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5월 미식가들의 ‘성서’라고 불리는 <미쉐린 가이드>가 만화 <식객>을 그린 허영만 화백을 인터뷰 했다. <미쉐린 가이드> 서울 디지털 에디터인 예리카 박은 허 화백에게 “생애 마지막 식사를 선택한다면 무엇을 드시고 싶냐”고 물었다.
허 화백은 “원래 함흥냉면만 먹고 평양냉면을 싫어했었는데 요새 평양냉면에 빠졌다”며 “마지막 식사로 뭘 먹겠냐고 물으면 평양냉면”이라고 답했다. 그는 “일본서 메밀 맛을 알아버렸어.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메밀국수를 먹어보니까 우열을 알겠더라고. 그 이후부터는 평양냉면을 즐겨 먹는다”고 덧붙였다.
특별히 좋아하는 냉면집에 대해서는 “작업실이 수서라 점심때 냉면 먹으러 강북까지 넘어오기가 너무 멀어. 분당 서현동에 좋아하는 집이 하나 있고, 집 근처 운중동에도 괜찮은 집이 하나 있다”며 “가장 최근에 좋아하게 된 집은 남한산성 꼭대기에 있는 집인데 그 집 냉면을 먹고 감동받았는데 그 집은 비나 눈이 내리는 날에는 냉면이 반값”이라고 했다. 냉면집 옥호를 특정하지 않았지만 솜씨 좋은 네티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을 듯하다.
<식객> 시리즈로 국민 음식만화 대부가 된 그가 일생 마지막 식사로 평양냉면을 선택한 것은 의외다.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던 음식이 아닌 뒤늦게 접한 것에 입맛을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입맛 늦바람’이 든 셈이다. 이렇듯 평양냉면은 묘하게 입맛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식객> 허영만 화백 “내 생애 마지막 식사는 평양냉면”
개나리가 움을 틔웠다. 노란 꽃그늘을 만들기 위해 뿌리로 흙속의 물을 열심히 빨아 당길 때다. 지난 23일 꽃샘추위에 진눈깨비까지 몰아쳐 대지를 적셨다. 봄 가뭄이 심했는데 해갈에 큰 도움이 됐다. 3월도 일주일 정도 남았다. 4월이 되면 금세 기온이 오른다. 땀이 스멀스멀 나기 시작하고 갈증이 따라오면 가장 먼저 시원한 냉면이 생각난다. 본격적인 냉면 시즌이 시작될 때다.
평양냉면 마니아 층이 두터워지고 있다. 전국적으로 신흥 평양냉면 집도 많이 늘었고 지역 강자로 급부상하기도 하는 등 한반도가 한여름이 되면 ‘냉면앓이’를 할 정도다. 의정부 계열, 장충동 계열 등 냉면집 마다 선호하는 마니아들이 형성되고 순례를 다니기도 한다. 냉면을 위한 ‘벙개’ 모임과 단체 투어도 종종 눈에 띈다. 이들 한가운데 냉면 중에서도 평양냉면이 자리 잡고 있다.
필자는 매년 수도권 평양냉면 투어를 다닌다. 올해는 <미쉐린 가이드 2019> 빕 구르망에 오른 평양냉면 집과 2020에 선정될 가능성이 있는 곳을 테마로 잡았다. 2019 빕 구르망에는 평양냉면을 똑 떨어지게 표방하는 곳이 모두 7곳. 강남지역에 능라도(강남점), 진미평양냉면, 봉피양(본점), 강북에 우래옥(본점), 필동면옥, 만포면옥 등 각각 3곳이 있고 중립지대(?)인 여의도에 정인면옥 1곳이 있다.
이들 평냉집과 빕 구르망으로 선정 가능성이 높은 후보지 서경도락, 배꼽집 등 약 10곳을 세 번에 걸쳐 두루 다니는 데, 이유는 맛의 비교 때문이다. 각각 분리돼 있던 맛을 하루에 섭렵하면 개성이 뚜렷하게 구분된다. 그러나 섭취할 수 있는 위의 용량이 한계가 있어 세 번에 나눠 다니는 것이다.
진미평양냉면·봉피양·능라도 등 강남지역 1차로 투어
가장 먼저 강남지역을 돌았다. 강남구 논현동 뒷골목에 위치한 진미평양냉면은 장충동 계열 냉면집에서 오랫동안 면장을 한 임세권 셰프가 독립한 곳이다. 2년 만에 찾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집은 아니다. 메밀 외 탄성을 주기 위해 들어간 전분, 소다 등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탓이다. 손님이 많아져서 어느새 별관도 생기고 발레 파킹 요원도 복수로 고용할 정도가 됐다. 11시 문 열자마자 손님이 들어서고 11시 반이면 본격적으로 들이 닥친다. 직접 빚은 만두는 평냉집 중에서 상급에 속한다.
최근 평냉집 메밀은 미국산, 중국산, 몽골산을 많이 사용한다. 평냉집이 늘어나면서 연간 1만톤 정도 생산되는 국산 메밀로는 수요를 채우지 못할뿐더러 수입산 메밀과 별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국내 메밀은 70년대 강원, 전남, 경북 순이었으나 80년대 이후에는 경북, 강원·경남 순으로 변했고 2010년대는 제주, 강원, 경북 순으로 주재배지역 순위가 자주 바뀌었다. 제주도에서 재배면적이 늘어난 가장 큰 원인은 경관보전직불제 때문이다. 이 제도는 농지에 일반 작물 대신 경관 작물을 재배할 경우 소득 손실액을 보조금으로 지급하는 것으로 메밀을 비롯해 유채, 해바라기, 코스모스, 목화, 야생화 등이 해당된다.
방이동 벽제갈비의 평냉 브랜드인 봉피양은 일반인들에게 벽제갈비보다 더 많이 알려진 효자 브랜드다. 본점 일대에 주변 건물을 사들이거나 세를 얻어 신관, 별관 등으로 넓혀가는 등 ‘타운’을 형성해 가는 모습이었다. 얼마나 더 확장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계속 확장되고 있다는 것은 손님 층이 두터워지고 있다는 것이고 이는 봉피양 평냉 맛이 보편적으로 ‘잘 먹히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우리 국민들 입맛이 진한 육향 베이스 쪽으로 변화가 감지되는 데, 이를 대변하는 듯하다.
봉피양은 2017년부터 내리 3회 빕 구르망에 선정됐다. 빕 구르망은 서울의 경우 1인당 3만5000원 이하 합리적인 가격에 훌륭한 음식을 제공하는 식당을 대상으로 뽑는다. 이쯤 되면 봉피양은 한 단계 도약하는 욕심이 생기지 않을까. 다름 아닌 미쉐린 스타다. 필자에게도 미쉐린 스타를 받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가끔 문의가 오곤 하는데, 분점이 많은 곳은 일단 ‘별’ 받기가 ‘하늘의 별따기’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답을 해 준다. 미쉐린 스타는 ‘흔한 맛’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능라도 강남점에 가기 전에 피양옥이란 곳을 방문했다. ‘강남에 새로이 떠오르는 평양냉면 전문점’으로 후발주자이지만 기본이 충실하단 의미를 담은 집이다. 북한에서 사용하는 서체로 옥호를 쓴 간판과 커다란 제분소, 그리고 간장이 진하게 들어간 피양면 등 후발주자가 할 수 있는 많은 요소를 집어넣고 분투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평냉 본류에 합류하기에는 여러 면에서 분발해야 할 부분이 보였다.
미쉐린 가이드 ‘빕 구르망’이 사랑한 평양냉면
판교에서 시작해 무섭게 서울로 북진하고 있는 능라도. 3월에는 광화문점까지 지점을 늘렸다. 봉피양과 마찬가지로 빕 구르망 정도에 머물 생각인 모양이다. 일반적인 시각으로 봤을 때는 미쉐린 스타 하나나 빕 구르망이나 큰 차이를 두지 않는다. 그만큼 ‘미쉐린 가이드’란 브랜드가 견고하기 때문이다.
지난 2015년 서울 입성 후 서서히 입지를 넓히고 있다. 과거 삼원가든의 자회사 SG다인힐이 양재역에 로스옥을 오픈하자 건너편 인근 입지도 여의치 않은 곳에 봉피양이 들어섰다. 봉피양 입장에서는 강남은 물론 서울지역에서 아성을 굳건히 하고 싶단 의지로 읽히는 대목이다. 이 점에서 능라도의 확장은 봉피양 꽤나 신경이 쓰일 듯하다. 물론 개인적 생각이다.
능라도에 대해 미쉐린은 “최상급 한우, 몽골산 메밀만을 고집할 정도로 재료와 음식 품질에 대한 고집을 요리 맛 반영하고 있다”며 “고객들이 능라도의 다양한 음식을 접할 수 있도록 몇몇 요리는 작은 사이즈로 판매한다”고 적고 있다.
이쯤에서 필동면옥이 제육 반접시를 팔다가 없앤 부분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둘이 갔을 때 꼭 주문했던 반접시가 사라지고 2만4000원짜리 온접시만 있다 보니 가격이 부담된다. 점심에 냉면 두그릇과 제육에 소주까지 한잔 하자면 두당 2만5000원은 내야 한다. 필동면옥은 평냉 마니아를 위해 제육 반접시를 부활시킬 것을 간곡히 부탁한다. 반도 최고의 제육 아니던가! 짧은 시간에 밸런스를 잘 잡아 선발주자들을 바짝 추격하고 있는 서경도락에서 1차 평냉 투어를 정리하면서 해본 생각이다.
평냉이 현대인들의 기호식품으로 떠오르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복잡하지 않고 단순한 상차림과 술과 잘 어울리는 메뉴가 많다는 점, 그리고 연식이 오래된 점포에 담긴 수많은 스토리 등이 젊은 층까지 흡수해 단단한 소비층을 형성하고 있다. 게다가 메밀의 루틴 성분과 불포화지방산 등 영양학적으로 우수한 점도 웰빙을 추구하는 입맛을 사로잡았다. 특히 남북한 화해 분위기와 함께 ‘통일음식’으로 부각되는 바람에 지난해 특수를 누렸다. 겨울음식이던 평냉이 여름음식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기후 변화로 봄이 사라진 한반도에 평냉 시즌이 시작됐다. 어느 냉면집으로 가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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