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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이의 군사 이슈

국군의 탄생과 숙군, 그리고 6·25 전쟁

국군은 군인복무기본법에 명시된 이념과 사명에 충실해야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22-06-09 09:43:50

 
▲ 박정이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객원연구위원·(예)육군대장.
1948년8월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더불어 미군정이 종식되고 정부 조직법에 의해 국방부가 설립됐다. 이후 한미 간 ‘잠정적 군사 안전에 관한 협정’ 체결과 ‘국군조직법’ 제정 및 공표 절차를 거쳐 1948년12월15일 조선경비대와 조선해안경비대가 각각 한국 육군과 해군으로 편입됐고 법제화됐다.
 
정부는 국군조직법과 국방부 직제령으로 국군 창설의 법적 근거를 마련한 데 이어, 1949년7월15일 ‘병역법’을 제정해 국민개병제(징병제)를 확립했다. 병역법에 의하면 대한민국 남자는 만 20세에서 만 40세까지 병역의무를 진다. 병역은 상비병역(현역 및 예비역), 호국병역, 국민병역(제1·2 국민병역) 등으로 구분했다. 상비병역의 복무연한은 현역의 경우 육군 2년, 해군 3년, 예비역의 경우 육군 6년, 해군 5년으로 규정됐다.
 
정부 수립 후 국방부가 추진한 국방 정책의 기본 방향은 ‘연합 국방’이었다. 이는 국제 공산주의 세력을 가상의 적으로 상정하고, 이에 대비하기 위해 국방역량을 미국 중심의 민주진영과 연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건군 이념은 국방 정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건군 지도지침으로서 ‘정병 양성을 위한 사병제일주의와 사상통일’이 제시됐다. 반공 민주주의 군대로서 정신무장을 강화하기 위해 ‘정훈국’을 설치했다. 1950년2월28일 대통령령 제282호로 ‘군인 복무령’이 제정돼 복무에 관한 정신적 토대가 법제화됐다.
 
당시 정세는 주한 미군 제1진이 1948년9월15일 철수를 개시해 군사고문단 5백여 명만 남기고 1949년6월29일 철수를 완료했다. 이로써 ‘힘의 공백’ 상태가 야기됐으며, 남한 내 체제 전복 활동이 빈발했다. 북한은 무장 게릴라들을 남한에 침투시켜 도발을 자행했고 38도선에서 충돌이 증가했다. 특히 1948년 제주 4·3사건과 10월 여순사건이 일어나고 북한 게릴라가 태백산맥으로 침투해 국가 안보를 위협했다.
 
1945년11월13일 미군정청 내 국방사령부가 설치됐고 1946년1월15일 국방사령부 예하에 국방경비대가 창설된 후 1월 21일 군정법령 제28호에 근거해 모든 자생적 군사단체를 해체시킴에 따라 좌익단체였던 조선국군준비대와 조선학병동맹도 해체됐다. 창군 과정에서 경비대 간부 요원은 주로 일본군·만주군 출신의 우익 군 경력자들로 충원된 반면 군사영어학교와 조선경비사관학교에는 상당수의 좌익 계열이 참여했다. 그런데 미군정청은 ‘불편부당’ 정책을 취하면서 신원조사를 실시하지 않았다. 그 결과 연대별로 진행된 모병 과정에서 좌익계 사설군사단체에서 활동한 자들이 대거 입대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당시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의 국방경비대 침투 공작은 장교와 사병을 구분해 방법을 달리 했다. 장교는 주로 조선경비사관학교 내에 이미 침투했거나, 포섭된 조직망을 통해 남로당 추천자를 입교시키거나, 임관된 장교를 통해 지인들을 포섭하는 등의 방법을 동원했다. 한편 국방경비대 사병은 대부분 빈농 출신으로 해방 후 좌익 단체에 가담한 자들이 많았는데, 이 중에는 좌익 활동을 하다가 경찰에 쫓겨 경비대에 들어오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당성이 강하고 성분이 좋은 자, 좌익계 활동이 노출된 자, 경찰과 적대 관계에 있거나 반감을 가진 자를 적극 추천·입대시켰다. 이와 같이 남로당은 군내 침투 공작 과정에서 당 중앙 군사부가 장교를 관리한 반면 사병은 각 도에 있는 연대가 모병 단위였으므로 각 지방 당부가 관리하는 이원화된 체제로 운영됐다.
 
국군 창설 시 내부적 시련 중에 가장 큰 사건은 군내 침투한 좌익 세력에 의한 소요 및 반란 사건이었다. 1947년9월 한국 문제가 유엔 총회에 상정돼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이 확실해지자 무장봉기의 결정적 시기라고 판단한 북조선노동당(북로당)은 남로당에 제주 4·3사건, 여순사건과 대구사건 등을 지령했다.
 
남로당 제주도당 군사부 총책 김달삼은 남로당 제9연대 조직책 문상길 중위와 협의해 5·10 선거를 저지할 목적으로 1948년4월3일 제주도 전역에 폭동을 일으켜 살인, 방화, 관공서 습격 및 강탈 등의 잔악한 행위를 자행했다. 제주도 폭동 진압 차 제14연대가 출동하자 연대 인사계 지창수 상사와 김지회 중위 주도로 반란을 일으켜 여수·순천·구례 등지에 적색 행정을 실시하고 우익계 인사들을 인민재판에 회부해 총살했다. 대구에 주둔한 제6연대도 여순사건에 호응해 봉기하려다 발각돼 좌익분자의 연행 사태가 야기되자 노동당 중앙당부가 연대 정보과 선임하사 이정택 일등상사에게 봉기를 지령함으로써 1948년11월2일과 12월6일, 1949년1월30일 세 차례에 걸친 반란 사건이 발생했다.
 
1948년6월18일 제주도 주둔 제11연대장인 박진경 대령 암살 사건은 숙군(肅軍:군부대의 좌익 숙정)의 단초가 됐다. 이를 계기로 국방경비대는 전군 차원의 사상검열을 실시했다. 당시 새로 취임한 이범석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은 장병들의 사상 문제에 큰 관심을 가졌으며, 대한민국 군대는 공산주의에 끝까지 대항해야 하므로 사상통일을 위한 반공정신 강화에 주안점을 둬야 한다고 천명했다. 여순사건은 숙군 확대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1948년10월22일 국방장관은 대대적인 숙군을 전개할 것을 분명히 했다.
 
정부 전복 활동과 군부의 반란 사태와 같은 좌익 활동이 극렬해지자 정부는 1948년12월1일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같은 달 21일 예하에 15개 파견대를 설치해 본격적인 숙군 작업에 착수했다. 숙군 작업은 1948년10월부터 1949년10월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단행됐다. 정부는 1949년10월19일 남로당 등 좌익계 133개 정당 및 단체의 등록을 취소하고 공산당을 불법화시켰다.
 
대대적인 숙군 작업은 1949년7월 일단 막을 내렸다. 이 시기까지 숙군 결과 4749명의 장병이 처벌을 받았는데, 이는 당시 군 병력의 약 5%에 해당하는 엄청난 숫자였다. 여순사건 발생 직후 제4연대, 제6연대, 제14연대, 제15연대를 대상으로 1948년10월부터 1949년3월까지 5개월간 수사해 공산주의자 364명을 색출했다. 이 중에는 군사영어학교 및 조선경비사관학교 1·2·3기 출신 장교만 80명이나 돼 기수별 임관자 비율은 10∼15%에 달하는 수준이었다.
 
결과적으로 많은 난관과 부작용이 없지 않았지만 대대적인 숙군 결과 군내 좌익 세력이 일망타진됐다. 그로 인해 6·25 전쟁에서 국군의 성공적인 전투 수행이 가능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숙군의 의의는 대단히 크다고 할 수 있다. 
 

 [스카이데일리 / skyedaily__ , skyedaily@sky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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