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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포커스]-가족의 의미(下-탈북민)
北서 넘어온 이들… “가족은 나를 살게 하는 버팀목”
고향에 두고 온 가족 생각하면 ‘울컥’
결혼 후 새 가족 덕분에 행복한 나날
문용균 기자 기자페이지 + 입력 2022-05-09 00:03:00
▲ 가족의 출발을 알리는 보통의 신호는 바로 결혼이다. 사진은 결혼식을 올리는 한 신혼부부의 모습. ⓒ스카이데일리
 
[특별취재팀=문용균 팀장|양준규 기자·신성수 기자]
 가족은 삶을 살아가는데 가장 큰 버팀목이자 희망이기도 하다. 슬프거나 힘들거나 또는 기쁠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다름아닌 가족이다.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대한민국으로 건너온 탈북민도 물론 예외가 아니다. 만날 수 없어 안타깝고 더 잘해주지 못해 미안하며 늘 옆에 있어줘서 고마운 존재 바로 가족 얘기다.
 
살기 위해 가족 두고 탈북, 남편 믿고 한국 들어와… “혼자면 많이 힘들었을 것”
 
30대 후반인 차모(여) 씨는 2016년 대한민국으로 건너온 탈북민이다.
 
“북한 양강도가 고향이죠. 가족이 있었음에도 목숨을 걸고 탈북한 이유는 당시 대학을 다녔는데 큰돈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장사를 했죠. 중국에서 물건을 사와 북한에서 파는 일을 했죠. 어느 날 중국에서 성경책을 가지고 왔는데 숙소 주인이 제가 장마당에 나갔을 때 가방을 뒤졌고 성경책을 발견하고서는 신고를 했어요.”
 
“그 것 때문에 조사를 받았어요. 10년 넘게 감옥살이를 할 것 같다고 얘기를 들었고 이대로는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뿐이었죠. 그러다 압록강에 물을 길으러 나왔을 때를 틈타 목숨을 건 도강에 나선 것이죠. 강을 헤엄쳐 건너든데 당시 간수가 소리말 지를뿐 총을 쏘지는 않더라고요. 2005년 당시만해도 강건나 도주하는 이들에게 총을 쏘라는 지침은 없었던 것 같아요. 정말 다행이죠.”
 
차 씨는 당시 상황을 이야기하며 부모님, 형제가 가장 많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그립죠. 살아야 했으니까. 부모님 그리고 동생은 장가 가서 잘 살고 있다고 들었어요.”
 
잠깐 멈칫하던 그는 중국에 두고 온 아들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들이 하나 있는데, 중국에 두고 왔어요. 마음이 아프죠. 당시 같이 오는 것이 힘들어서 그랬어요. 지금 남편과 저 사이에서 낳은 아이는 아니죠. 중국으로 넘어왔을 때 연결고리가 있던 집에서 머물렀어요. 혼자 외로웠죠. 그러다 제가 이제는 북한으로 못 간다고 얘기하니 남편감을 소개해 줬어요. 조선족이었죠. 전 신분이 없으니 법적으로 묶인 것은 아니었어요. 그 사람과 살았는데 그때 낳은 아들이 중국에 두고 온 바로 그 녀석이죠.”
 
“현재 남편은 한 참 뒤에 만났어요. 그 전 같이 살던 남편은 어느 날 큰 사고를 쳐서 감옥에 갔어요. 1년 남짓 함께 지냈죠. 그 이후 긴 시간 홀로 아이를 키우며 힘든 나날을 보냈죠. 신분이 없으니까 작은 공장, 식당을 전전했고 탈북자라는 사실을 들키는 순간 도망가기 일쑤였죠. 수년 뒤 시댁에서는 언제 나올지도 모르니 재혼을 권하고 사람을 소개해 줬지만 다 마음에 들지 않았죠. 그러다 만난 사람이 지금의 남편이랍니다.”
 
차 씨는 대한민국으로 건너와 비록 힘들지만 안전한 가운데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남편과 가족 때문이라고 말했다.
 
▲ 일하고 있는 탈북민 김주환(가명) 씨. [사진제공=김주환 씨]
 
“아들과 함께 동성 친구들과 식사하는 자리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어요. 애들을 잘 챙기더라고요. 아들도 잘 따르고 해서 연락처를 주고받고 책임감 있는 사람인 것 같아 만나게 됐어요. 남편은 조선족으로 한국에서 일하다 들어와 있던 상태였고 다시 한국으로 나갔어요. 그땐 자식도 없고 나를 한국으로 불러줄까. 헤어지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지만 돈도 보내주고 한국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도와줬어요. 정을 느꼈죠.
 
“정말 한국에서 적응하는데 큰 버팀목이었어요. 모든 것이 낯선데 그가 알려줬죠. 혼자였다면 버티지 못했을 것 같아요. 현재 아들 둘을 낳고 사는데 어떨 땐 좋은 옷도 사고 싶고 배우고 싶은 것도 많아 속이 상하기도 하지만 아이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마냥 힘이나요. 고통보다 행복이 더 크죠. 가족은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젊을 땐 몰라도 나이 들면 가족 없이는 견디기 힘들 것 같아요.”
 
“가족은 내가 사는 이유”
 
서울 노원구에 거주하는 김주환(남·30대·가명) 씨도 탈북민이다.
 
“전 2014년 가을에 한국에 왔는데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어 넘어왔죠. 북한에서 살면 뻔히 몇 십 년 후가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모든 기회가 열려있는 대한민국으로의 탈북을 결심했어요.”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허락을 받고 혼자 넘어왔어요. 얼핏 냉정해 보일 수 있지만 그만큼 절박했다고 이해하시면 돼요. 지금도 부모 형제만 생각하면 울컥해요. 가족이란 맛있는 것 먹으면 생각나고 힘들 때 기쁠 때 떠오르는 존재죠. 전 늘 부모님을 대한민국으로 모시고 오고 싶어요.”
 
“부모님과 형제는 그리운 존재라면 지금 함께 있는 부인과 딸은 제게 힘을 주죠. 아내와는 북한에서는 모르는 사이였고, 한국에 와 함께 적응하며 결혼까지 하게 됐죠.”
 
김 씨는 아내의 희생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감사해한다.
 
“처음에 오면 배우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요. 아내와는 회계 학원을 같이 다니면서 인연이 시작됐죠. 항상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하던 저였지만 지쳐있었어요. 저 역시 사람이니까. 그런데 아내는 저를 지지해 줬고 힘이 되어주었죠 저는 결혼하기로 결심했고 결국 해냈습니다. 제가 많이 좋아했거든요. 특히 아내는 대학에 입학하고 싶었을 텐데도 저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꿈을 미뤘어요. 그동안 전 이것저것 많이 배우고 익혔죠. 모두 아내 덕입니다,”
 
크게 보기=이미지 클릭 [그래픽=오동훈] ⓒ스카이데일리
 
“미안한 마음이 커요. 그래서 지난해부터는 원하는 브랜드의 옷도 사주고 그간 고생한 것들에 대한 감사의 표현을 나름대로 하고 있어요. 결혼은 그런 것 같아요. 한 발 양보하고 서로 희생하는 그런 마음이 있어야 된다고 봐요.”
 
가족 생각뿐인 그는 가장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는 않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아무 것도 두렵지 않다고 강조했다.
 
“힘내야죠. 제가 선택한 길이고, 정말 행복해요. 특히 아내도 고맙지만 최근엔 딸이 저를 위해 노래를 불러주고 예쁜 말을 해줄 때 세상을 다가진 것처럼 힘이 나요. 일하다가 딸을 떠올리는 일이 점점 잦아지더라니까요.(웃음)”
 
그는 혈연관계가 주는 따뜻함과 안정감에 대해서도 속내를 털어놨다.
 
“사실 제 아내의 엄마, 즉 저의 장모님은 국군포로의 딸이었어요. 원래 전쟁 전에는 남한에 살았다고 해요. 그렇게 북한에 살다가 탈북한 이후 가족을 찾았죠. 장모님의 부모님은 다 돌아가셨지만 그 후손들끼리 교류하며 정을 나누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찡해져요. 세대를 이어 다른 지역에 우리 편이 든든하게 있다는 느낌이죠. 새로 출범하는 정부에서는 남북 교류가 활발해져 많은 이들이 가족을 만나고 고향 땅을 밟을 수 있기만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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