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공적개발원조(ODA) 규모가 역대 최대 감축 폭을 기록했다. 미국·독일 등 전통 공여국들이 무상원조를 줄이고 자국 산업·안보와 연결된 개발금융이나 민간 투자를 늘리면서 나타난 구조적 변화다. 개발협력이 단순 지원에서 실리형 투자로 재편되는 시점에서 한국이 이러한 원조 공백을 선점해 장기적 파트너십을 구축할 적기라는 제언이 나왔다.
13일 산업연구원의 ‘공적개발원조(ODA) 축소 동향과 개발협력 재편 과제’ 보고서에 따르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개발원조위원회(DAC) 회원국의 2025년 ODA 잠정 집계액은 전년 대비 23.1% 급감한 1743억 달러를 기록했다. 이는 ODA 통계 작성 이래 최대 감축 폭으로, 전체 지원 규모가 유엔 지속가능발전목표(SDGs)를 채택했던 2015년 수준으로 후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급감은 상위 5개 공여국(미국·독일·영국·일본·프랑스)의 예산 삭감이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했다. 차지하는 비중만 전체 감축량의 95.7%에 달한다. 특히 미국은 원조 전담 기구인 국제개발처(USAID)를 해체하는 등 단일국 기준 역대 최대 규모인 약 380억 달러(-56.9%)를 줄여 전체 감소량의 75.1%를 주도했다. 독일 역시 전년 대비 17.4% 줄어든 290억9000만 달러에 머물렀다.
항목별로는 무상원조(-29.1%)와 인도적 지원(-35.8%), 개발 프로젝트(-26.3%) 등 전통적인 원조 사업이 큰 폭으로 위축됐다. 반면 민간 투자를 이끄는 민간지원수단(PSI)은 13.1% 불었다.
다자 ODA 체계에서도 유엔 지원(-27.0%)은 대폭 삭감됐지만, 세계은행(+6.4%)과 지역개발은행(+11.9%) 지원은 오히려 늘었다. 이 같은 원조 축소의 여파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26.3%)와 최빈국(-25.8%) 등 취약 지역에 타격이 집중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주요 공여국들은 개혁안을 통해 실리주의 행보를 본격화하는 추세다. 독일은 자국·유럽 기업의 참여를 확대하는 ‘경제협력 촉진’을 명시했고, 미국은 개발금융기관의 우발채무 한도를 2050억 달러로 확충해 핵심광물·에너지 등 전략 분야 투자를 확대했다. 일본 역시 협력국 요청을 기다리지 않고 사업을 선제적으로 제시하는 ‘제안형 협력’과 정부안전보장능력강화지원(OSA) 예산을 늘려가고 있다.
반면 한국의 지난해 ODA 잠정 실적은 38억8000만 달러로 전년 대비 2.3% 감소하는 데 그쳐 외형상 안정을 유지했다. 그러나 민간 투자를 유도하는 개발금융 기반은 다소 미흡한 실정이다. PSI 실적이 700만 달러에 불과해 일본(10억1900만 달러), 영국(7억4900만 달러), 독일(6억7400만 달러) 등 주요국에 크게 미치지 못하고 있다.
보고서는 한국이 주요국의 원조 공백을 선점하기 위해선 ‘한국형 개발금융’의 통계·보고 체계와 법적 근거부터 정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여기에 선결과제로 협력국의 산업 정책과 국내 기업 데이터를 연계해 사업을 선제 발굴하는 ‘제안형 ODA’ 실행 체계의 확립을 꼽았다.
산업연구원 글로벌산업협력연구실 관계자는 “개발협력의 패러다임이 투자와 금융으로 전환되는 상황에서 단기적인 경제적 실익에만 몰두해서는 안 된다”며 “주요 공여국이 이탈한 보건 및 저소득국 분야의 공백을 메움으로써 중견 공여국으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하고, 장기적 산업 파트너로서의 신뢰를 확보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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