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 양국이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 기로에 섰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일본 총리가 참의원 선거 지원 유세 도중 전직 해상자위대원이 쏜 사제 산탄총에 맞아 사망했다. 정치 테러는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행위로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다. 비열한 범행을 저지른 용의자를 규탄함과 동시에 전직 국가 최고지도자의 충격적인 사망으로 슬픔에 빠진 일본 국민에게 위로를 전한다.
아베 전 총리 피습 사망은 일본 국내 정치뿐 아니라 동북아 안보 질서에도 파문을 불러올 수 있는 사태다. 그는 8년9개월 동안 일본 총리를 지낸 역대 최장수 총리이자 일본 우익의 상징 인물이기 때문이다.
외교·안보에선 우익의 길을 걸었다. 한·일 관계도 좋지 못했다. 일본 정부는 1993년 ‘고노 담화’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 동원과 강제성을 인정했지만 아베 집권 이후 일본 정부의 역사 교과서 기술은 고노 담화와 정반대로 갔다. 2019년 7월에는 수출규제까지 강행하며 한·일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전쟁과 군대 보유를 금지한 ‘평화헌법’의 개헌을 추진하려 했을 뿐 아니라 방위력 증강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중국의 군사적 팽창 등으로 일본 국민의 안보 의식이 전에 없이 높아진 지금을 개헌 적기로 여기고 이번 선거에서 자위대의 헌법 명시 등을 골자로 한 개헌을 앞장서 추진했다.
아베 전 총리는 2020년 9월 퇴임 후에도 집권 자민당 내 최고 파벌인 아베파의 수장으로 ‘상왕’ 노릇을 해왔다. 그는 자신의 후임인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전 총리와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현 총리를 만드는 데에도 결정적 역할을 하는 등 퇴임 후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유지했다.
아베 전 총리의 사망 사건은 당장 10일 일본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에 대한 ‘동정표’가 쏠리며 ‘보수표 결집’ 현상이 나타났다. 자민·공명당 연합은 125석 중 절반(63석)이 넘는 의석을 차지해 우호 세력을 합하면 헌법 개헌안 발의 가능까지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분석을 낳고 있다.
아베 전 총리에 대한 보수 세력의 상실감과 동정론을 앞세운 자민당 강경파가 목소리를 키우는 현실 도래가 우려된다. 방위비(국방비) 인상, 한국·북한·중국 등 주변국에 대한 더 강경한 외교 등 ‘추가 우클릭’을 주장하면 정국이 소용돌이에 휘말릴 것이다. 일본의 우경화는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 등으로 경색돼 있는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 새로운 해법을 찾으려는 우리 정부에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정부는 한·일 관계에 미칠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는 외교적 해법을 고민하기 바란다.
정국의 향배는 기시다 총리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에 달려 있다. 기시다 총리는 주변국과의 관계를 비교적 중시하는 당내 ‘리버럴(자유주의)’ 그룹으로 평가되고 있어 소신을 펼쳐가거나 ‘아베 유지를 받들겠다’는 명분으로 개헌을 추진함으로써 지지율을 끌어올리고 국정 장악력을 확대하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다. 당내 온건파인 ‘기시다파’를 이끄는 현 총리가 자신의 색깔을 내면서 한·일 관계 정상화와 동북아 안정에 기여하길 기대한다.
특히 한·일은 불확실성의 급변하는 세계 정세 속에서 지리적·경제구조적 유사성이 있어 양국 협력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시기다. 윤석열정부는 일본의 정국 급변을 예의주시해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한 적극적인 외교에 나서길 당부한다. 전국경제인연합회와 일본 경제단체연합회로 결성된 한·일재계회의 등 민간영역 채널도 가동해 협력을 구하면 보다 큰 효과가 있을 것이다. 한·일은 역사·지리적으로 뗄래야 뗄 수 없는 동반자임을 재인식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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