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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공작원 김동식 회고록-죽기 위해 살아야 하는 운명
[평양에서 왔습니다] <9> 스파이 접선하듯… ‘모란봉 여관’ 찾아가라
김동식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2-18 06:30:39
▲ 김동식 前남파공작원‧대북전략컨설팅 대표
 
 
말이 씨가 되다
 
도당 청사 정문에서 접수를 하고 기다리니 간부과 지도원이 나왔다. 그가 나를 안내해 사무실로 들어갔는데 들어서면서 보니 또래 친구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고 나 혼자였다. 그래서 도당 지도원에게 다른 친구들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 우리 황해남도에서 너 혼자 올라가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번에 중앙당 지도원이 너희 학교에 갔을 때 이야기한대로 그 누구도 따라가는 사람 없이 너 혼자서 평양에 가야 해. 그때 큰소리쳤으니까 갈 수 있겠지? 이번에 정말 너 혼자서 가는 거야.”
 
물론 나중에 다른 분야로 선발된 친구들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처음 도당에 올라갔을 때 청사에 모였던 200~300명 가운데 최종적으로 10여 명만 남아 있었고, 또 내가 평양에 올라갈 당시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도당 지도원은 평양에서 절대로 자유주의(무단행동) 하지 말고 간부들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면서 앞으로 지켜야 할 행동 방향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주었다.
 
“네가 평양에 도착해서 찾아가야 할 최종 목적지는 모란봉여관이야. 내가 그곳까지 가는 방법을 알려 줄 테니 잘 들었다가 그대로 하도록 해. 네가 열차를 타고 평양에 도착해서 하차할 역은 대동강역이야. 대동강역에 도착해서 개찰구를 빠져나간 다음 우측으로 300m가량 가는 거야. 그러면 거기에 대동강역과 모란봉경기장(지금의 김일성경기장) 사이를 왕복하는 무궤도전차가 있어. 그것을 타고 마지막 정류소까지 가서 내리면 거기가 모란봉경기장이야.
 
모란봉경기장에서 좌회전해서 300~400m가량 가면 좌측에 교예극장(서커스극장)이 보이고 우측, 그러니까 교예극장 맞은편에 높은 아파트가 있는데 그 아파트가 바로 네가 찾아가야 할 모란봉여관이야.
 
모란봉여관에 도착해 중앙당에서 불러서 왔다는 것과, 황해남도에서 왔다는 것, 그리고 네 이름을 이야기하면 거기에서 방을 배정해 주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 행동 방향을 알려줄 거야. 그다음부터 그곳에서 지시하는 대로 따르면 돼. 그럼 내가 이야기한 내용을 다시 네가 말해봐.”
 
마치 어렸을 때 본 탐정영화에서처럼 접선 장소를 가르쳐 주는 것 같았다. 그에게서 들은 내용을 내가 천천히 이야기하자 그는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또다시 물었다.
 
“너 정말 찾아갈 수 있겠지? 하여튼 이번에 이렇게 자세히 가르쳐 주었는데도 찾아가지 못하면 안 돼. 그러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정확히 찾아가야 돼. 알았지?”
 
“알겠습니다.”
 
사실 평양은 서울을 비롯한 대한민국의 다른 대도시와 비교해 보면 복잡하다는 말 자체가 어울리지 않는 도시이다. 그러나 북한에는 큰 도시가 평양밖에 없으니까 당연히 평양이 가장 복잡한 도시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위에 언급한 어린 시절의 기억처럼 나 역시 그때까지만 해도 별 수 없는 시골 촌놈이었다.
 
도당 간부과 지도원은 다시 한번 평양 모란봉여관까지 찾아가는 방법과 도착해서 지켜야 사항을 강조한 다음 함께 해주역으로 이동해 점심 때 쯤 해주·평양·남포행 열차를 태워 주었다.
 
열차를 타고 그날 오후 늦게 평양 대동강역에 도착한 나는 도당 지도원이 가르쳐준 대로 버스정류소에 가서 모랑봉경기장행 무궤도전차를 탔다.
 
그런데 도중에 문제가 생겼다. 버스가 한참동안 달리다가 대동강을 가로지르는 옥류교를 앞에 두고 동평양 쪽에 멈춰선 것이다. 옥류교는 그 유명한 평양냉면집 ‘옥류관’에서 내다보이는, 대동강을 건너다니는 다리이다.
 
내가 운전기사에게 이유를 물으니 대동강 건너편, 그러니까 서평양 쪽에 있는 중구역 종로4거리에 지하보도를 건설하기 때문에 당분간 차가 다니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를 가든 내 위치와 목적지, 그리고 목적지까지의 방향을 알아야 가는 방법을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데 평양 시내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다 보니 내가 옥류교의 동쪽에 있다는 것, 옥류교를 건너야 모란봉여관에 갈 수 있다는 것 외에 모란봉여관의 위치가 어디인지 또 그곳까지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같은 버스에 탔던 승객들과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물어보면서 모란봉여관까지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평양 지리에 밝은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했겠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촌놈이다보니 4㎞가량 되는 거리를 그냥 걸어서 갈 수밖에 없었다. 어려서부터 많이 걸어 다닌 덕에 별로 힘든 줄은 모르고 1시간가량 걸어서 목적지인 모란봉여관에 도착했던 것 같다.
 
‘말이 씨가 된다’는 말처럼 “입은 두었다 어디에 쓰겠냐”며 다른 사람에게 물어서라도 찾아가겠다고 한 나의 말이 현실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그 후부터 나는 말을 할 때 더욱 조심하는 편이다.
 
▲ 김정일(오른쪽) 북한 국방위원장이 최고인민회의 제12기 대의원 선거일인 2009년 3월8일 평양의 김일성정치대학을 시찰했다. 김 위원장은 제342호 선거구 제22호 분구인 이 대학 투표소에서 대의원 후보자인 전일 인민군 군관에게 투표했다. 연합뉴스
 
 
천재 미술가 명수
 
모란봉여관에 도착해 도당 간부과 지도원이 가르쳐준 대로 접수 창구 아주머니에게 내 이름과 주소를 얘기하고 중앙당에서 불러서 왔다고 하자 이미 연락을 받아서 알고 있다는 듯이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그는 호실 번호를 가르쳐주면서 중앙당 지도원으로부터 앞으로 여관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말고 대기하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전해 주었다.
 
여관에서 하룻밤을 자고 아침 식사를 한 다음 방에 있는데 오전 10시쯤 50대가량 되어 보이는 남자가 찾아왔다. 자신의 신분을 ‘중앙당 지도원’이라고 밝힌 그는 내 신상을 간단히 확인한 다음 이렇게 얘기했다.
 
“평양까지 오느라고 수고했소. 지난번에 혼자서도 찾아올 수 있다더니 잘 찾아왔소. 앞으로 나와 같이 다니면서 여러 가지 일을 해야 하는데, 내가 수시로 찾아올 테니까 절대로 밖으로 나가 다니지 말고 호실에만 있어야겠소.”
 
중앙당 지도원이 돌아간 다음 방에 있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다시 나서 문을 여니 내 또래 친구가 서 있었다. 그는 나에게 “혹시 중앙당에서 불러서 왔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자 그는 자기도 중앙당에서 불러서 왔다면서 서로 알고 지내자며 자기 소개를 했다.
 
그가 바로 나중에 나와 함께 대남공작원으로 소환되어 금성정치군사대학(현재의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 같이 입학해 대학 시절 같은 소대에서 4년간 한솥밥을 먹으며 생활했고, 졸업 후에도 역시 함께 대남공작부서인 연락부(현재 문화교류국) 일본공작과 공작원으로 임명받은 친구 한명수다.
 
한명수의 고향은 황해북도 신계군이다. 그는 기억력과 관찰력이 뛰어나고 특히 그림을 잘 그렸다. 미술에 대한 조예가 거의 없던 나에게 미술에 대한 상식을 가르쳐주었던 명수의 미술 실력은 천재급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와 함께 생활하면서 훌륭한 미술가는 뛰어난 관찰력과 기억력·직관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느낌을 받기에 충분했다.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재학 당시 그의 미술 수준은 대학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중앙당에 소환되는 바람에 평양미술대학에 합격하고도 못 갔을 정도로 정말 천부적인 소질이 있었고 성격도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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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수는 대학 졸업 후 나와 함께 연락부 공작원에 임명되었는데, 일본 지역 공작을 전담하던 연락부 3과에 배속되었다.
 
그러나 3년 후인 1988년 관절염 때문에 제대(전역 또는 해임)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이후의 소식은 들은 바가 없어 알 수 없지만, 나는 그가 미술가로서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그를 생각하면 차라리 애초부터 공작원으로 소환되지 않고 미술가의 길을 갔더라면 더 훌륭한 미술가가 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서로 자기소개를 하며 악수를 나눈 다음 명수는 원래 우리는 서로 만나면 안 된다고 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중앙당에서 모든 학생들에게 호실도 따로따로 정해 주었다고 했다. 그리고 중앙당 지도원이 자기에게도 서로 만나지 말 것을 지시했다면서 앞으로 중앙당 지도원이 물어보면 서로 만난 적이 없다고 대답하자고 했다. 그 후 나와 명수는 신체검사와 면접 때마다 늘 같은 승용차를 타고 함께 다녔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 2021년 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 친가 쪽 가족·친척이 전혀 없는 저로서는 사실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아버지를 키워오시며 해 주신 모든 것들이 궁금하기만 해요. 특히나 장남인 아버지가 어디로 가는지, 언제 다시 보게 될는지조차도 묻지 못하고 보내야만 하셨을 때의 심정은 감히 제가 상상조차 못 하겠어요…. 엄마는 군 입대날 함께하지 못하셔서 많이 우셨다던데, 할머니와의 마지막이 어땠는지 물어보면 아버지 마음이 많이 힘드실까요? 얼마전 제 꿈에 한 번도 뵌 적 없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아버지를 안아 주시는 꿈을 꾸었어요.
 
아버지: 내가 고향을 떠나올 때 너의 할아버지는 노동당 간부였고 할머니는 평범한 농민이었어. 원래 할아버지 정도의 당간부라면 할머니는 집에서 놀아도 되는데, 할아버지가 워낙 고지식한 분이어서 항상 솔선수범해야 한다고 하시며 할머니에게 농사일을 하라고 하셨지. 내가 고향을 떠날 때까지 할아버지가 매일 새벽에 들어오셨다가 새벽에 출근하셨기 때문에 언제 집에 들어왔다 나가시는지 모를 정도로 열심히 일하셨어. 할머니 역시 집안일은 증조할머니에게 모두 맡겨 놓고 당신은 늘 새벽에 밭에 나가 밤늦게까지 농사일을 하셨어. 그래서 나와 우리 형제들은 모두 증조할머니가 키우신 셈이지.
 
특히 내가 고향을 떠나올 때 할아버지는 노동당 간부였기 때문에 내가 어디로 가는지 분명 알고 계셨을 것 같은데 마지막까지도 내가 어디에 갈 것이라는 말씀은 안 하셨어. 그만큼 노동당에 충실한 당간부였지. 할머니와 증조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말씀 안 하시니까 당연히 내가 어디 가는지 전혀 모르셨을 것이고…. 증조할머니와 할머니는 내가 고향을 떠나올 때 추운 날씨에도 마을 어귀까지 따라 나오시면서 눈물로 나를 배웅해 주셨어.
 
당시 할아버지는 해주에 있는 도(道)공산대학(노동당 간부 양성기관)에서 소집교육을 받고 계셨기 때문에 내가 평양으로 출발하기 전 해주역에서 만났어.
 
원래 할아버지는 과묵한 분이셔서 다른 사람들은 물론 아들인 나와도 긴 대화를 거의 안 하셨는데, 그날은 1시간가량 이야기를 나누었어. 그때 할아버지가 평양으로 떠나는 나에게 하셨던 말씀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데 “어디에 가든지 자기의 근본을 잊지 말고 무슨 일을 하든지 열심히 최선을 다하며, 항상 말을 조심하고 겸손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해라. 그리고 어떤 일에 부닥치든지 신중하게 결심하고 언제나 바르게 살아라”고 조용히 말씀하셨어. 그러면서도 내가 어디에 가는지에 대해서는 마지막까지 말씀 안 하셨어. 그러면서 할아버지가 조용히 고개를 돌려 한참동안 먼 산을 바라보시더라고. 눈물을 흘리신 것 같아. 난 그때 할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처음으로 봤는데, 나도 그래서 눈물을 좀 흘렸던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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