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를 일으킨 것에 대해 사과드린다. 특히 주주, 투자자, 고객 그리고 동부그룹 임직원 여러분에게 깊이 사과드린다. 개인의 문제로 인해 회사에 짐이 돼선 안되겠다고 생각해 오늘 동부그룹의 회장직과 계열회사의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난다”
여비서 상습 성추행과 가사도우미 성폭력 혐의로 고발된 김준기 전 DB그룹 회장이 2017년 9월 경영일선에서 물러나면서 밝힌 입장문이다. 당시 대기업 오너가(家)의 비이성적인 일탈 행위가 잇따라 불거지면서 비난 여론이 들끓는 상황에서 김 전 회장은 회장 사임으로 서둘러 사태 진화에 나섰다.
앞서 김 전 회장은 2017년 성범죄 혐의로 피소돼 회장직에서 물러난 이후 2년 여간 질병 치료를 이유로 미국에 머물다 2019년 10월 귀국과 동시에 체포돼 재판을 받아왔다. 2심에서 이미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던 그는 이달 초 상고를 취하하면서 사실상 본인의 범죄를 인정했다.
김 전 회장이 최소한의 책임을 지고 사임했지만 DB그룹은 적지 않은 피해에 시달려야 했다. 소비자 신뢰 훼손은 물론 주주들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특히 기업 발전에 한 몸을 바쳤던 선량한 임직원들의 피해가 가장 컸다. 오너의 성범죄로 인해 DB그룹의 기업이미지 실추를 피하지 못하면서 당시 DB그룹 직원들 사이에선 회사 명찰을 내놓고 다니기 창피하다는 하소연마저 나올 정도였다. 가뜩이나 사회에 만연해 있는 반(反)기업 정서를 심화시켰다는 비판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김 전 회장이 지난해 4월과 올해 2월 성범죄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은 지 불과 몇 달도 지나지 않아 다시 경영에 복귀하면서 비난을 자초하고 있다. 지난 3월 DB그룹의 비금융 계열 지주사 역할을 하는 DB아이앤씨에 미등기 임원으로 선임된 데 이어 지난달에는 DB그룹 제조부문을 이끄는 핵심 계열사 DB하이텍 미등기 임원으로 선임되면서 경영 일선에 복귀했다. 직접 경영보단 창업자로서 그룹을 이끌어온 경륜을 바탕으로 자문 역할을 맡을 거라는 게 DB그룹 측 설명이다.
그러나 성범죄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자 마자 별다른 반성이나 자숙의 시간도 없이 경영에 복귀했다는 점에서 도덕불감증이 심각한 수준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상식적으로 오너일가가 아니었다면 성범죄를 저지른 인물이 기업의 고위임원으로 재선임될 가능성은 전무하다. 단순히 오너라는 이유만으로 별다른 제재도 없이 경영 복귀를 묵인하는 건 수많은 사회적·경제적 문제를 유발시킨다.
적게는 DB그룹의 지배구조의 취약성과 준법성 결여를 보여주는 데 그치지만 크게는 사회에 무분별한 반기업정서를 확대하는 도화선이 될 우려가 크다. 재벌이라면 사회적으로 비난받을 만 한 일탈을 한다고 해도 경영에 복귀해 억대 연봉을 챙긴다는 부정적 인식을 심어줄 수 있어서다. 이미 김 전 회장 스스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점에 대해 사과하고 사임해놓고도 미등기 임원으로 경영에 다시 복귀한다는 건 진지한 반성이 결여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김 전 회장이 미등기 임원에 선임되면서 그가 연간 받는 보수만 3억원이 넘을 것으로 전망된다. DB아이엔씨는 지난해 미등기 임원 14명에게 총 27억3500만원을 지급했다. 1인 평균 2억원에 달하는 금액이다. 같은 기간 DB하이텍은 30명의 미등기 임원에게 총 79억9700만원을 지급했다. 1인 평균 2억6700만원 수준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오너 입김에 휘둘릴 수 밖에 없는 DB그룹 지배구조의 취약성도 거론된다. 도의적 책임은 제쳐두고라도 사내에 준번경영 통제 시스템은 커녕 오너일가를 견제하거나 감시할 장치는 사실상 전무하다. DB아이엔씨만 보더라도 이사회 내에 문덕식·강운식 대표가 소속돼 있는 경영위원회만 있을 뿐 이사회 투명성을 강화하기 위한 사추위(사외이사추천위원회)조차 없다. 이사회 자체가 오너일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힘든 구조인 셈이다.
애당초 김 전 회장이 자문 역할만을 원했다면 굳이 미등기 임원이 아니더라도 그가 가진 지분과 아들인 김남호 회장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었다는 점은 이러한 비판에 무게를 더한다. DB그룹이 고객과 주주, 임직원에 대한 신뢰가 아니라 오너일가 개인의 사익을 우선시하는 도덕불감증을 해소하지 않는 한 DB그룹이 내건 사회적 책임과 ESG는 공수표에 불과하다.
기업가정신과 혁신으로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간다며 DB그룹이 내세운 슬로건(Dream Big)이 도덕불감증의 줄임말이라는 오명을 얻기 전에 김 전 회장과 DB그룹이 결자해지하는 자세로 책임감 있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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