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 작가의 전시를 보러 길을 나섰다. 이번 전시장은 흔히 보던 전시장이 아니다. 제조 공장이라는 조금 낯선 장소에 있는 문화공간이다. 전시장인 문화공간 ‘예술의 시간’을 찾아 독산역에서 하차했다. 필자도 16살 소년시절, 성남 상대원동 공단에서 1년 남짓 공장생활을 해 본 경험이 있었던 터라 공장 내 문화공간이라는 장소에 더 마음이 끌렸던 터다. 공장이라 하면 소음과 분진·고된 잔업 등이 먼저 떠올랐는데, 문화 향유라니 얼마나 획기적 발상인가. 물론 폐창고나 폐공장 같은 공간을 문화공간으로 재생시키는 일은 많지만 생산활동 중인 현장에서 일정한 공간을 할애하여 질 높은 문화예술 프로그램들을 가동시킨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역에서 불과 3분여 걸어 ‘㈜영일프레시젼’이라는 공장에 당도했다. 반도체 관련 제조업체여서인지 쾌적하고 조용하다. 기업이 문화공간을 설립하고 운영하는 것은 홍보가 주된 목적이기도 하지만 여기는 딱히 홍보를 필요로 하는 곳도 아닌 것 같다.
4층짜리 건물의 2층부터를 문화공간으로 리모델링한 ‘예술의 시간’은 창고 같은 느낌의 빈티지 분위기를 내는 복합적 공간으로 조성되었다. 점심시간 무렵이어서인지 이용자들이 제법 많이 눈에 띄었다. 회사 직원들이나 외래 방문자들 모두 이색적 공간과 시간을 즐기는 모습이다. 어떤 기업의 생산 현장에서도 이런 미적 복지의 사례를 본 일이 없다. 물론 기업 내 구성원들만을 위한 문화공간은 아니다. 2020년 개관 이래 퀄리티 높은 컨텐츠의 기획과 프로그램 운영으로 금천 지역의 주요 문화거점으로 자리 잡아 문화애호가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공간이다. 이러한 대안공간의 확산이 우리 시각문화의 저변을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성장시키며, 이러한 사례들이 장차 국제적으로도 또 하나의 문화 모델로서 평가받게 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예술의 시간’이 가지는 공간적 특성과 김유정의 ‘유희랜드’라는 작업이 참 잘 어울리는 조합 같다. 김유정의 작업은 일찍부터 생태와 치유를 핵심적 주제이자 과제로 여기고 있었으니 말이다. 전시장은 온통 이끼 같은 ‘틸란드시아’로 뒤덮여 있다. 작가가 즐겨 사용하고 있는 식물로 그 자체가 환경친화적인 역할 외에도 의미론적 역할을 수행하는 도구이자 장치로 사역되는 것이다. 공간마다 수북이 쌓아 놓은 연출 방식이 종전의 틸란드시아 작업들과는 조금 다른 데가 있다. 전에는 오브제가 어떤 지지체 역할을 하면서 그것의 정체를 완전히 숨기는 연출 방식으로, 틸란드시아 자체가 표현의 물성적 매개 역할을 수행하곤 했다. 예전 작업에선 덤불 속에 감추어진 오브제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던 것과 달리 이번 작품들엔 안에 있는 오브제의 정체가 어느 정도 인지 가능한 정도로 드러나 있다.
‘유희랜드’라는 전시 타이틀에서 알 수 있듯이 틸란드시아 덤불 안에는 놀이동산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놀이기구나 장치들이 있다. 실제 레디메이드 오브제이거나 다양한 축척으로 제작된 의사(疑似) 오브제들로 보인다. 놀이기구 오브제들과 식물의 결합으로 기묘하고도 환상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판타지가 연출되고 있다. 여기서는 틸란드시아가 덮여 있다는 정황은 그것들이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방치 상태라는 것, 다른 한편으로는 계속 살아서 자라고 있다는 것을 동시에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필자가 놀이동산이란 곳을 다녀 본 경험이 별로 없어서 잘은 몰라도 연식이 많이 지난 놀이기구의 클래식 같은 느낌이 든다. 놀이라는 것도 몇 바퀴 돌고 나면 더 짜릿한 재미나 스릴을 찾기 마련이다. ‘호모 루덴스’는 어쩌면 끝없는 놀이에의 탐닉을 운명으로 갖고 태어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탐닉의 과잉이나 중독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전쟁이라는 것 또한 그 하나의 연장선에 놓인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작가의 ‘유희랜드’를 시각적으로 보면, 거미줄과 먼지로 뒤덮인 과거의 유적들을 연상시킨다. 이렇게 독해를 한다면 이 연출은 작가에게 딜레마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의 알레고리로 접근한다면 여러 각도에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단순히 과거의 즐겁고 행복했던 때, 즉 화양연화 같은 시간들을 회고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 사물들이 왜 과거의 것이 되었을까. 현재도 유용하게 사용 가치를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방치되어 있는 것일까. 우연한 방치가 아니라 동시대 문명에서 더 이상 유희적 기능을 갖지 못하는 한계 효용을 시사하고 성찰하는 것은 아닐까.
옴니버스 형식의 전시에서 다소 조연급의 비중으로 등장한 이전의 양식들에 대해서도 몇 마디 언급을 하고 싶다. 역시 작가 작업의 압권은 예나 지금이나 프레스코 양식인 것 같다. 표현의 깊이나 심미성 등에서 성취도가 높이 평가되고 있는 양식이다.
이번 전시에는 프레스코 작품이 많이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시멘트 벽돌이 그대로 노출된 전시장 벽을 배경으로 걸린 프레스코 회화는 효율적으로 설계되고 통제된 전시공간인 화이트큐브에서와는 다른 독특한 감각을 선보이고 있다. 물성이나 색조·분위기 등이 회벽(灰壁) 화면과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루게 된 것 같다. 흑백의 모노톤으로 식물들이 편재해 있는 작가의 재현 풍경은 표현의 디테일에서도 독창적인 면모가 두드러진다. 혼돈이나 폐허의 상황 속에서 생태의 심미성과 생명력을 더 대비적으로 강조할 뿐 아니라, 그것이 위치하는 공간 자체를 심미적으로 변환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점에서 라이트박스 양식의 유형들과도 대조가 된다. 위에서 말한 프레스코 양식이 관조적으로 자연스럽게 시간을 두고 주변과의 조화를 이룬다면, 라이트박스 양식은 빛을 매개로 공간과 관객의 물리적·심적 거리와 감성을 반사적으로 반응하게 하는 힘을 가진다. 비슷한 물리적 조건을 공유한 광고 매체의 경우와는 다르게 정보와 기호의 생략과 단조로운 환영만으로 생소하면서도 익숙한 신비적 관조의 경험을 선사한다. 흥미로운 것은 전자가 적절한 면적으로 조율될 필요가 있는 반면, 후자는 크면 클수록 효과적이라는 점이다. 특히 현란한 가현 운동도 없이 정적인 이미지만을 통해, 그야말로 아날로그적 방식으로 되돌아가 조용히 펼쳐지는 은유의 판타지는 우리 전통 창에서 볼 수 있는 실루엣의 심미성을 재발견하게 해 주고 있다는 점도 음미해 볼 만하다. 분명한 것은 모든 양식들이 치유로 수렴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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