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으로 필요할 때마다 발병하는 개헌병이 또다시 도지고 있다. 대통령 선거가 1년도 채 남지 않은 예민한 시기에 집권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들이 앞 다퉈 블랙홀 같은 헌법 개정 이슈를 꺼내들고 나섰다. 언론의 관심을 끌어 후보 경선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려는 꼼수로 보인다. 개헌이라는 국가 차원의 대사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려는 불순한 동기라 지탄받아 마땅하다.
개헌 논의는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가 불을 지폈다. 이재명 경기도지사에 여론지지도가 밀리면서 반전을 노리는 이 전 대표는 16일 “내 삶을 지켜주는 민주주의를 위한 개헌을 국민 앞에 제안 드린다”고 말했다. 총리 자리를 박차고 대선 후보 경쟁에 뛰어든 정세균 전 총리도 “1987년 대통령 직선제 및 5년 단임제 개헌 이후 34년 동안 시대적 변화상이 헌법에 반영되지 않고 있다”며 개헌은 꼭 필요하고 빠를수록 좋다고 말했다. 전혀 설득력이 없고 공허하다.
상대적으로 느긋한 이재명 지사는 18일 “경국대전을 고치는 일보다 국민의 구휼이 훨씬 더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한다”며 개헌론에 거리를 뒀다. 민주당 의원연구모임 ‘민주주의4.0’ 내부에선 국무총리 외 국회 인준을 받는 부총리를 5,6명 추가로 두자는 등 청와대 비서실 중심의 제왕적 대통령제를 국무위원과 정당 중심의 대통령제로 개선하자는 개헌 아이디어가 줄곧 거론돼 왔다.
취임 직후부터 꾸준히 개헌론을 펴온 박병석 국회의장은 지난해 제헌절 기념사에서 “33년 동안의 낡은 옷을 벗어야 한다. 코로나 위기를 한고비 넘기는 대로 개헌 논의를 본격화하자”고 제안했다. 박 의장은 올해 신년 연설에서도 “권력분산과 국민통합의 제도적 완성은 개헌”이라며 올해가 개헌이 가능한 마지막 해라고 강조했다. 전형적인 바람잡이 어법이다.
일부 야당 의원도 호응하고 나섰다. 국민의힘 성일종·김은혜 의원은 “5·18정신이 헌법 전문에 들어가는 데 동의한다”고 말했다. 윤영석 의원은 “4년 중임 대통령제 개헌을 통해 제왕적 대통령의 권력을 강력히 견제하는 장치를 확실히 제도화하고 지방정부의 권한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도 17일 “다음 개헌에서 5·18 정신을 반드시 헌법 전문에 넣자”며 편승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아랍에미리트 방문 중 불쑥 대통령 제안 개헌안을 전자결재로 재가해 물의를 빚었다. 당시 개헌안은 헌법전문(前文)에 4·19 이외에도 부마항쟁, 5·18, 6·10을 넣고, 대통령 4년 1차 연임제와 토지공개념 명시, 지방분권국가 지향 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또한 기본권 주체를 ‘국민→사람’으로, ‘근로→노동’ 등 국체를 흔들만한 내용이 다수 포함돼 있어 거센 국민적 저항에 부딪혀 흐지부지 됐었다.
전문가들은 복잡한 역사적 사건에 관한 검증되지 않은 국가의 공식입장을 헌법전문에 독점적으로 넣으려는 발상은 전체주의적 월권으로 나중에 표현과 언론의 자유를 금지할 근거조항으로 악용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6·25 극복과 산업혁명 같은 긍정의 기억이 아닌 갈등과 분열, 분노와 저주, 저항과 항쟁의 역사만 서술하는 것은 국민의 자학이며 민족적 우울증이라는 비판까지 나왔다.
헌법은 한 나라의 얼굴이다. 국민의 삶과 생각은 물론 조상의 얼과 정신이 담긴 경전이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하며 개정된 현 헌법은 큰 문제가 없다. 단지, 30여년 됐다고 바꾸자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개변하는 시대정신보다는 오랜 세월 변하지 않는 웅숭깊은 담론·철학이 담겨야 한다. 함부로 손을 댔다가 개악하느니 차라리 현행 헌법을 잘 지키려 노력하는 것이 훨씬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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