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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삼국지 [124] 광개토태왕 ①
서늘한 바람이 나뭇잎 언저리를 붉게 물들이고
필진페이지 + 입력 2023-07-12 06:30:10
 
 
 
 
 
서력 391년 7월, 북방에는 어느덧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나뭇잎 언저리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곧 길고 지루한 겨울이 올 거라는 신호였다. 단풍으로 시작하는 북쪽의 가을은 짧지만 강렬했다.
백라관(白羅冠) 아래 보이는 짙은 눈썹이 잉걸처럼 꿈틀거렸다. 광채 나는 눈은 좌중을 압도했다. 광개토태왕은 호선(毫扇)을 들어 좌중의 시선을 모았다.
“원통하게 돌아가신 조왕(祖王)의 한을 풀어드릴 때가 왔소. 모든 준비가 끝났으니 백제 정벌에 나서겠소.”
고국원왕의 동생 고추대가 고무(高武)가 나섰다.
“무도한 백제군의 유시(流矢)에 선대왕을 잃었던 날을 떠올리면 지금도 온몸을 난자당한 듯 고통스럽습니다. 이번에야말로 백제를 단죄해야 합니다. 늙었다 생각하지 마시고 소신을 선봉에 세워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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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대인 우나굴이 나서서 고무를 제지했다.
“신중하셔야 합니다. 후연(後燕)의 모용수(慕容垂)가 전연의 영토를 회복하고 국력을 키우고 있습니다. 우리가 백제를 공격한 틈을 타서 저들이 쳐들어온다면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근래 세력을 규합한 북쪽의 거란 또한 국경을 넘나드는 일이 잦습니다. 철저히 대비한 후에 백제를 공격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대의 판단은 그르지 않소. 하지만 우리가 북방의 침략을 두려워하여 움직이지 않는다면 아무 일도 이룰 수 없소. 비록 위험 부담이 있어도, 백제가 우리의 힘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는 지금이야말로 공격의 적기요.”
태왕은 차분하면서도 자신감 있게 신하들을 설득했다. 이에 북부대인 아불파연이 나섰다. 그는 지난날 전연과의 싸움에서 장렬히 전사한 아불화도가(阿佛和度加)의 아들이었다.
 
“폐하의 명에 따라 군제를 개편하여 철기군을 강화하고 수군을 양성했습니다. 비축한 군량미도 충분합니다. 군사들도 사기충천하여 출전의 날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태왕은 고개를 끄덕이고 대신들을 둘러봤다. 눈길이 신하 하나하나에 머물 때마다 그의 굳은 의지가 전해졌다.
“여러분의 충정과 염려는 잘 알고 있소. 승산이 없다면 절대 출전하지 않소. 짐의 결정을 믿고 따라주길 바라오.”
태왕의 불편부당(不偏不黨)한 언행은 신하들에게 믿음을 주었다. 단순히 원한에 눈먼 자의 폭주가 아니었다.
우나굴을 비롯해서 원정을 반대하던 신하들도 진심으로 태왕의 뜻을 받들었다.
출전 명령이 하달되자, 고구려군은 깃발을 펄럭이며 도열했다. 그 모습이 사자들의 무리가 먹이를 포착하고 몸을 떨쳐 일어나는 것 같았다.
 
광개토태왕은 친히 4만의 군사를 이끌고, 패하 이서의 요충지인 치양으로 쳐들어갔다. 백제의 주력 부대가 있는 치양성만 손에 넣으면 구두성과 치악성은 가만히 있어도 항복할 것이었다.
태왕은 치양의 전력을 가늠해보기 위해서 말갈 기병 5천을 먼저 내보냈다. 말갈군은 주로 경기병(輕騎兵)으로 이루어져, 나아가고 물러나기가 쉬웠다.
치양성은 백제 최고의 세도가인 진가모의 동생 진문(眞文)이 지키고 있었다. 그는 형의 후광을 업고 치양성주가 된 자로 공명심만 높고 어리석은 인물이었다.
 
진문은 고구려 군사들이 출현했다는 소식에 지레 겁을 먹었다. 그는 성문을 걸어 잠근 후, 성루에 올라 고구려군의 동태를 살폈다. 고구려군은 진문의 우려와는 달리 수도 적을 뿐 아니라 기세도 대단치 않았다.
이를 보고 자신감을 얻은 진문은 부장 맹봉(孟鳳)에게 성문을 열고 나가 싸우도록 했다. 맹봉은 싸움터에서 잔뼈가 굵은 장수였다.
맹봉이 황급히 간한다.
“소장이 듣기로는 고구려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왔다 합니다. 왕의 친정이라면 최소 3만의 병력을 될 텐데, 눈앞에 보이는 군사는 너무 적습니다.”
맹봉의 진언을 듣고, 진문은 슬그머니 걱정됐다. 그 역시 광개토태왕의 명성은 익히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문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맹봉에게 단단히 이른다.
“5천의 군사를 이끌고 나가 싸우는 척하면서 고구려군의 형세를 살펴라.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바로 성으로 돌아오라.”
내키지는 않았지만, 상관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맹봉은 할 수 없이 군사를 이끌고 성문 밖으로 나갔다.
 
맹봉의 군사가 성문을 나서자, 고구려 군사들이 일제히 몰려왔다. 성 위에서 이를 지켜본 진문은 궁수들에게 활을 쏘게 했다. 화살은 허공을 가르며 빠르게 날아갔다. 앞서 달리던 고구려 기병 하나가 살을 맞고 말 아래로 떨어졌다. 뒤이어 수십의 군사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겁을 먹은 고구려군은 앞으로 나아갈 엄두를 못 내고 활의 사정거리 밖으로 물러났다.
백제군은 때를 놓치지 않고, 굶주린 이리 떼처럼 고구려 군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백제군의 무서운 기세에 눌린 고구려 군사들은 제대로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달아났다.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백제군은 신이 났다. 말리는 맹봉의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아나는 고구려군을 맹렬히 추격했다. 성에서 30여 리 떨어진 곳에 이르렀을 때, 간신히 선두를 따라잡은 맹봉은 추격을 제지했다. 혹시나 있을지 모를 매복을 두려워해서였다.
 
진문은 크게 기뻐하며 성문을 열고, 맹봉을 맞이했다.
“오늘 보니 고구려군도 별 게 아니구나. 저런 형편없는 군사로 우리 대백제의 영토를 넘보다니, 분수를 모르는 자들이 아닌가.”
한껏 고조된 성주와는 달리 맹봉은 신중했다.
“이상합니다. 도압성에서 싸울 때만 해도 고구려 군사가 이처럼 무기력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우리를 방심시키려는 계책인 듯합니다.”
“눈으로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하느냐! 저들은 그저 헛된 이름만 드높았던 것이다!”
맹봉이 충심으로 간했지만, 초전에 승리한 진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다음 날, 고구려 기병이 다시 치양성 앞에 나타났다. 전날의 승리로 기고만장해진 진문은 보고를 받자마자 군사를 거느리고 성 밖으로 나가려 했다. 맹봉이 한사코 말렸지만, 공을 세울 욕심에 눈이 먼 성주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리 겁이 나면 너는 성이나 지키고 있어라.”
진문은 수하를 물리치고 말에 올랐다.
진문이 군사를 이끌고 나갔다. 고구려 진영 가운데 태왕의 깃발이 펄럭였다.
“담덕이란 놈이 제 할아비 뒤를 따르고 싶은 게로구나.”
진문이 호기를 부리자, 장수들도 덩달아 웃어댔다.
진문이 창을 들어 좌우를 가리키니, 양쪽에 포진해 있던 백제의 기병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고구려 진영으로 달려들었다. 고구려군은 백제군의 진격을 막고자 활을 쏘았다. 그러나 무서운 기세로 달려드는 백제 기병을 막아낼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뒤늦게 기마군을 동원해서 길목을 차단했지만, 기동력을 자랑하는 백제의 경기병에게 허무하게 무너졌다.
방어선이 순식간에 뚫리자, 고구려 장수들은 허둥지둥하는 군사들을 독려해 대열을 갖추려 했지만, 역부족으로 보였다. 싸울 의욕을 잃은 고구려군은 창을 끌면서 북으로 달아났다. 북쪽은 멸악산에서 뻗어 나온 줄기가 가로막고 있어 지세가 험했다.
 
진문은 고구려군이 험한 산지에 막혀 달아나기 어려울 거라 여기고 쾌재를 불렀다. 고구려 군사들이 간헐적으로 저항하기는 했지만, 질풍노도처럼 달려드는 백제군의 적수는 아니었다.
추격군의 선봉에 서서 한참을 달리던 진문은 저 멀리서 펄럭이는 고구려왕의 깃발을 발견했다. 그의 심장이 두방망이질하기 시작했다. 진문은 오직 깃발만 보고 달렸다.
한참을 쫓다 보니 어느새 오르막길에 접어들었다. 좌우는 울창한 숲이었다. 나무가 너무 빽빽해서 속이 보이지 않았다. 이때, 깃발이 숲길에 들어서는 듯하더니 어디론지 사라졌다. 진문은 조금 당황했지만, 곧 냉정을 되찾고 군사들을 보내 고구려왕의 행방을 찾게 했다.
 
백제 군사들은 고구려왕을 잡기 위해 앞을 다투어 숲길을 달렸다. 한참을 추격하니 초원처럼 보이는 넓은 구릉지가 나타났다. 지형이 평지와 산지의 중간쯤 되어 보였다.
백제군은 어두운 숲에서 빠져나온 것만 기뻐서 구릉지로 들어섰다. 그래도 고구려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백제군은 한숨을 놓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순간 철커덕거리는 금속성의 소리가 사방의 숲에서 들려왔다.
진문은 무겁고 날카로운 소리를 듣고 가슴에 압박감을 느꼈다. 말들도 불안해서 꼬리를 흔들었다. 금속성은 천제(天祭)에서 신칼 부딪치는 소리처럼 점점 격렬해졌다.
이때, 후위에서 비명이 들렸다. 놀란 진문은 재빨리 뒤를 돌아봤다. 어느새 새카만 철갑들이 산길을 온통 뒤엎으며, 초원으로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죄진 자를 벌주기 위해 옥황상제가 보낸 천군(天軍)의 모습이 이러할 듯했다. 진문은 공포감에 사로잡혀 한동안 그 자리에 굳은 듯 섰다.
고구려 진영에서 북소리가 둥둥 울렸다. 말까지 온통 철갑을 두른 고구려 기병이 창을 하늘로 치켜들고 백제 군사들에게 달려들었다. 말발굽 소리와 말 울음소리로 천지가 진동했다. 천군의 위용을 뽐내는 철기병 앞에서 백제군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갔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진문은 오줌을 지릴 정도로 겁에 질렸다. 부하들이 처참히 죽어가는 아비규환 속에서 그는 달아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창끝에 반사된 빛이 진문의 눈을 찔렀다. 정신이 번쩍 든 진문은 살아야 한다는 본능이 들었다. 그는 창을 겨누고 포위망을 좁혀 오는 철기군에 맞섰다. 그래 봐야 철벽에 갇힌 신세였다. 허우적거리며 사방에 칼을 휘둘렀지만, 허공을 가르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진문은 헛손질하다가 몸의 균형을 잃고 말 위에서 떨어졌다. 그는 바닥에 엎어져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했다. 이제 꼼짝없이 죽을 판이었다.
진문이 죽음을 기다리며 눈을 질끈 감고 있을 때, 갑자기 창칼이 부딪치는 소리와 기합 소리가 울려 퍼졌다. 뒤이어 누군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깊은 우물 속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아득했다. 안간힘을 다해 일어나보니, 인간 철벽이 갈라지면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맹봉이 말을 몰고 달려 들어왔다.
“어서 말에 올라타십시오!”
진문은 죽을힘을 다해 맹봉의 뒤로 뛰어올랐다. 맹봉은 자신이 피투성이임에도 스스로 몸을 방패 삼아 날아오는 창칼로부터 진문을 보호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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