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젊은 작가들의 소설에서 자주 보이는 건조한 문장과 불친절한 인물 제시는 송혜령의 단편 ‘하악’에도 얼마간 나타난다. 인물들의 관계가 자연스럽게 드러나지 않아 이야기를 따라가기 어렵고, 마흔 번째 생일 하루에 두 번의 만남을 배치하여 하나의 주제로 수렴시키는 구성에도 작위성이 엿보인다. 문제는 이러한 약점을 넘어 ‘돌봄’이라는 낯익은 주제를 얼마나 자기 방식으로 처리해 내는가에 있다.
마흔이 된 자인은 생일날 어머니 금옥과 함께 발달장애 여동생 태인이 있는 ‘사랑의 집’을 찾아간다. 금옥은 태인이 혹시 임신한 건 아닐까 걱정한다. 그것은 태인은 물론 평생 딸을 돌본 금옥과 장차 그 책임을 떠안을 수도 있는 자인에게도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다. 금옥이 장애를 가진 딸을 씩씩하게 감당해 왔다면, 자인은 그 부담에서 벗어나 독립했다. 직장을 전전하면서도 자기 집을 마련했고, 혼자의 삶을 꾸려간다.
저녁에는 사촌동생 서린을 만난다. 서린은 과거 튀어나온 하악을 수술하려 했고, 이를 반대하는 부모를 피해 자인의 집에 머문 적이 있다. 자인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서린을 돌보지만 점차 감당하기 어려워 결국 부모에게 거처를 알린다. 그 뒤 서린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자인은 잘 알지 못한다. 오랜만에 만난 서린의 가슴에는 자인이 몰랐던 흉터가 있다. 작품은 그 원인을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자인이 알지 못했던 서린의 시간과 고통을 가리키는 흔적이 된다.
더욱 뜻밖인 것은 서린에게서 태인의 흔적을 발견하는 일이다. 태인이 그린 그림과 만든 물건들이 서린에게 있다는 사실은 서린이 자인도 모르는 사이 태인과 관계를 이어왔음을 암시한다. 자인이 한때 돌보다 끝내 감당하지 못했던 서린이 오히려 자인이 거리를 두어온 태인에게 다가가 있었던 셈이다. 이 역전에서 소설의 주제가 힘을 얻는다.
제목 ‘하악’은 일차적으로 서린이 수술한 아래턱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것은 한 인간의 결핍과 상처, 그 때문에 타인의 돌봄을 필요로 하는 순간으로 의미가 확장된다. 특히 자인이 알고 돌보았던 하악의 상처와 전혀 알지 못했던 가슴의 흉터가 대비된다. 우리는 타인의 상처를 얼마나 알고, 그 상처 곁에 얼마나 오래 머물 수 있는가. ‘하악’은 이 질문을 태인과 서린을 통해 자인에게 되돌려준다.
그것은 결말의 자기 인식에서 날카로워진다. “역했다.” 자인은 자기를 직시하면서 앞으로의 자신까지 “예감했다.” 자신이 “이미 태인을 버렸으며 앞으로도 어쩌면 수십 번 더 버리리라는 것”, 마침내 “자기는 그런 짓을 하고도 괜찮을 사람이라는 것까지” 깨닫는다. 돌봄은 여기서 따뜻한 선의나 숭고한 희생으로 미화되지 않는다. 누군가를 지속적으로 돌보는 일은 어렵고,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조차 외면할 수 있으며 그러고도 일상을 살아갈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이 낯익은 ‘돌봄’의 주제를 ‘하악’이 자기 것으로 만드는 대목이다. 돌봄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삶이 있듯 돌보는 사람에게도 자기 삶이 있다. 그 두 삶은 때로 충돌하며 쉽게 화해하지 않는다. 건조한 문장, 매끄럽지 못한 인물 제시, 두 만남을 대칭시키는 다소 도식적인 구성은 작가가 앞으로 더 많이 써야 한다는 인상을 남긴다. 그럼에도 돌봄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 어려움, 끝내 돌보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까지 밀고 들어간다는 점에서 ‘하악’은 읽어볼 만한 문제적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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