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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석 이야기 [5] 이삿짐 싸느라 바빴던 독일영사관
낙동·박동·정동·상동·회동·평동… 시내 뺑뺑이
지금은 남대문로5가 서울스퀘어 빌딩에 둥지
임유이 기자 기자페이지 + 입력 2024-06-22 19:05:52
▲ 남이 쓰던 한옥만 물려받았던 독일영사관이 최초로 근대식 공관을 신축했던 회동 시기. 서울스토리
  
서울 정동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뜨락에 독일영사관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대한제국 시기 정동은 황궁이었던 덕수궁을 중심으로 각국의 재외공관이 자리 잡았던 곳이다.
 
그런데 독일영사관이 이곳에 머물렀던 시기는 불과 7년밖에 안 된다. 그들은 여러 번 이삿짐을 싸며 서울 시내 각지를 전전해야 했다. 표지석을 남겼다면 아마도 외교공관을 통틀어 단연 최고였을 것이다. 정들만 하면 짐을 싸야 했던 독일영사관의 사연 많은 이삿짐 보따리 속으로 여행을 떠나 보자.
 
최초의 낙동 시절과 좋았던 박동 시절
 
▲ 박동 영사관은 간신 민겸호가 살았던 집이었다. 나무위키
 
독일(덕국)이 대한제국과 수교를 맺은 것은 1883(고종 20)의 일이다. 재외국민의 편의를 봐 주는 영사관 성격이었다. 처음 영사관이 자리 잡은 위치는 현 서울중앙우체국 뒤편 낙동(현 충무로1·명동2·회현동3가 일대)이었다.
 
사진 자료가 없어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건물은 형편 없이 비좁고 낡아서 직원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듯하다. 제발 이사시켜 달라고 정부에 졸랐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게 개고생을 하고 있는데 드디어 괜찮은 공관 자리가 나서 박동(수송동)으로 이사 나가게 된다. 박동 영사관은 원래 왕실의 별궁으로 간신 민겸호가 살았던 집이었다.
 
민겸호는 군인들의 봉급을 가지고 장난을 치다가 임오군란(1882) 때 구식 군대에게 살해당한 인물로 탐관오리의 전형으로 통한다(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친아들 민영환은 1905년 을사늑약 직후 나라 잃은 분을 참지 못해 자결했다).
 
민겸호가 그렇게 가다 보니 그 좋은 집에 눈길 주는 이가 한 명도 없었다. 결국 독일영사관에까지 차례가 오게 된 것이다. 사연이야 어떻든 낙동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호시절이었다.
 
그러나 박동 생활도 그리 길지는 못했다. 독일 마이어 상사의 한국 지사인 세창양행이 집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프로이센(독일 이전 지명) 출신의 청나라 소속 조선 관리 묄렌도르프(대체 어느 나라 사람?)가 이 집을 사들였다가 다시 자기들에게 팔았다는 것이다
 
▲ 프로이센 출신의 청나라 소속 조선 관리 묄렌도르프. 나무위키
 
그런데 세창양행에게도 그 집이 꼭 필요했던 이유가 있었다. 친분관계에 있는 묄렌도르프가 자신이 관여하고 있던 근대식 관립 교육기간 육영공원을 그리로 이주시켰음 했기 때문이다. 결국 양측은 집을 맞바꾸는 것에 합의했다. 
 
7년의 서소문 시절 그리고 새 건물 회동 시절
 
▲ 서소문동에 있던 근대식 관립 교육기관 육영공원이 1890년 이사를 나가고 독일영사관이 그 자리로 가게 되었다. 문화콘텐츠닷컴
 
▲ 육영공원 터와 나란히 표기된 독일영사관 터 표지석. 임유이 기자
  
1890년 독일영사관은 육영공원이 이사 나간 자리로 들어가게 된다. 지금의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일대가 그곳이다. 독일영사관으로서는 세 번째 둥지인 셈이다.
 
서소문에서는 비교적 긴 시간인 7년을 머물렀다. 그러던 1897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기고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서소문이 정치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각 부처의 관청이 일제히 황궁 근처로 이전해 오는 바람에 독일영사관은 자리를 양보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대한제국 정부는 독일영사관 부지를 55000원에 사들이면서 덤으로 회동(화현동)에 있는 국가 소유의 땅을 내주었다. 1900년의 일이다.
 
이제껏 남이 쓰던 한옥만 물려받았던 영사관으로선 서양식 공관을 신축할 절호의 기회였다. 독일영사관은 당시 유행하던 박공지붕의 근대식 건축 양식을 채택해 공사에만 2년을 쏟아부었다. 이 기간 독일영사관은 상동(남창동)을 임시 거처로 삼게 된다. 그리고 드디어 1902년 회동으로 입주를 단행했다.
 
▲ 독일영사관은 당시 유행하던 박공지붕의 근대식 건축 양식을 채택해 회동 공관을 신축했다. 문화콘텐츠닷컴
 
터가 좋은지 회동으로 이사한 지 1년 만인 1903(광무 7) 5월 독일영사관은 공사관으로 승격되었다. 영사관이 단지 재외국민을 돌보는 기능에 머무른다면 공사관은 지금의 대사관 격으로 그 나라를 대표하는 작은 정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모처럼 얻은 공사관의 영광도 그의 오래 가지는 못했다. 불과 2년 뒤인 1905(광무 9) 11월 대한제국이 일제로부터 외교권을 강탈당했기 때문이다. 독일공관의 경우 아주 문을 닫은 것은 아니고 영사관으로 내려앉았다. 그리고 잘 지은 건물을 놔두고 사대문 밖 평동으로 내쫓겨야 했다. 현 강북삼성병원 일대가 그곳이다.
 
단교 그리고 평동 시절
 
▲ 독일영사관은 1910년 한일합병 이후에도 평동에 존속했다. 문화콘텐츠닷컴
 
독일영사관은 1910년 한일합병 이후에도 존속했다. 그러나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과 함께 운명의 날을 맞고야 말았다. 일제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독일영사관은 평동 시절을 끝으로 대한제국 땅에서 철수해야만 했다.
 
독일영사관이 다시 돌아온 게 14년 후인 1928년의 일이다. 돌아오긴 했으나 일제강점기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독일영사관은 이제나저제나 한 곳에 뿌리내리지 못한 채 광화문과 서소문 일대를 전전했고 결국 폐쇄의 길을 걸었다.
 
당시 한반도에 머무르는 독일 재외국민의 업무는 중국 다롄 소재의 영사관에서 대신했다고 한다.
 
·독 간에 외교관계가 재개된 것은 광복을 맞이하고도 시간이 한참 흐른 1955년의 일이다. 1955년 서독의 리하르트 헤르츠가 초대 대사로 부임하면서 영사관도 공사관도 아닌 독일대사관시대를 열었다. 두 나라는 냉전 시기 몇 안 되는 분단국가였기에 동질감이 매우 강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 현 주한독일대사관은 독립 건물을 쓰지 않고 남대문로5가 서울스퀘어 빌딩에 세 들어 있다. 임유이 기자
 
그로부터 반세기가 흘렀다. 현 주한독일대사관은 주요 대사관임에도 독립 건물을 쓰지 않고 남대문로5가 서울스퀘어 빌딩에 세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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