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2월27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한·러 정상회담을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25년간 외교·안보를 취재해 온 이하원 조선일보 기자는 이날 한·러 정상회담 이후 국빈 만찬장에서 발생한 비사(秘事)를 폭로했다. 사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수혁 당시 외교부 구주국장(차관보 겸 북핵 6자회담 수석대표)은 이재춘 당시 주(駐)러시아 대사를 급히 만찬장 밖으로 불러내 충격적 내용을 보고했다. 국회 본회의장에서 푸틴 대통령이 행할 연설문을 입수했는데 연설문에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 국장이 러시아 측 실무진에게 연설문 수정을 요구했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사안의 심각성을 파악한 이재춘 대사는 곧바로 만찬장으로 들어가 로슈코프 러시아 외무차관을 불러 연설문 관련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자 로슈코프 차관은 프리호드코 외교수석과 이바노프 외무장관을 불러냈다고 한다. 이 대사는 주한미군 관련 내용을 삭제하라고 말했다. 만약 초안 그대로 연설하겠다고 하면 푸틴의 국회 연설 일정은 취소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이 대사가 강경하게 대응한 이유는 한·러 정상회담 공동성명을 통해 한국 측이 당시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반대하는 탄도탄요격미사일(ABM)조약의 ‘보존과 강화’ 조항이 포함된 공동성명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한국이 ABM을 지지한다는 입장이 알려진 상황에서 푸틴이 국회에서 주한미군 철수 연설을 할 경우 파장이 걷잡을 수 없게 커질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이에 러시아 측은 자신들끼리 협의를 거친 후 연설문 초안에 담긴 주한미군 철수 부분을 볼펜으로 지웠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청와대 실무진은 푸틴이 마음을 먹고 국회에서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면 막을 방법이 없기에 푸틴의 국회 연설이 끝나는 순간까지 마음을 졸였다고 한다.
23년이 흐른 푸틴의 반미 성향은 잦아들었을까.
알렉산드르 마체고라 주북 러시아 대사는 6·25 전쟁 74주년을 맞아 지난달 평양에서 열린 대규모 반미 집회에 참석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여기에 푸틴을 30년 넘게 연구한 것으로 알려진 현승수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지난달 20일 통일연구원이 개최한 ‘푸틴의 평양 방문과 러·북 관계 전망’ 세미나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이 종식되어 포탄 공장으로서 북한의 가치가 상실되면 러시아가 북한과의 관계를 저버릴 것이라고 속단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러시아의 최종 목표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승리가 아니라 미국과 서방의 분열, 다극화 세계의 실현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미국과 나토를 상대로 일전불사의 의지를 다진 러시아 입장에선 반미 전선을 구축하며 같이 투쟁할 북한은 소중한 전략적 자산이라는 주장이다. 또 북한을 활용한 러시아의 대외 전술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까지 증폭될 수 있다는 게 현 위원의 전망이다.
그는 이 때문에 경제적 이익으로 맺어진 한·러 관계가 쉽게 복원되기 어려울 것으로 내다봤다. 현 선임연구위원은 “(한국과 러시아가 우호적으로 지낸) 과거 30년은 잊어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푸틴은 반미 전선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더 나아가 앞으로 북한을 활용한 대외 전술을 펼칠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윤석열정부의 외교·안보 라인은 우크라이나전이 끝나면 러시아가 북한을 버리고 한·러 관계를 복원할 수 있다는 안일한 생각을 접어야 한다. 대신 한반도와 동북아시아 역내 안정을 위해 러시아를 상대로 어떤 외교를 펼칠지 고심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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