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부 요청한 집권층의 이중성에 응답 없는 메아리
젊은 층이나 기성세대 모두 ‘불안의 시대’ 반영
진보의 보수화, 보수의 진보화로 이념의 수단화 확인
나라 빚 양산하는 고용, 소득주도 성장은 망국의 길
난국 타개할 탁월한 지도자, 우리에겐 요원한가
친한 사이인 두 남자가 이탈리아 피렌체를 방문해 다비드 상 앞에 섰다. 미켈란젤로의 걸작이다. 한 남자는 이 조각이 인체의 조형미를 멋지게 표현하고 있는 것에 감탄사를 연발한다. 그러나 다른 남자는 작품 감상에 앞서 쑥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벌거벗은 다비드 상의 한 가운데가 불쑥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국내에도 번역 출판된 ‘바른 마음’의 저자이자 미국의 심리학자인 조너선 하이트(뉴욕대 교수)는 이 장면에서 질문을 던진다. 이들의 정치적 성향을 따지면 누가 보수이고 누가 진보일까. 답은 어렵지 않다. 쑥스러워하는 남자는 보수, 감탄하는 남자는 진보일 가능성이 높다. 하이트 교수는 “보수는 친숙하고 안전하고 믿을 수 있는 것을 선호하는 스타일, 진보는 진기하고 새롭고 다양한 것에 관심이 많은 타입”이라고 설명을 덧붙인다.
이야기를 국가 단위로 진전시키면 보수 세력은 국가 전체의 이익을 중시하고 정부 통제에 의한 ‘위로부터의 국가 운영’과 질서 유지에 강조점을 둔다. 반면에 진보 세력은 시민 각자의 기본권을 중시하고 사회적 약자 배려, 소통을 기반으로 하는 ‘아래로부터의 국가 운영’에 높은 점수를 준다. 국익보다는 개인의 존재와 가치가 먼저다.
새삼스럽게 보수와 진보의 분류방식을 꺼내는 이유는 우리에게 새롭게 나타나는 현상 때문이다. 즉 현재 권력인 진보 세력이 보수화하고, 보수 세력이 오히려 진보화하는 정치 지형의 대변동을 말한다. 혼란스럽다. 그래서 이 분야를 장기간 다뤄온 사회학자인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의 연구를 소개하려고 한다.
10년 전인 2010년 한상진 교수의 설문조사에서 진보 쪽 응답자는 ‘시민’을, 보수 쪽은 ‘정부’를 우선시했다. 당연한 반응이다. 그러나 올해 코로나 사태 이후에 같은 조사를 해 보니 진보는 정부를, 보수는 시민을 대변하고 있었다. 예컨대 ‘사회 위기 때 정부 결정을 따라야 하는가, 아니면 시민 의견을 존중해야 하는가’라는 문항에서 진보 쪽 응답자들이 ‘정부 결정에 따라야 한다’는 의견을 보수 쪽보다 더 많이 지지했다. 시민사회 입장에 있던 진보 지지자들이 국가권력 중심으로 생각이 바뀌어 버린 것이다.
이런 현상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박원순 사태에서 진보 성향이라면 박 시장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여비서 쪽을 더 보호하고 그가 당한 피해에 주목해야 한다. 박 시장은 하늘같이 높은 권력이었고 그에 비하면 여비서는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약자인데다 인권 등 기본권을 심각하게 침해당했기 때문이다. 이는 진보 보수를 떠나 옳고 그름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진보 쪽에서 오히려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하는 일이 계속되고 있고, 보수 쪽이 피해자 옹호에 적극 나서고 있다.
윤미향 의혹에서도 누가 봐도 사회적 약자는 “30년 동안 재주는 내가 넘고 돈은 그들이 벌었다”고 호소한 이용수 할머니 쪽이다.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모금과 지원이 윤미향 같은 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이뤄져 왔으므로 그 많았던 돈 관리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는 그들에게 쏠릴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용수 할머니의 하소연을 못마땅해 하는 쪽은 진보 진영이다.
코로나 사태에서는 그 변화가 더 확실하게 드러난다. 한국이 방역에서 아직까지 잘 대처하고 있는 것은 우리 국민의 철저한 대응과 다른 나라에 비해 잘 갖춰진 의료체계 덕분이기도 하지만 강력한 행정 통제도 크게 기여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QR코드를 이용한 전자출입명부, 이태원 클럽 사태 때 근처에 있던 1만명과 신용카드 이용자를 샅샅이 파악해 검사를 요구한 것은 정보 기본권을 심각하게 침해했다. 진보 진영은 ‘K방역’이라며 자화자찬만 했지, ‘빅 브라더 시대’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는 없었다. 진보 정권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허무는데 앞장서는 꼴이다.
이런 희한한 가치전도는 권력이라는 프리즘으로 보면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권력을 잡은 자들이 정권 수호를 위해 물불 안 가리고 있는 게 지금 우리 앞의 현실이다. 만약 코로나 사태가 악화됐다면 지난 4월 총선 때 여당이 고전했을 공산이 컸다. 코로나 극복은 이들에게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진보의 중요 가치인 인권 자유 같은 걸 따지기에 앞서 무슨 수로라도 코로나를 막아내야 했다. 이들에게 진보가 투철한 신념이었다기보다는 권력 획득을 위한 유리한 수단이었음을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진보 지지층도 뚜렷한 진보 정체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인상을 종종 받는다.
최근 재난지원금 수령해간 비율이 전체 가구 중 99.5%에 이르렀다는 소식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나서 기부를 호소한 뒤 정부는 최대 20%의 참여율에 2조8000억원까지 기부될 것으로 예상했으나 기부액은 고작 282억원(6월15일 기준)에 그쳤다. 참담한 실패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작지 않다.
첫째 기부를 호소하는 사람들의 이중성이다. 남에게 선행을 권유하려면 스스로 그만한 자격이 있어야 한다. 전부터 부동산 문제를 비판해온 이 정부의 고위공직자 중에서 다주택자들이 상당수에 이르고 이에 대한 여론이 악화된 뒤에도 강남 아파트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진보는 자신을 희생하는 자세에서 출발한다. 한국 진보의 민낯은 여기서도 확인된다. 일반 사람들이 이들의 기부 요청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짐작할 만하다.
두 번째는 우리의 여건이다. 불안의 시대가 찾아온 지 오래다. 젊은 세대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잡을 수 없는 안정된 일자리 앞에서 절망하고 치솟는 집값에 다시 주저앉는다. 기성세대도 답답하다. 100세 인생이라는데 가진 것은 별로 없고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뭐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으로 부동산에, 주식에 기웃거린다. 집권 세력은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아닌, 정부의 직접 고용과 소득주도 성장 등 끝 모를 포퓰리즘으로 일관하고 있다. 자선은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 이뤄진다. 99.5%의 수령율은 그런 불안 심리의 반영이다.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나. 기업 규제를 과감하게 풀어 새로운 성장 분야를 찾는 일이 절실하지만 어떻게 그 길을 찾아가야 하는지를 일러주는 정확한 지도는 우리 손에 없다. 그래서 난국을 타개해줄 탁월한 지도자의 출현을 자꾸 기다리게 되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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