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취재팀=박선옥 부장|배태용·정동현·유환인 기자] 70년 전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3년여간 벌어진 6·25 전쟁으로 우리나라는 전쟁의 상처와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 후 대한민국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 각고의 노력을 통해 세계가 놀랄 정도의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안정과 번영 속에서 당시의 상처와 아픔은 점차 잊히고 있다. 북한의 계속된 도발에도 우리 국민의 안보의식은 점차 희미해져가고 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점은 여전히 우리나라 곳곳에는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어 주는 70년 전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북한 기습 남침에 의한 6·25 전쟁 아픔 고스란히 간직한 ‘기억의 땅 철원’
강원도 철원 지역은 우리나라 최전방 지역이다. 서울에서 지하철을 타고 동두천역까지 간 후 다시 백마고지역으로 향하는 경원선 수송대체 버스를 타고 1시간 가량 이동해야 한다. 현재 코로나 사태로 안보관광 코스가 중단돼 교통편이 줄어들긴 했지만 목적지까지 이동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
철원에는 한국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으로 알려진 백마고지가 자리하고 있다. 백마고지는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북서쪽으로 약 12㎞ 지점에 있는 해발 395m의 고지로 군사적 관례에 따라 ‘395고지’로도 불린다. 이곳은 6·25 전쟁 당시 무려 10일 동안 12번이나 주인이 바뀌는 등 아군과 중공군 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당시 심한 포격으로 산등성이가 허옇게 벗겨져서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백마(白馬)가 쓰러져 누운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해서 ‘백마고지’로 불리게 됐다. 1952년 10월 6일 중공군은 제38군 예하의 제112·113·114사단의 약 4만5000명의 병사를 동원해 백마고지 일대에 2000여발의 포탄을 투하하며 공격을 개시했다.
제9사단 예하의 제28·29·30연대를 비롯해 경장비 제51연대, 53전차중대, 제1포병단 등의 국군과 제5공군, 제73전차대대, 제49·제213·955 포병대대 등의 미군이 중공군의 침략에 맞서 싸웠다. 10월 6일부터 10월 15일까지 치열한 혈전을 치른 끝에 제9사단이 중공군을 격퇴하고 승리했다. 이 전투에서 아군은 21만9954발의 포탄을, 중공군은 5만5000발의 포탄을 각각 발사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전투에서 패한 중공군은 막대한 타격을 입고 후방으로 물러났다. 아군 제9사단은 이 전투의 승리로 백마부대로 불리게 됐다. 휴전을 앞둔 상황에서 거둔 대규모 전투의 승리로 우리나라는 군사적 요지를 확보하게 됐으며 유엔군은 정전회담에서 유리한 입장을 지킬 수 있었다. 백마고지 정상에는 치열했던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기념관, 전적비, 호국영령 충혼탑과 위령비가 세워졌다. 이곳에서는 매년 10월 16일이면 민·관·군 합동 위령제가 거행된다.
1952년 10월 백마고지 전투에 참전한 실제 주인공인 백마고지 참전전우회 박명호 회장(88)은 참혹했던 전투의 기억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는 “중공군이 인해전술을 펼치면서 처음에는 철조망을 걷어내는 갈고리 부대가 올라오고 그 뒤로는 꽹과리와 징을 치는 부대, 소총과 따발총을 쏘는 부대가 물밀듯이 올라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치열한 전투 과정에서 많은 전우가 목숨을 잃었고 그 이후 마음이 매우 힘들었다”며 “전쟁은 참혹하고 전쟁이 일어나면 너무나 많은 사람의 생명이 무참히 짓밟힌다. 우리나라에서 다시는 이런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되기 때문에 백마고지 전투의 중요성과 의미를 후손들이 많이 기억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철원군에 위치한 또 다른 6·25 전쟁의 흔적은 과거 북한 조선로동당이 세운 노동당사다. 당시 소련의 영향을 받은 건축물로서 문화재로 보존가치가 있다는 사실이 입증돼 현재는 문화재로 보호되고 있다. 전쟁 중 건물 일부가 소실·파괴됐고 지금은 건물 뒷편에 무너진 곳이 많아 붕괴 위험 때문에 외부인의 내부출입은 금지된 상태다.
전쟁 이후 철원군 일부 지역(철원읍, 갈말읍 등)이 수복되면서 노동당사에선 북한 노동당에게 고문을 당하다 끝내 사망한 사람들의 유골과 두골(頭骨), 고문도구 등이 국군에 의해 발견됐다. 이곳에서 남북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강철비’를 촬영하기도 했다.
6·25 전쟁 당시의 흔적 곳곳에 남아 있는 남북 접경지역 파주
남북이 마주보는 접경지역으로 잘 알려진 경기도 파주 지역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안보관광지로 유명하다. 이곳에는 6·25 전쟁 당시 사용됐던 기차들, 자유의 다리, 6·25 전쟁 당시 북한의 폭격으로 끊어진 임진강 독개다리, 미군이 사용했다고 알려진 벙커 등 전쟁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임진강 독개다리’는 민통선 내 역사·자연 풍광을 별도 출입허가 절차와 인원제한 없이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시설이다. 이 다리는 6·25 전쟁 때 폭격으로 파괴된 교각을 활용해 길이 105m, 폭 5m 규모의 전쟁 전 철교의 형태를 재현해 만들어졌다. 통일을 염원하는 의미와 미래지향적 의미를 담아 2016년 만들어진 후 교육·관광시설로 활용되고 있다. 임진강 독개다리 교각에는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전쟁으로 생긴 포탄 자국이 생생하게 새겨져 있다.
‘자유의 다리’는 파주시 문산읍 마정리 임진각 광장 앞 망배단 뒤편에 놓인 다리다. 과거 임진강의 남과 북을 잇는 유일한 통로였다. 예전에는 노상리 쪽 자연마을의 이름을 따서 독개다리라고 불렸으나 1953년 휴전 후 남·북 포로교환이 이루어졌을 때 공산군의 포로였던 1만2773명의 국군과 유엔군이 자유를 찾아 귀환하면서 이후 ‘자유의 다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파주 임진각에는 또 다른 전쟁의 상징물인 녹슨 증기기관차가 전시돼 있다. 6·25 전쟁 후 비무장지대인 장단역에서 50여m 떨어진 철로 옆에 붉게 녹슨 채 50년 이상 방치돼 있다가 2009년부터 임진각에서 전시되고 있다. 온 몸에 120여개의 총탄 구멍이 나 있는 기관차의 모습은 과거 역사의 상처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한국전쟁 때 사용하였던 군 지하벙커가 독특한 전시공간으로 꾸며진 곳도 있다. ‘아트스페이스 BEAT 131’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공간은 6·25 전쟁 당시 미군이 직접 사용하던 지하벙커를 나중에 우리 군이 사용하다가 최근 전시시설로 탈바꿈했다. 지하벙커를 원형 그대로 살려 총기, 수통, 철모, 무전기 등 전쟁 당시 사용했던 물품들이 전시돼 있다. 특히 총탄에 구멍이 뚫린 철모는 전쟁의 아픔을 생생히 전달해주고 있다.
파주에는 전쟁의 상처가 현재진행중임을 상기시켜주는 곳이 또 있다. 바로 국립6·25전쟁납북자기념관이다. 전쟁 중 북한군에 의해 납북된 실종 및 사망자들에 대한 진위와 납북자 가족 및 유족들의 비극을 알리기 위해 세워졌다. 안재홍, 김규식, 박열, 정지용, 이광수 등 정치, 경제, 문화, 학술계의 수많은 인사가 납북됐다.
이미일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장(71)은 납북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인물이다. 그는 “당시 너무 어려서 잘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어머니께서 그 시절의 이야기를 자주해줬다”며 “북한군이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법철학을 공부했던 아버지를 북한으로 납치했고 이후 우리 가족들은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고 설명했다.
이 이사장은 납북자 문제를 방관하는 정부의 태도에 안타까워하며 국민에게 납북자들에 대한 관심을 적극 호소했다. 그는 “남북 화해를 추진하는 문재인정부는 현재 납북자 문제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다”며 “그동안 정부의 북한 방문 목적이 경제적 지원이었다면 납북자를 몇 명이라도 돌려받아야 하는데 정부는 북한의 잘못을 지적하기는커녕 오히려 방관하고 있다. 아직까지 끝나지 않은 납북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국민적인 관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정동현 기자/행동이 빠른 신문 ⓒ스카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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