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아주 보기 드문 독특한 이념분쟁을 벌이고 있다. 좌우 진영논리로 극단적 대립이 계속되면서 국민 간 갈등과 증오가 도를 넘었다. 이 같은 대립은 세대싸움, 지역다툼, 빈부갈등까지 한껏 부추기고 있는 중이다. 이에 따라 근본적인 해결방안이 멀어져 가고 국운 쇠락의 음울한 기운이 확산되고 있다. 부강한 국가와 잘사는 국민을 만들어 가기 위한 현안이 산더미처럼 산적해 있는데도 앞으로 나아가기는커녕 후퇴하고 있는 것이다. 이젠 냉정함을 되찾고 전혀 다른 눈으로 새로운 번영의 길을 찾아 나설 때다. 국민 모두가 조화롭게 하나가 돼 국운의 영속적인 발전의 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될 중차대한 시점에 있다.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국가로 성장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국민적 좌우명이 필요하다. ‘부의 열쇠 시즌2’를 통해 이 같은 국운 융성의 지혜로운 길을 찾아 보고자 한다.
|
Q. 민중을 주장하는 선한 정의가 왜 가공됐다고 보는지
A. 민중을 즐겨 쓰는 이념가들은 주인정신을 잘 잊는다. 이는 주인정신을 갖고 있는 국민에게 민중이라는 올가미를 씌워 노예정신을 심는 행위다. 영원한 약자나 빈자가 없는 이상 민중도 없다고 했다. 생명의 강인함은 주인정신에 있기 때문에 민중을 작위적·고의적으로 만들면 안 된다. (563쪽 : 아무리 약해 보이는 생명이라고 해도 맹수 못지않은 생명력을 유지하는 경우가 흔하다) 생명유지속성은 강자와 약자를 구별하지 않는다. 오히려 약자를 강자로, 강자를 약자로 얽히게 하면서 상호주의 얽힘이라는 공동선을 확장시키는 것이 생명유지속성이다. 이기적 이타성이라는 주인의식을 관조하고 매순간 이를 극한으로 수렴하는 노력 속에 민중이 자리하지 못하고 주인만 남는다. 다시 말해 민중이 이념의 선악논리로 가공되고 있는 비열한 현실을 절치부심 인지하면 노예정신이 파고들지 못한다. 작은 곤충들이나 그 보다 훨씬 작은 박테리아들까지 질긴 생명력을 보인다. 이념은 이 같은 생명의 조화로운 선율을 악하게 본다. 매 순간 극한의 노력이 살아야할 이유로 수렴되는 생명유지속성은 주인정신을 갖게 해주는 생명 방정식의 근(根)이다. 주인정신의 해(解)는 무수히 많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하지만 주인정신의 근(根)은 생명의 가치뿐이다. 주인정신을 가질 수 있는 수많은 길을 외면하게 하는 것이 민중 이념이다.
Q. 주인정신을 갖게 하는 생명유지속성이 고귀한 가치가 되는 이유는
A. 민중이 이념화 될 때 절대 가치로 여겨져야 할 생명의 존엄성이 무시되기까지 한다. 민중의 지배는 권력의 지배를 위한 허울로 전락한 것이 역사의 반증이다. 전체주의를 포장하기 위한 가림막으로 활용되기까지 하는 민중은 국가의 주인임에도 안타깝게 노예처럼 취급당했다. 주인은 책임·사랑의 정신이다. 국민은 책임·사랑의 정신을 본성으로 본유(本有)하고 있다. 책임·사랑의 정신이 국가라는 상호 이타적인 강한 얽힘을 만들어 내 왔다. 반면 이념적 민중으로 얽힌 국가는 이타적 얽힘이 약하고 이기적 욕망을 키웠다. 자칭 민중이라고 자임하는 프롤레타리아(인민) 독재와 현대 귀족노조의 권력화는 상징적인 사례다. 약자라고 해도 상생·협력은 책임·사랑 못지않은 주인정신이다. 강자가 되기 위한 약자의 논리가 상생·협력이라고 했다. 주인은 이처럼 약자·강자를 가리지 않고 가능한 만큼 생명의 가치를 가장 소중히 한다. 생명은 자유가 깃든 존엄성이다. 자유를 통해 부가가치가 창출되는 곳이 시장이라고 했다. 부가가치는 풍요로움을 통해 생명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도록 해 준다. 인간은 시장을 통해 자유의 본질인 존엄성과 풍요의 본질인 생명의 가치를 선사받는다. 자유시장이 정글의 질서처럼 냉혹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이타적 부가가치를 생산·공유하는 생명의 가치가 끊임없이 역동하고 있다. 정글의 모든 동물에게 정글은 먹이사슬에 억매인 것이 아니라 모두가 주인답게 자신의 생명가치를 치열하게 지켜가도록 하는 곳이다. (561쪽 :생명을 아는 동물은 정글의 질서 속에서 도전하는 자유정신이 강하다. 생명을 모르는 동물은 스스로를 울타리에 가둔 채 나오지 않는다) 정글을 벗어나는 것이 유토피아라고 느끼는 동물은 생명의 가치를 오히려 추락시킨다. 실제로 정글을 벗어난 동물은 생명유지가 불가능하다. 정글의 모든 동물은 각자의 생명가치에서 주인들이다. 생명유지속성은 지상의 냉혹한 삶 속에서 존재해야 할 고귀한 존엄성을 생산한다.
Q. 생명 방정식의 근(根)이 책임과 사랑의 의미를 어떻게 담고 있나
A. 국민은 국가의 주인으로 무기체 같은 유기체인 국가의 존엄한 생명을 유지시킨다. 또 국가는 주인을 통해 상호주의 주인정신을 지속 확장한다. 죽을 수 없고 죽어서도 안 되는 생명유지속성에서 국민과 국가의 소중한 가치가 함께 녹아 소용돌이친다. 국가가 추구하는 상호주의가 국민 상호 간 이타심으로 얽히기 위해서는 생명 방정식의 변수인 주인정신의 근(根)이 생명유지속성으로 풀려야 한다. 주인은 책임·사랑의 정신이라고 했다. 이타심의 얽힘이 국가의 생명을 유지시키고 국가는 다시 이타심의 얽힘을 확장해 준다. 따라서 생명의 가치에는 시공간을 넘어서는 초월적 힘이 자리한다. 이 힘은 매순간 도전을 멈추지 않는 자유의 역동이다. 자유에는 스스로 동인(動因)이 되는 신성의 원리가 담겨 있다고 했다. 도전 속에 자유의 힘이 꿈틀거린다. (563쪽 : 자유정신은 잠재된 본성에 모두 있다) 도전을 통해 책임·사랑의 범위가 확대된다. 국가와 국민은 책임·사랑의 방정식 또한 품고 있다는 것이다. 책임·사랑은 강자의 논리이면서 주인정신임을 거듭 상기해야 한다. 주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배수진을 치는 용기를 갖고 있다. 설사 힘이 없거나 약해도 주인은 나태하거나 게으름에 빠지지 않는다. 생명은 항상 역동하는 에너지의 가속운동이다. 단 한순간도 가속운동을 멈추지 않는 것이 생명의 본질이다. 가속계에서 생명은 주인정신이 없으면 존엄성을 상실한다. 생명의 가치는 죽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죽지 않으려는 의지다. 그래서 주인정신의 의지는 수많은 혼돈의 상황이 전개되는 네트워크에서 길을 잃지 않는 꿈과 희망이다. 이는 모두를 위한 비전이다. 주인정신은 타자들을 위한 부가가치 결실을 생산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어떤 고난과 난관에도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비전을 버리지 않으면 경쟁과정의 배타성조차 포용으로 전환된다. 더욱 강해진 포용력은 더 큰 책임·사랑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난다. 주인정신의 근에는 생명의 가치를 상호 존중하는 포용의 힘이 깃들어 있다.
Q. 도전적 자세에서 필요로 하는 초월적 힘의 정체가 포용인가
A. 자유시장은 경쟁과 차별이 늘 존재하는 곳이다. 그래서 약자의식이 발생할 텃밭이 자유시장이기도 하다. 실제로 시장에서 약자의식은 생멸을 반복한다. 이 때 약자의식을 민중이란 울타리에 가둬놓고 계급화 시키면 선한 행동처럼 여겨진다. 민중을 위한 것처럼 보이는 행동이 포용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약자의식을 옹립하는 것은 선하지 않다. 오히려 악한 동기를 갖고 약자의식을 떠받들기까지 한다. 민중은 오랫동안 그 상징적 키워드가 됐다. 하지만 민중이라는 잘못된 약자의식을 버린 국민은 오히려 강한 포용력을 갖는다. (472쪽 : 조건을 달지 않는 포용과 관용 그리고 용서까지 모든 것을 주는 것이 사랑의 진실성이다) 약자를 사랑하는 진정한 자세는 약자의식이 자유시장에서 태동하지 않도록 하는 강한 의지다. 마치 잡초를 제거하는 마음이 진정한 약자 편에 서는 자세다. 약자는 강자 정신을 품고 있다고 했다. 약자를 약자로 보지 않고 상생·협력을 통해 강자정신으로 키우고자 하는 의지와 행동이 약자뿐만 아니라 모두를 위한 길이다. 초월적 힘은 약자와 강자를 하나로 보는 의지이자 지혜라는 것이다. 의지는 끝이 없는 비순환 무한소수처럼 일종의 무리수이기는 하다. 변화무쌍한 자유시장에서 도전을 멈추지 않는 행동에는 규칙도 없고 예측할 수 없는 무리수가 따른다. 이 무리수를 지속하는 것이 의지이고 그 무리수에 따른 책임·사랑의 포용력을 키우는 것이 지혜다. 지식은 자신을 향하고 지혜는 타인을 향하며 지식은 울타리를 쌓지만 지혜는 울타리를 허문다고 했다. 약자·강자를 하나로 보고 포용을 담은 도전적 무리수는 하나의 결실로 수렴된다. 마치 무리수이자 초월수인 파이(π)나 오일러의 수(e)가 일반적인 수(數)로 활용돼 인류에게 상상할 수 없는 부가가치를 쌓는데 기여한 것과 같다. π와 e가 현대문명의 메가 기둥이 됐듯이 포용을 담지한 지혜로운 도전 또한 국민 모두에게 공존공영의 중대한 기여를 한다.
Q. 약자의식을 사라지게 하면 민중을 이용해 득세하는 허위가 사라질까
A. 국민은 주인이지만 주인됨을 방해하는 약자의식이 주인 사이에서 잡초처럼 자란다. 약자의식을 뿌리 뽑기 위해서는 모두가 주인이 되는 의지를 지혜롭게 유지하는데 있다. 이 의지를 지속하기 위해 약자·강자를 하나로 보는 초월적 눈이 필요하다고 했다. 민중 속 약자가 따로 없다는 믿음을 굳건히 할 때 약자·강자의 구분이 없다. 약자·강자가 구분되지 않거나 하나로 역동할 때 민중은 당연히 없다. 이 같은 약자의식 잡초를 제거하는 주역 또한 따로 없다. 국민 모두가 첨병이고 주역이며 자신이다. 주인은 무한 자유를 즐긴다. 수많은 무리수가 따르는 자유의 파도를 지혜롭게 탄다. 약자의식은 그 과정에서 뿌리 뽑을 수 있다. (185쪽 : 자유의지를 믿는 비전에는 신적 경지의 믿음까지 서릴 때 진정한 자유인의 모습을 갖게 된다) 자유를 타는 파도가 강력할수록 민중을 이용해 득세하는 허위가 발붙이지 못한다. 자유는 잡초를 제거하는 제초제와도 같다. 자유의 파고가 높을수록 그리고 그 파고를 타는 자유인들이 많을수록 민중을 앞세운 허위는 사라진다. 마치 유리수를 계수로 하는 어떤 다항식에서도 해(解)가 되지 않는 수가 초월수인 것처럼 민중을 계수로 하는 어떤 방정식에서도 해가 되지 않는 주인의식은 초월적 힘이 있다.
#box1#
Q. 주인의식인 초월적 힘을 국민 전부가 가질 수 없을 것 같은데
A. 초월적 힘은 강한 포용력을 근간으로 한다고 했다. 하지만 포용함과 대칭된 포용됨의 원리가 함께 깃든 것이 진정한 초월적 힘이다. 초월수는 자연수를 넘어 정수를 포용하지만 실수·복소수에는 포용된다. 초월수는 유리수가 아닌 기준으로 존재감을 삼아 포용하고 또한 포용된다. 초월적 힘은 약자·강자를 넘어 약자가 된 강자, 강자가 된 약자까지 변화 자체를 모두 수용한다. 따라서 약자·강자 모두 초월적 힘을 모두 잠재력으로 갖고 있다. 국민 모두가 초월적 힘을 갖고 있기에 이들 국민이 얽힌 국가가 강한 생명력을 갖는다. 국가도 생명처럼 존엄한 이유다. 국민이 초월적 힘을 갖고 있지 않다면 국가는 그 순간 존엄하지 않다. 국가와 국민은 항상 변수에 능동적이어야만 생명의 가치와 존엄성을 지킨다. 변수에 능동적일 수 있는 잠재역량이 또한 초월적 힘이다. 수많은 변수들을 수용하는 주인정신이 모두에게 이로운 부가가치를 만든다. 주인정신은 국민 상호 이로운 부가가치 생산성과 효율성에 관한한 불문율이다. (185쪽 : 불문율이 개입된 자유에는 성문화된 법을 앞선 것이 포섭되면서 탈법과 위법한 의지들이 그 안에서 당연히 제약된다) 주인정신은 자유시장의 정의를 실현시키는 불분율을 지켜간다. 보이는 성문법보다 보이지 않는 불문법이 매우 강력하다. 그래서 주인정신은 신성이 깃든 의지라고 했다. 신적 믿음은 불법을 넘어도 불문율은 넘을 수 없는 자율적 계시다. 국민 모두가 초월적 힘으로 상호 포용할 그릇을 가졌지만 동시에 자율적 계시를 통해 스스로 주인정신이 깃든 국가에 포용된다. 이 시스템 속에서 국민 스스로를 억압하는 민중 개념은 없다.
Q. 자유시장에서 고통 받는 민중은 언제든 적지 않게 존재하지 않는지
A. 민중을 몰이해하면 민중은 항상 존재하는 개념이다. 민중에 대한 선입견은 선악의 이분법 이미지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적개심을 품어야 할 적대적 관계가 민중의 대척점에 세워진다. 국민 간 자발적 갈등의 시작이 민중이다. 하지만 민중의 자존감은 선입견에 따른 착오이면서 이상 자가발전 하는 왜곡의 결과다. 민중은 자유의 존엄성을 위험한 벼랑 끝으로 내몰고 끝내 빈곤의 역습을 받는다. 이념적 민중이 일종의 정형화된 패턴을 지향하면서 갈등을 유발시킨 탓이다. (615쪽 : 자유의 패턴이 시장경제에 있다고 해도 자유는 비규칙적인 속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자유는 일정한 패턴을 유지하지 않는 역동성을 갖는다. 무리수나 초월수처럼 무한히 규칙을 갖지 않는다. 반면 인위적 패턴을 갖는 민중은 자유를 배척한다고 했다. 배타적 정의에 대한 일정한 패턴이 민중 속에 강열할수록 자유의 공기가 빠져나가면서 전체주의 성향이 나온다. 전체성은 민중을 억제하면서 민중을 더 안타까운 민중으로 만들고 그 민중은 결국 전체성의 권력기둥이 돼 준다. 반면 자유는 패턴이 있기도 하지만 없기도 한 이중성을 갖는다. 자유가 일정한 제도권 틀에서 패턴을 갖기는 하지만 성문법을 능가하는 불문율에서 자유는 무한한 패턴으로 분산한다. 정형화 되지 않는 자유에 정형화된 민중은 결합되지 않는다. 자유가 없는 민중은 없다는 것이다. 이념주의가 민중만으로 이상사회를 구현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공허하고 허망한 망상이다. (615쪽 : 자유가 규칙성을 드러내고 패턴의 해(解)가 드러나면 시장경제는 전진할 수 없다) 풍요로운 자유가 넘실대는 시장에서 민중은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한다고 믿도록 하는 이념가들의 선전선동이 여전히 통한다. 엄밀히 국민을 상대로 기망행위를 하는 모습이다.
Q. 국가가 통제하는 경제를 통해 민중을 구제하면 민중이 사라지지 않나
A. 약자·강자를 하나로 보는 눈과 자유의 눈은 엄밀히 민중의 허위성을 증거하는 연장선상에 함께 있다. 만물의 4대 힘인 강력·약력·전자기력·중력이 본래 하나의 힘으로 뭉쳐 있었던 것처럼 약자·강자도 자유시장의 순환 메커니즘이란 큰 틀로 보면 분리될 수 없는 개념이다. 약자·강자가 구분된 것처럼 보이는 것은 막연한 이상주의를 누구나 갖고 있기 때문이다. 완전한 평등에 대한 환상은 약자·강자를 완벽히 구분한다. 이는 요행·나태·게으름을 유발하는 씨앗이다. 반면 자유의 눈으로는 약자·강자가 구분되지 않는다. (629쪽 : 자유의 눈은 현상계를 한 차원 위에서 볼 수 있는 특수한 시력을 가졌다) 마치 땅만을 기어 다니던 개미가 하늘을 날아 땅을 보는 것과 같은 눈을 갖는 것이 초월적 힘이다. 자유는 통제받지 않는 자발성 역학이지만 가장 많은 통제를 받는 비자발성 역학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유에 주어지는 비자유는 자유를 위한 대칭성 때문에 엄밀히 비자유가 아니다. 오히려 자유를 위한 비자유는 가장 큰 자유다. 그 속에서 역동하는 책임·사랑의 에너지가 강열하다. 무한책임과 무한사랑을 지켜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자유를 통제하는 비자유의 아픔과 고통을 가장 큰 자유로 품어 함께 갖고 가야 한다. 물질의 초대칭인 반물질이 물질로 동반관계임과 같다. 이념주의는 이 같은 역학관계에서 민중이 양산되고 탄압되기까지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민중에 대한 환상이 만드는 민중은 환상일 뿐이다. 비자유가 무한자유임을 절절히 느끼면 민중은 없다. (629쪽 :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활동하는 자유 에너지는 사람에 의해 선과 악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칼이 되기고 하고 방패가 되기도 한다) 영원한 일방의 피해자는 자유시장에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해서도 안 된다. 자유는 민중을 만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민중을 구제하며 사라지게 하기도 한다. [계속]
[스카이데일리 알앤알(R&R, Rich-Research) 연구소]
후원하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