까지 고객업체를 포함한 모든 생산·유통 과정에서 탄소중립을 달성하겠다”고 밝혔다. ASML은 첨단 반도체 제조 공정에 반드시 필요한 극자외선 노광장비를 독점 생산하는 기업이다. ‘슈퍼 을’로 불리는 ASML의 요구에 국내 반도체 기업이 부응하지 않을 수 없다.
마이크로소프트(MS)도 주요 공급업체에 2030년까지 100% 무탄소 에너지 사용을 요구하겠다고 나섰다. 애플도 마찬가지다. 2050년까지 2015년 대비 배출량을 90%까지 줄이는 것을 목표로 내세우고 320개의 애플 협력업체로부터 2030년까지 생산의 100%에 무탄소 전기를 사용할 것을 약속받았다.
탄소 배출 없이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수단은 태양열·풍력·수력 등도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폭증하는 전력 수요에 대응해 대규모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수단은 원전뿐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2015년 7차 전기본에서 신한울 3·4호기를 짓는다는 계획이 나온 이후 신규 원전 건설계획이 지금까지 중단됐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재난영화 ‘판도라’를 관람한 후 탈원전 정책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원전에서 퇴보하는 동안 세계 주요국들은 원전을 적극 활용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미국은 백악관에 ‘원자력 프로젝트 관리 워킹그룹’을 두고 원전 활성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프랑스는 2040년까지 원자로 14기를 추가 건설할 계획이고, 영국은 2050년까지 원전 9기를 추가 건설한다. 일본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축소해 가던 원전 비중을 2030년까지 20~22%로 늘릴 것으로 알려졌다.
이제 우리 정부가 내놓은 제11차 전기본에 따라 원전 건설이 신속히 순조롭게 추진되기 위해서는 여야 협력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지난 국회에서 특검법 등 정쟁 탓에 폐기됐던 고준위방사성폐기물특별법 처리를 22대 국회가 서두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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