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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190] 절벽에서 떨어진다 해도
불안을 넘어서는 용기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10-15 06:30:10
 
 
나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었다. 그래도 내가 지금 붙잡을 건 에바뿐이었다. 나는 간절히 매달리듯 그녀에게 다시 물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무엇을 믿으란 겁니까? 어떻게 아무것도 모르는 나 자신을 믿을 수 있단 말인가요?”
“눈을 가리고 걸을 때, 옆에서 길을 안내하는 사람을 믿었겠지요? 그러지 않고서는 한 발도 뗄 수 없었을 테니까요.”
 
나는 하운이 내 팔을 붙잡아 주었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무훤 군이 믿은 것은 정말 그 사람이었습니까? 혹시 당신 자신은 아니었습니까?”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에바의 자애로운 눈동자를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믿음이란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이기게 하는 용기 있는 마음입니다. 본능적인 게 아니라 생존을 위해 2차적으로 생겨난 마음의 가지인 것이지요. 내일은 생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항복하지 않으려는 의지 말입니다. 무훤 군. 갖지 못할 것을, 빼앗길 것을 걱정하지 마세요.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마세요. 아무것도 볼 수 없다 해도, 당신의 팔을 꼭 붙잡고 이끄는 운명을 믿고 따라가세요. 태풍이 당신을 뿌리째 뽑아 절벽 아래로 내던진다 해도 죽지 않을 거라고, 당신의 생명을 신뢰하세요.”
 
“뿌리 뽑힐까 봐, 내던져진 채 죽을까 봐 너무 겁이 납니다.”
 
나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내 안의 두려움을 고백했다.
 
“욕심이 많다고 흉보겠지만, 이만큼을 살고도 나 또한 죽는 게 썩 반갑지는 않아요. 그러나 죽음은 끝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날 평화롭게 합니다.”
 
에바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주가 영원하다면 생명도 영원하지 않을까요.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라면 지금쯤 우주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을 테니까. 생각해 보세요. 죽는 것들은 최선을 다해 죽어요. 두려워서 망설이고 단념하는 마음조차 살기 위한 최선의 선택일 때도 있지요. 그 결과 그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가을에 떨어진 잎은 내년 봄에 꽃피울 나무의 거름이 되지요. 지난여름 매미는 죽었지만 그의 자손은 17년 후 세상에 나와 즐겁게 노래할 테고요. 바이러스조차 죽이고 나면 훨씬 더 강해져서 돌아오곤 하는걸요. 무훤 군,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면, 생명이 이어진다는 뜻 아닐까요. 지금 여기에서 내가 완성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지 모르지만 아버지와 아들이, 어머니와 딸이, 또 아들의 아들이, 딸들의 딸들이 생명을 끝없이 이어 가는 겁니다. 무훤 군, 아쉬움이 없어지면 두려움이 사라져요. 만약 두려움을 놓을 수 있다면….”
 
에바는 잠시 말을 멈추고 멀리 어비수스의 중심, 우주의 한가운데를 바라보았다.
 
“그럴 수 있다면 죽음을 이길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시선을 돌려 내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던 에바가 더욱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뜻인지 모르면서도 죽음을 이길 수 있다,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동안 울음은 그치고 마음은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제야 에바가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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